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교리강좌 3', 2장 교회의 표지와 정치, 1 교회의 세 가지 표지
제 2 장 교회의 표지와 정치
1. 교회의 세 가지 표지
1) 말씀 선포
교회의 일차적 임무이다. 교회는 바로 그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고 생겨났다.
가. 교회에서 성도들을 세우고 견고하게 하기 위해 선포된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머리 되심과 주 되심을 인정하는 사람들의 교제이며, 말씀은 이들이 믿음 안에서 강건해지도록 하기 위해 선포된다. 신약의 서신서들은 이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기록되었으며, 사도들과 선지자들도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선포했다. 사람들이 회심하는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아기로 태어났으며. 교훈을 받아야 했다. 오류에 대해 경고를 받고 이단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했다. 그래서 교회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나. 복음 전도
주님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것처럼, 제자들도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가지고 오셨으며, 우리도 같은 메시지를 가지고 보냄을 받았다. 외인들이 자신들의 죄를 자각하고, 우리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명력 있는 믿음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것은 교회의 사역의 일부이다.
2) 성례 집행
교회는 말씀 전파와 관련하여 성례가 올바르고 참되게 시행되는 곳이다.
3) 권징
이 교리가 심각하게 무시되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교회가 왜 그 모양인지, 왜 교인들의 수는 줄어들고 교회가 사람들에게 능력도, 영향력도 끼치지 못하는지, 왜 교회가 세상적 여흥이나 놀이 같은 것을 끌어들이지 않고서는 주장을 펼칠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지, 왜 교회가 그렇게 위험한 상황에 처했는지 설명해 달라고 한다면, 저로서는 권징을 시행하는데 실패한 것이 궁극적 원인이라고 말씀 드릴 수 밖에 없다.
불행하게도 징계가 소홀히 여겨지고 있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은 그렇게 된 것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이 주제를 충분히 자세히 다루고 싶다.
권징이 시행되어야 하는 근거는 성경이다. 주님이 친히 하신 말씀이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5-17).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롬 16-17). 권징은 고전 5장 전체의 주제이다. 마지막은 이런 말로 끝난다.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이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을 것이다.
고후 2장, 특히 바울이 징계 받은 사람을 다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5절에서 10절까지에 이 문제가 다시 언급된다. 규모 없는 삶을 사는 교인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침을 주는 살후 3장에서도 이 문제가 등장한다. 디도서 3:10에는 분명한 명령이 있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요한이서 10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계시록에 실려 있는 각 교회들에게 보내는 여러 편지에도 권징의 시행에 대한 권고가 담겨 있다.
권징 시행에 반대하는 자들이 범하는 오류
이런 정당화하는 근거를 마태복음 13장의 가라지 비유에서 찾는다. 이것은 성경을 극도로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가라지의 비유는 분명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한 표현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보다 크다. 우리 주님 스스로 이 비유를 해석해 주시면서 곡식과 가라지를 뿌린 밭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좋은 씨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지만,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이다. 그러므로 가라지의 비유는 지역 교회내의 권징 문제와 아무 상관도 없다.
가라지의 비유를 교회에 적용하는 것은 로마카톨릭과 동일한 오류에 빠지는 것이며, 로마 교회를 따르는 대부분의 교회들 역시 같은 오류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권징은 두 가지 주요한 방침에 따라 시행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권징은 교리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딛3:10). 요한은 참된 교리를 전달하지 않는 사람은 교회에는 말할 것도 없고 집으로도 결코 영접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 의미는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를 그들의 집에 절대 들여서는 안 된다는 말잉 아니다. 그런 말이 절대로 아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일 뿐 아니라 교사라고 주장하면서도 거짓을 가르친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절대 집에 들여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고전 5:11에서 바울은 이것을 명쾌하게 사실상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 모든 권징의 문제에서 나는 바깥에 있는 세상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모든 사람들로부터 너희를 지키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다. 단지 형제인 어떤 사람이 이런 죄를 저지르면 그와는 사귀지 말라는 말이다.”
저는 독일로부터 치명적인 고등비평이 유입되기 시작하던 19세기에 우리 선조들이 마땅히 해야 했던 권징을 시행하는 데 실패했다고 주저 없이 말한다. 잘못된 관용과 가라지 비유에 대한 오해로 인해 그들은 상황이 곧 나아지기를 소망하며 이 잘못된 가르침을 허용했다. 그들은 긍정적으로 증언하고 부정적인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했다. 교회 지도자들이 범한 그 끔찍한 잘못의 결과를 우리 세대가 거두고 있다.
신자의 삶도 권징의 대상이다.
신자가 모순 되고 죄악된 삶을 사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의에 헤아릴 수 없는 해를 끼친다. 그가 아무리 정통적인 교리를 주장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기질과 욕구와 감정과 육욕을 통제하고 다스리지 않는다면 그는 자기가 전파하는 믿음을 말과 행동으로 부인하는 자요, 외인들에게 장애물과 거치는 것이 되는 사람이다.
성경은 불순종하는 형제가 돌이켜 징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는 실제로 교회에서 쫓겨나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런 자를 사탄에 내주어”야 할 수도 있다.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고전5:5) 하기 위해서이다. 정확하게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다. 사탄에게 내어주면 사탄은 그의 육체에 고통을 줄 것이다. 곤고하고 비참한 상태가 됨으로써 제 정신이 들어 그의 영혼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부흥과 각성이 일어난 시기의 교회사를 읽어보라. 시대와 관계 없이 그런 시기에는 언제나 권징이 두드러지게 시행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웨슬리가 도착했을 때 육백여명의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가 교인들을 한 명씩 점검하기 시작했으며, 며칠 후 그가 점검을 다 마치자 교인 수는 삼백 명으로 줄어 있었다. 존 웨슬리가 오늘날 다시 돌아온다면 어떻게 행동할지 궁금한 생각이 든다!
부흥과 각성의 기간에는 모든 교회의 지도자들이 언제나 정결함에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신약성경으로 돌아가서 그 가르침에 따라 살기만을 힘썼다. 신약은 하나님이 쓰시는 그릇, 도구, 통로는 반드시 깨끗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단순히 ‘모인’ 교회가 아니라 ‘정결한’ 교회를 가르치는 것이다. 여러 면에서 세상과 섞인 교회가 어떻게 성령의 통로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런 일은 거의 생각할 수도 없다! 교회의 세 번째 표지는 권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