로이드 존스, '빌립보서 강해', 13장 하나님의 주도권 (김영희)
13 장 하나님의 주도권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2-13)
- 이 두 절은 역사적으로 수많은 논쟁과 토론을 촉발시켰던 중대하고 흥미로운 구절일 뿐 아니라, 감히 말하건대 보편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장 완벽하게 요약해 놓은 두 절이기도 하다. 이 강력한 선포를 제대로 이해할 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나가며 싸워나가는 데 필요한 큰 위로와 격려를 확실히 받을 수 있다.
이런 말씀을 대할 때 가슴 두근거리는 거룩한 기대감을 느낀다. 이 말씀은 더 이상 이런 경험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 시대 전반에 대한 비판이요 특히 기독교회에 대한 최종적인 비판이 아닐까 생각한다. 신학적인 문제에 직면하기 싫어하는 것, 설교를 그저 우리를 토닥여 주고 격려해 주는 말이나 실질적이고 심리적인 조언쯤으로 여기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비극이 아닌가? 우리 조상들은 이런 구절을 대할 때 흥분되어 그 일에 푹 빠졌다.
- 우리는 세 가지로 이 진술에 접근할 수 있다. 일반적, 신학적, 또 실제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Ⅰ. 일반적 접근
12절 서두에서 “그러므로”라는 말이 앞뒤를 연결하고 있기 때문에 전체 맥락을 보아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사실상 1장 말미에서 실제적인 권면을 시작한다. 그리고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라고 권한다. 빌립보 교회가 우애와 일치 속에 조화롭게 살기를 바랐던 사도는 성육신과 부활 교리를 토대 삼아 주님의 영광스러운 예를 들면서 호소한다. 지금 연결선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충만하게 살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사도는 그들을 사랑했고 그들도 사도를 사랑했다. 개중에는 바울이 없으면 아예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없을 것처럼 여기는 이들까지 있었다. 바울은 지금 그 점을 염두에 두고 호소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일반적인 차원에서 말하는 바는 이것이다. “내가 있어야만, 너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라.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너희에게 처음 복음을 전하는 특권을 누렸고, 너희를 가르치고 세워 줄 수 있었다. 너희 삶을 인간적인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이것은 내 사상도 아니고, 내가 발전시킨 이론도 아니다. 내가 없으면 안 되는 나만이 특별한 인생관으로 여기지 말아라. 나도 구원받았고, 너희도 구원받았다. 나는 너희가 받은 이 선물, 너희가 받은 이 삶을 완성하기를 바란다”라고 말한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꼭 있어야 할 분은 이미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지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요한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 안에서 일하시며 “소원을 두고 행하게”하신다는 것이다.
적용)
사도는 지금 일반적인 말을 하고 있다. 설교자와 선생들은 우리를 돕는 귀한 존재지만 필수적인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미 우리 것이다. 모든 선생과 설교자가 침묵하고 모든 교사가 사라진다 해도 궁극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선생과 설교자가 침묵하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멸절당한 시절이 있었지만 기독교는 사라지지 않았다. 각 사람의 영혼에 임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흘러나온 것이기에. 모든 참 신자가 개인적으로 소유한 것이기에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개인의 것 -“너희 구원”- 이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영광스럽게도 사람에게 달려 있지 않으며 심지어 교회의 선생들에게도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기를 바란다. 사람에게 맹목적인 의존성이나 애착을 보이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교리에 무지하거나 교리를 이해하지 못해서 사람에게 과도히 의존하다가 그리스도인의 삶이 주는 가장 큰 혜택을 놓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Ⅱ.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접근
1) 바울이 구원 자체에 대해 뭐라고 하느냐 하는 것이다. 사도가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미 있는 구원을 이루라고 권고한다.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는 사람들은 구원을 이루기 위해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해야 선물을 구원으로 받는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이것은 “너희가 선한 삶을 살면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구원을 선물로 받을 것이다”라는 말이 아니다. 사도의 편지를 받는 자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다. 그러므로 12절은 “이미 출발했으니 계속 전진하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 점을 1:6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계속하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이것은 아주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사실이다. 우리의 힘으로는 구원을 받을 자격을 취득할 수도 없고 구원에 합당한 공로를 쌓을 수도 없다는 것이 신약성경의 명제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하나님이 주시기 전까지 우리 쪽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
신약성경은 칭의와 성화와 영화를 가르친다. 이것이 구원의 세 가지 요소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용서하신다. 인간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그러나 성화는 다르다. 성화는 우리 안에서 진행되는 과정, 완성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어 무죄한 자로 여김을 받는 것이며, 성화는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도달하게 되는 상태가 영화이다.
