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빌립보서 강해', 17장 생명의 말씀 (김영희)
17 장 생명의 말씀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빌2:14-16상)
“생명의 말씀을 밝혀” - 하나님의 자녀일 뿐 아니라 특별히 세상의 “빛”인 그리스도인에 대해 더 언급해야 할 사실이 있다. 우리의 증언은 단지 우리와 다른 유형의 삶을 폭로하고, 그에 따를 결과를 미리 경고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빛으로서 감당해야 할 적극적인 역할이 있다.
1. 그것은 지식을 전하고 교훈을 주는 것이다.
“밝히 깨우친다”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여러분은 사람들에게 위험만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행동하고 살며 행해야 하는지도 밝히 깨우침으로써 도움과 교훈을 주어야 한다.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은 무지로 거의 어둠의 상태에 있었던 인류가 빛과 진리를 발견함으로 대중과 국가를 가르치는 자리에 이르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빛의 핵심적 역할이 이것이다.
1) 바울은 교회 전체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다. 바울에 따르면 이것은 교인이 해야 하는 일이다.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생명의 말씀을 밝혀야 한다는 생각은 뒷전으로 미루어 둔 채, 마치 설교자나 목회자만이 가리키는 말 인양 착각할 위험이 있다. 현 상황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오늘날보다 더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요했던 적은 없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알리고 전파하는 일은 각 개인의 일상적인 접촉을 통해 이루어진다.
초대교회 때도 그랬다.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우리는 어찌 되었든 그들과 달리 성경을 이해할 도구를 갖추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토대 자체가 흔들리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파멸과 재앙의 의미가 무엇인지, 시대의 긴박성과 불확실성이 어떤 것이지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그리스도인 개개인에게 맡겨진 의무가 있다는 것, 그 중 하나가 바로 복음을 알리는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생명의 말씀을 밝히지 않으면 말씀은 무지와 어둠 속에 묻혀 버릴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행동과 행실이 바로 이 일, 즉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일과 직결됨을 알아야 한다. 사도는 우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 목적은 결국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데 있다. 이것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살라는 소극적인 호소가 아니라 적극적인 호소이다. 그리스도인에게 도덕과 윤리는 복음의 서곡에 불과하다. 우리는 흠이 없고 순전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일까지 해야 한다. 우리는 단순히 세상 사람과 다른 사람들이 아니다. 선한 삶 자체를 목표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본질상 적극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단순히 그른 일만 책망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옳은 일까지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자기가 가진 좋은 것을 전하고 주는 사람들이다.
2) 그리스도인이 이런 존재가 된 것은 복음 때문임을 세상에 분명히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모습과 행동 및 원천과 기원이 무엇인지 명백히 알리라는 것이다. 즉 복음이 나를 책임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 주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살고 있다. 좋은 자질을 가지고 태어났고 훌륭하게 자랄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럴 때 드는 생각은 ‘그래 저렇게 되려면 태어날 때부터 달라야 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주는 인상은 ‘복음이 없다면 저렇게 되지 못하겠다’라는 것이다. 우리의 행동과 대화와 행실과 활동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켜야 한다. 오직 복음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유일한 설명이며 모든 행동의 합당한 동기라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행동과 행실은 복음의 서곡이 되어야 한다.
3) 그리스도인은 생명이 있는 사람들 -“생명의 말씀을 밝혀”- 임이 분명하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기계적인 데나 형식적인 데가 없어야 한다. 순전한 도덕주의자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무서울 정도로 정확하고 기계처럼 완벽하다. 그래서 생동감이 없고 너무 차갑다. 무언가 본질적인 느낌,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 없다. 그리스도인은 그래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살아 있는 사람이다. 살아 있기 때문에 생명의 말씀에 관심을 쏟는 것이다.
2. 이 권면이 복음에 대해 알려주는 바는 무엇인가?
그는 복음을 “생명의 말씀”이라고 부른다. 얼마나 놀라운 표현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집에 모이기를 좋아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왜 우리는 복음을 전하거나 복음에 대해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할 때마다 이것이 생명의 말씀임을 기억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복음을 일개 철학으로 치환하려 드는 무서운 위험과 맞서 싸워야 한다. 바울도 이 위험을 알고 골로새 교인들에게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고 말한 것이며(골2:8), 고린도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었다고 말한 것이다.(고전1:17)
사람들은 삶을 바라보는 방식에 여러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철학에 여러 갈래가 있다고 말한다. 기독교적인 관점도 그중의 하나라고 한다. 그들은 “기독교는 정말 흥미로워 얼마나 매력적인 인생관인지 몰라”라고 한다. 또 성경에 대해서도 “정말 연구해 볼만한 재미있는 책이다”라고 한다. 성경을 단지 ‘재미있는’ 책으로 보는 사람은 복음을 일개 철학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성경을 읽어 보면 무서운 느낌이 든다. 개념과 사상과 사고의 영역 밑을 파고들기 때문이다. 성경은 살아 있는 말씀이다.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말씀이다.(히4:12)
복음은 일개 철학이 아니다. 우리는 단순한 개념과 사상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생명의 말씀, 역사하는 말씀이다. 능력이 넘치는 말씀, 강력한 말씀, 움직이는 말씀이다. 여호와는 자신의 말씀이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라고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다.(렘13:29)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롬1:16) 복음은 살아 있다. 복음은 살아 있는 생명의 말씀이다.
