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로이드 존스, '빌립보서 강해', 16장 본질적인 차이 (김영희)

강대식 2019. 11. 8. 21:27

16 장  본질적인 차이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2:14-16 )

 

본문에서 사도는 빌립보 교회에 삼중의 호소를 하고 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와 아버지의 관계를 살펴보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신의 본질을 살펴보라는 것이며, 세 번째는 우리와 주변 세상과의 관계를 살펴보라는 것이다. 이 호소 중 첫 번째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와 아버지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 이제 두 번째 측면으로 그리스도인의 본질, 즉 그리스도인과 그 자신의 관계이다,

흠이 없고”, “순전하여”, “흠 없는(책망할 것이 없는)” 이 세 가지 말로 이 주제를 제시하고 있다. 이 말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인의 본질적인 성품이 무엇인지 알려 준다.

1. 흠이 없고 - 이것은 비난받을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외적인 모습이 도덕적으로 온전하다는 의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이들이 우리를 유심히 살펴보며 지켜본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죄나 잘못의 흔적이 있으면 안 되고 흠이 있으면 안 된다.

우리 주와 구주되신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본이 되신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8:46) 그의 삶에는 흠이 없었다. 주님과 주님의 삶을 보고 그의 성품과 행동을 보면서 도덕적으로 비난할 만한 것을 찾아낼 수 없었다. 사도는 우리도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거룩한 이름에 누가 되지 않게 살아야 한다. 삶으로 우리가 누구의 자녀인지 보여 주어야 하며, 책잡힐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2. 순전하여 - ‘순수하여, 순진하여, 정결하여, 순결하여라는 것이다. “흠이 없고가 외적인 모습이 도덕적으로 온전하다는 뜻이라면, “순전하여는 속과 내면이 도덕적으로 온전하다는 뜻이다. 마음 깊은 곳에 숨어 드러나지 않는 참모습에 대한 말이다. 외적인 행동과 처신을 바르게 하려면, 당연히 내적인 원천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성품과 행동은 속에 있는 참모습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는 잘못된 행동뿐 아니라 잘못된 생각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산상설교 가운데 주님은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의 진정한 의미는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한 것이므로 음욕도 품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에서 정욕이나 욕망은 행위 못지않게 가증한 일이며, 탐심 또한 도둑질 못지않게 책망 받을 일이다. 그러므로 행동만 흠이 없고 비난에서 자유로우면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의 원천이 되는 생각과 모든 일의 동기도 죄와 악에서 안전히 자유로워야 한다. 우리는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빛들의 아버지의 자녀로서(1:13, 17) 흠 없고 순전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기준은 흠이 없을 뿐 아니라 순전해야 한다. 순전함이 우리의 본질적인 성품이 되어야 한다.

 

3. 흠 없는” - 오점이 없다는 뜻의 이 말에는 다른 두 말이 다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온전한 모습을 망치는 요소가 없어야 한다. 얼룩이나 점이나 병증이 없어야 한다. 이것이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그리스도인의 본이자 기준이며,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적이자 이르러야 할 자리이다. 우리가 이렇게 흠이 없어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버지를 닮아야 한다. 그러므로 아무 얼룩 없이 흠 없고 순전하게 되는 것을 나의 목적이자 모든 삶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 세 번째 측면은 그리스도인과 세상의 관계이다.

바울이 우리에게 흠 없이 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과 지위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때문이기도 하며,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 세상에 대해 해야 하는 일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그리스도인과 주변 세상의 관계를 살펴보라는 호소에 직면하게 된다. 신약성경만 아니라 구약성경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너희는 내 백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하고 열국과 구별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11:45) 이것은 중대한 호소이다.

 

이 호소가 지금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지 모른다. 우리는 작은 무리이고 그나마 수가 줄어들고 있다. 그러면서도 세상을 염려하고 있다. 이럴 때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이 바로 세상과 우리의 관계이며, 세상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으로 부르셨다. 우리가 사도의 호소를 조목조목 고찰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1. ‘그리스도인과 세상의 관계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세상은 비그리스도인들의 사고방식과 삶의 양태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들의 시각과 관점을 가리키는 것이다.

1)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흠이 없고”, “순전하여”, “흠 없는 말 자체에 이 점이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이 말들은 사도가 세상을 묘사하면서 사용하는 말들과 대조해서 살펴보면 그 의미가 더 살아난다. 그는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라고 말한다. 어그러지고는 정직하지 못하다는 뜻으로, 겉모습이 왜곡되고 비틀렸다는 것이다. 거스르는은 내적인 특질을 가리키는 말로서, 속에 있는 성품이 뒤틀렸다는 뜻이다.

 

두 종류의 말이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다. 흠이 없고-어그러지고, 순전하고-거스르고. 그리스도인은 비그리스도인과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는 중대한 원칙을 바울은 이런 식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행동은 비틀려 있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흠이 없다.