실제로 구원에는 이 세 가지 요소가 다 포함되어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떤 의미에서 이미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 구원을 받고 있으며, 또 다른 의미에서 장차 궁극적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다.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바는 칭의가 아니라 성화이다.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그 구원을 이루라. 사도의 관심은 우리가 이미 받은 삶을 완성하는 데 있지, 그 삶 자체에 도달하는 데 있지 않다. 이미 받았으니 그렇게 살라는 것이다.
“이루라” 성화는 우리가 움직여야 하는 일이다. 성화에서 인간의 역할을 아주 수동적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가만히 자신을 맡기기만 하면 완전해진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맡기고 그가 하시게 하라”는 구절을 근거를 삼는다. 사도는 “이루라”는 능동적인 명령을 한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것이다.
나의 모든 노력과 행함과 수고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말은 맞다. 그러나 이처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내가 동원할 수 있는 힘과 기력과 노력을 다해 행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이렇게 행할 수 있는 신분을 얻었다는 뜻이다. 구원을 이루라는 것은 그 신분을 얻은 자들에게 주는 권고이다.
2) 이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역할과 우리의 역할이 어떻게 나뉘느냐 하는 것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한 가지 위험은 당파심으로 편견 없이 복음 메시지와 말씀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입장을 입증하는 데만 골몰하는 것이다. 또 다른 위험은 성경의 정확한 말씀을 벗어나 자기 논리를 내세우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유익과 궁극적인 성화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신약성경에는 모순되게 보이는 말씀들이 있지만, 사실은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우리의 머리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납득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성경에 가르치는 계시에 순복하는 것이다. 구원의 문제에서 항상 하나님이 모든 주도권을 행사하신다는 것은 논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요약하면, 성경에 따르면 사람은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로 태어나고 아무것도 못하지 못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다고 가르친다.(롬8:7) 마음 자체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능력도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일까? 무엇이 우리를 달라지게 한 것일까?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인하여”(엡2:4)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주도하셨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성령 하나님이 찾아와 사로잡으시고 여러분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 하나님을 바라보는 관점을 주신 것이다. 다름 아닌 하나님이 우리를 소생시키시고 흔들어 깨우시며 생명을 선물로 주신 것이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이 일을 시작하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계속 진행해 나가신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본성 자체를 바로 잡으신다. 우리 존재 깊은 곳에서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무언가를 행하신다. 바울은 그것을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고 말한다. 이 보다 더 근본적인 조처가 있을 수 있는가? 하나님이 내 의지를 다스리시고 내 갈망과 소망과 열정과 사고를 불러일으키시며 북돋우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시작하셨고 하나님이 지속시키시며, 하나님이 완성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직접 행하라고 하는 것, 직접 무언가를 하라고 하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를 설득하시고 우리에게 거룩한 갈망을 주심으로써 갈망을 느끼게 만드시고, 이러한 일들을 하게 만드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 의지를 강제로 움직이신다는 말이 아니다. 여기에는 본질적인 모순이 없다. 하나님은 이렇게 주도권을 행사하신다.
바울이 이 주도권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이 “자기의 기쁘신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인이요 반역자요 형벌을 받아 마땅한 자들임에도 그 기쁘신 뜻을 위해 은혜로 이 일을 시작하시고 계속해 나가신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신약성경의 영광스러운 교리가 아니겠는가?
이런 사람이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책임감을 느껴 내 의지와 에너지를 다 써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런 마음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렇다고 내 몫의 책임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이 교리가 이 세상에서 인내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고 있다. 첫째, 하나님이 내 의지를 다스리시는 한, 나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사람들은 바르게 살려는 의지도 없고 갈망도 없기 때문에 실패한다. 그러나 여러분 안에서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가 여러분에게 바르게 살려는 의지를 주시기 때문에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둘째, 문제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려는 의지가 있음에도 우리가 약하다는 것이다. 바울은 “괜찮다. 그가 이 일을 행할 에너지도 주신다”라고 말한다.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갈망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힘도 주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이 두 가지가 보장되어 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서 행하심을 인식하고 있는가? 이 질문이 가장 중요하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증표이다. 일정한 인생관이나 도덕률 등을 고수하는 것은 증표가 되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가늠하는 근본적인 기준은 하나님이 자기 안에서 행하심을 아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하신 행동’이라는 말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음을 인식하고 있는가? 그가 내 삶에 개입하시는 것, 나를 휘젓고 설득하며 간섭하시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가?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는 질문이다.
온 우주를 만드시고 그 만드신 만물을 보전하시는 하나님이 나의 죄나 무가치함과 상관없이 친히 내 삶을 빚어 나가심으로 마침내 완전한 작품을 만들어 내실 것이며, 하나님 앞에 서서 그 얼굴을 뵙게 해 주실 것이다. 이것을 보장하는 이 교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