* 왜 복음을 생명의 말씀이라고 부르는가?
① 복음은 생명에 대해 알려주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복음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우리가 죽어 있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가 날 때부터 “허물과 죄로” 죽어 있었다고 말한다.(엡2:1) 인간은 말씀이 찾아와야 비로소 자신이 영적으로 죽어 있음을 발견한다. 말씀은 육신과 동물의 차원에서 살아 왔다는 것을 깨우쳐 준다.
그리고 그것과는 다른 종류의 삶이 있다는 것, 우리는 원래 하나님과 교통하며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라는 것을 알려 준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17:3)
우리는 삶을 수평적으로만 바라볼 뿐 수직적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보이지 않는 실재, 유일하게 참된 실재에 대해 죽어 있다. 그런데 생명의 말씀이 찾아와 죽음을 이야기하며 우리의 원래 상태를 폭로한다.
감사하게도 복음은 이처럼 우리에게 아무런 생명이 없음을 보여 준 후에 다른 종류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복음은 단순히 힘을 내서 더 나은 삶을 살라고 권하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말을 해 준다. 이제껏 살아온 삶과 다른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주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을 보면 이 점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생각이나 행동만으로는 안 되며, 새로운 출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위로부터 나게 해주셔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은 바로 이 삶에 대해 알려 준다. 하나님이 하나의 용어나 명제가 아닌 실재가 되시는 삶, 하나님을 아는 삶을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복음은 성령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더불어 사귈 수 있다고 말한다. 복음은 우리의 출생이 어떠하든,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든 상관없이 새 생명을 받을 수 있다고, ‘새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복음은 이렇게 놀라운 영적인 삶을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하는 데서 더 나아가, 우리가 어떻게 이런 삶을 얻을 수 있게 되었는지도 알려준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나사렛 예수가 하늘의 영광을 떠나 인간의 모든 한계를 안고 이 땅에 오셨다고 말한다. 그뿐 아니라 구덩이 속까지 내려와 우리 죄를 지시고 우리를 속죄하셨다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담 -지금까지 우리 눈을 가리고 있던 담- 을 허무시고 다시 살아나셨다. 우리와 같이 되심으로 우리를 붙잡아주셨다. 우리는 그의 본성을 받고, 그의 생명을 받는다. 그가 보내신 성령을 통해 능력과 지각을 얻어 성장해 나간다. 생명의 말씀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
우리가 세상에 제시해야 할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이 사실을 생각하며 그들을 크게 긍휼히 여겨야 한다. 그래서 저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비난하지 않는 것이며, 언급할 때도 아픈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은 영적인 생명이 없어 죽어 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우리는 이런 실상을 보여 주고, 다른 삶의 가능성을 알려 주어야 하며, 어떻게 이 다른 삶이 가능해졌는지 말해 주어야 한다. 이처럼 복음은 생명에 대해 알려 주는 말씀이다.
② 복음은 생명을 주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1:18) 진리의 말씀은 생명의 씨로 사람들의 영혼에 심겨지고 이식되어 생명을 준다.
③ 복음은 삶을 지탱하는 말씀, 삶을 먹이는 말씀, 삶을 떠받치는 말씀이다.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2:2) 자라고 싶다면 이 젖을 먹어야 한다. 이 젖에는 생명을 주고 유지시키는 성분이 들어 있다.
④ 복음은 우리에게 주신 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여주는 말씀이다. 복음은 어떻게 행해야 할지 비추어 주는 등이요 빛이다. 재앙과 위험을 드러내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보여주며, 그가 원하시는 삶이 어떤 것인지 알려 준다.
복음은 이 모든 측면에서 생명의 말씀이다. 우리는 생명의 말씀을 밝혀야 한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존재로 말씀을 밝혀야 하며, 흠 없고 순전하며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의 존재로 생명의 말씀을 밝힐 뿐 아니라 복음 자체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복음을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괴로워하는 영혼을 도와줄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지 알려줄 수 있어야 하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주고 그의 거룩한 임재 앞에 영원히 서도록 준비시켜 주는 생명의 말씀을 밝혀야 한다.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이여, 일어나 행하자. 말씀의 횃불을 들고 흔들어 세상의 어둠을 밝히자. 사람들이 어둠의 나라에서 빛의 나라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 갈 수 있게 하자. 이처럼 어둡고 어려운 시대에 빛이 되고 빛을 전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큰 특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