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낙흥,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 5 확신
5 확신
참으로 은혜로운 정서의 다섯 번째 표지로 에드워즈가 제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들의 확실성과 실재성에 대한 확실한 판단”이다.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 은혜로운 정서의 표지들 중 하나다. 은혜받은 사람들은 모두 복음의 진리에 대한 “완전하고 철저한 확신”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복음의 진리에 대한 의심이나 논란의 여지가 사라진다. 복음의 위대한 교리들이 더 이상 의심스러운 일들이나 견해가 되지 않는다. 참된 믿음이 있는 자는 확신이 있다.
이성적이면서 영적인 확신
확신은 두 가지 조건을 구비해야 한다. 첫째는 “이성적 확신” 둘째는 “영적 확신”이다. 영적 확신은 “중생한 자들” 혹은 “영적인 사람들” 즉 자기들 속에 “생명의 원리”로 내주하는 성령을 가진 자들에게 고유한 것이다. 즉 복음의 사실성과 신성에 대한 확신은 이해력에 대한 성령의 조명으로부터 온다고 믿는다.
확신은 “영적 시각” 혹은 “이해”를 가짐으로 가능하다.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에 나타난 것들의 “비길 데 없는 아름다움”을 보거나 감지하게 된 사람은 그 신성을 확신하게 된다. 하나님의 영광과 신적 일들의 아름다움이 우리 마음에 그것들의 신성을 확신시키는 것은 두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직접적으로요, 다른 하나는 간접적으로다
직접적 방법
마음의 눈이 열려 신적인 것들의 “거룩한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보게 되면 자연인에게는 그처럼 이상해 보이는 복음의 가장 중요한 많은 교리들이 진실임을 즉각 알게 된다. 복음의 교리들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밝히 드러난다. 그는 복음에 대한 역사적 증거만 가지고 복음의 교리들을 확신하기에는 미흡하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마음이란 박식한 사람들이 복음의 진실성에 대해 들려 주는 모든 말을 들은 후에라도 어떤 커다란 시험을 만나면 의문을 품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소유를 팔고, 모든 것을 겁 없이 버리는 모험을 무릅쓰며, 가장 지독하고 심한 고문까지 견디며, 세상을 초개처럼 여기고,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에게 소중한 전부를 배설물처럼 여길 수 있으려면 역사로부터 얻을 수 있는 증거 이상의 다른 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증거, 즉 “내적 증거”다. 성경의 “자증성”과 일치한다. 이 “내적 증거”가 있어야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 생긴다는 것이다. 복음의 신적 영광을 보는 “영적 시각”이라는 것이 있다. 영적 시각이 있는 사람은 성경 계시 안에 있는 내적 증거를 본다. “하나님의 복음은 증거를 구걸하러 다니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자체 안에 최고의, 그리고 가장 적합한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자유주의에 대해서는 에드워즈의 방법이 필요하다. 마음의 눈이 열려 하나님의 영광과 신적 사물들의 아름다움을 보아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과 능력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어야 한다. 오늘날 정통적 고백주의자들의 문제는 그것이다. 머리로는 정통 신학을 고백하나 마음과 체험에 그것이 부재히다. 감정도 의지도 행함도 따르지 않는 정통주의는 경건주의와 합리주의의 반발만 낳을 뿐이다.
간접적 방법
에드워즈는 신적 영광을 보는 시각이 기독교의 진리를 확신시켜 주는 간접적 방법을 설명한다. 첫째는 신적 일들의 진실성에 대한 마음의 편견들을 제거하여, 제시된 논리의 힘에 정신이 열리게 함으로써다. 둘째는, 단지 이성의 장애물들이 제거될 뿐 아니라 이성을 도와 사변적 인식을 더 활발히 히게 함으로써다.
에드워즈는 환상를 보거나 음성을 듣는 것과 같은 신비적 체험에 대해서는 부정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상상력에 가해진 비상한 인상들”을 체험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일들의 진실성에 대한 강한 확신을 종종 가진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대개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지고 복음을 거부하며 불신과 무신론으로 기울어진다. 그러므로 그것은 “망상”에 불과한 것이요, 아주 좋지 못한 것들이라고 에드워즈는 단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