경건치 못한 비그리스도인은 본질적으로 어그러지고 비틀리고 왜곡되어 있다. 행위뿐 아니라 성품 자체가 어그러져 있다. 행위는 본성에서 나오게 되어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와 비그리스도인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분명하고도 당연한 사실이다.

 

사도는 다음 절에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나야 하며 그들을 비추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이 대조를 가장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여기서 빛은 발광체로서 세상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밤에 빛나는 달이나 별과 비슷하다고 사도는 말한다. 빛과 어둠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 속에 이미 모든 내용이 들어 있는 것이다.

자녀는 부모를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한다. “나는 태생으로 보나 타고난 본성으로 보나 교육받은 것으로 보나 그 밖의 어떤 요소로 보나 이렇게 완전히 다른 신분을 얻을 자격이 없음에도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되었다. 하나님이 친히 성령을 통해 나를 교육하시고 가르치셨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처럼 자기 속에 신의 성품이 있음을 알면서도 자신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드러낼 마음이 없다는 것은 비극이다.

 

이처럼 우리가 세상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20세기 그리스도인과 청교도들 간의 차이를 보면 알 수 있다.”라고 말한다면 불공평한 일이 되겠는가? 저는 그렇게 된 데 1차대전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때 군목 한 사람이 큰 인기를 끌었는데 일반인과 아주 비슷하게 행동한다는 이유로 멋진 그리스도인 취급을 받았다. 여느 사람들이 하는 일을 전부 하기 때문에 멋진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다. 일반인들과 똑같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처럼 세상과 닮으려는 합당치 못한 소원을 품는 것, 자신들이 다르다는 사실이 드러날까 봐 무서워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리스도인은 모세와 같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모세가 산에 올라 하나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교제했을 때, 얼굴에 광채가 생겨났다. 산에서 내려온 후에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반영된 그의 얼굴에서는 계속 빛이 났다. 그것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했기 때문에 모세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려야 했다. 우리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광채가 우리 얼굴과 인격에 나타나서 하늘의 달과 별처럼 세상의 빛으로 사회에 우뚝 서야 한다.

 

2) 우리는 그리스도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3:20),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5:13) 빛의 역할은 어둠의 일을 책망하고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의 역할은 사람들이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실상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을 하려면 그들과 정반대의 삶을 살아야 한다.

2. 어떻게 세상과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가?

 

외양의 문제이다. 세상은 점점 더 요란하고 대담하며 교만하고 공격적인 외양을 보이고 있다. 첫눈에 겸손하게 보이는 사람을 만나는 경우가 드물다. 외양에서부터 대담하고 공격적이고 교만한 것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의 외양 자체가 이 죄의 요란함과 도발에 대한 책망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언어생활로 어둠의 숨은 일을 책망해야 한다. 욕설과 더러운 말과 표현들을 책망해야 한다. 허위와 거짓이 주변에 만연해 있는 것은 무섭고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그리스도인은 참되고 정확한 말만 함으로써 악의 일을 책망해야 하고 세상의 죄를 드러내야 한다.

 

정직함의 문제이다. 절도와 강도와 사기가 점점 더 이 시대 삶의 특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철저한 정직함으로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단순히 우리가 다르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삶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의 임무는 그들의 죄를 깨우치는 것이다.

 

일에 대한 태도이다. 사람들은 최소한 일하고 최대한 얻자는 것이다. 자신들은 끊임없이 즐기며 살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최소한의 일만 하려 든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정직하게, 온 힘을 다해, 최대한 잘 일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주변 세상에 보여 주고 잘못된 직업관과 노동관의 본질이 죄에 있음을 드러내야 한다. 받는 돈에 합당하게 일하는 성실한 노동관을 가지자.

 

결혼 생활과 부부관계의 문제이다. 가정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이때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점이 결혼생활에 어떤 차이를 가져오는지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할 놀라운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우리의 결혼관과 가정관 자체가 세상에 대한 책망이 되게 하자.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부부관계를 보고 우리도 저렇게 살 수 있었으면하고 말할 수 있게 하자.

 

우리는 이렇게 대조되는 삶, 다른 삶을 살고 있는가? 사도의 권면은 삶 전체를 향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들어갈수록 편협하고 갑갑하고 답답한 삶이라고 느껴지는가? “그렇게 편협하고 답답한 삶은 옛날 청교도들한테나 가능한 거지라고 말하고 싶은가? 신약성경이 이런 삶을 요구한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 이름에 영광을 돌리고 싶노라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이 호소를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이 시대와 이 세대를 향해, 계속 이렇게 살면 현재의 도덕적인 혼란보다 더 큰 실패를 겪게 된다고 경고해야 한다. 도덕적인 부패는 모든 면에서 멸망을 불러오게 되어 있다. 이것을 경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