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은혜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영구적인 경향성이다/에드워즈/맥클리먼드
특별 은혜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영구적인 경향성이다/에드워즈/맥클리먼드
조나단 에드워즈는 구원이 영원의 협의 가운데서 시작되고 결코 완성되지 않은 위대한 사역이라고 믿었다.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합 안에서의 끊임없는 성장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구원은 단순히 회심과 같은 것이 아니다. 구원은 한 개인 안에서 회심이 일어날 때에 처음으로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이 회심이 칭의를 알리고 성화를 시작한다. 칭의와 성화는 모두 신성화를 이루는데, 즉 하나님의 생명, 거룩함, 행복, 존재 자체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에드워즈는 구원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인간 본성을 완성시키고 성취하지만 또한 근본적인 방식으로 인간 본성을 초월한다고 주장했다. 구원은 자연 세계와 인간의 일반 경험에 있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현상이다. 이 세상의 것들과 하나님의 구속 행위들 사이에는 외적으로는 비슷한 점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다른 것들을 모형론적으로 가리키기 위해 계획하신 것이기 때문에 단지 유사성만 존재한다. 그래서 “특별한 또는 구원하는 은혜”가 없는 사람은 “성령에 속한 것들을 완전히 지각하고 인식하거나 분별할 수 없다.” 이런 사람은 종교적일 수도 있고 종교적인 것들에 대한 특수한 지식이 있을 수도 있지만 구원하는 은혜가 없다면 “그는 색맹 이상으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
에드워즈는 “성도들과 죄인들 모두에게 공통되는 성취, 즉 종교적인 혹은 도덕적인 성취를 가능하게 하는 성령의 행위나 영향력”에 대해 “일반 은혜”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죄를 깨닫고 설교에 감동 받을 수도 있다. “오직 자연적 원리의 도움으로만” 죄와 도덕적인 긴박성을 깨닫는다. 성령은 이런 결과가 생기도록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인”이 가진 것을 사용하신다. 어떤 초자연적인 능력도 필요 없다.
“그러나 특별 은혜는 본성상 이 능력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하도록 한다.” 특별 은혜는 영혼에 “초자연적인”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같은 새로운 것들을 주입한다. 그것은 사랑에 대한 덧없는 생각들이 아니라 “지속적인 수행 과정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영구적인 경향성이다. 그러므로 “구원하는 은혜”는 “정도에서뿐 아니라, 본성과 종류에 있어서” “일반 은혜” 또는 자연인에게서 발견되는 어떤 것과도 다르다. 자연인이 구원하는 은혜를 받을 때, 하나님은 이미 가진 것을 사용하지 않고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영을 나눠 주신다. 그것은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 새로운 창조다. “마음에 구원하는 은혜는 새 사람 또는 새 피조물, 옛 사람은 부패한 것이라 말한다.” 옛 사람이 하는 일은 심지어 선한 행위마저도 단지 “자녀가 아니라 사생아”다. “인간의 내부는 배설물과 추잡한 것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영적인 타락과 가증한 것이다.
일반 은혜는 성령의 감화와 조명을 나눠줄 수 있다. 하지만 “자체적인 교유한 본성 안에서” 성령을 전달하지는 않는다. 에스겔서에 나오는 살이 붙기 전의 마른 뼈와 같다. 일반 은혜를 특별 은혜 또는 구원하는 은혜와 구별하는 특징은 사랑이다. “이는 고전 13장의 시작 부분에서 명팩히 드러난다.” 이들은 “신앙 면에서 가장 위대하고, 아름답고, 빛나는 겉모습”을 지녔을지 모르지만, 실제 사랑이 없이는 모든 것이 “헛된 것”이다. 사랑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든 자신들의 부속물로서” 사랑할 뿐이다. 반면에 특별 은혜 또는 구원하는 은혜를 가진 자는 “다른 사람을 하나님께 속하거나 하나님 안에 있는 자로 또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과 관련된 자로” 사랑한다.
“귀신도 신앙적이고 외형적인 경배를 드린다. 귀신은 겸손한 자세로 기도한다. 그리스도 앞에 엎드린다. ‘제가 당신께 간청하오니 저를 고통스럽게 하지 마소서’라고 말한다. 귀신은 존경스럽고 영예롭고 경애하는 표현으로 ‘예수여 당신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도 말한다. 사랑 이외에는 아무 것도 부족하지 않다.”
에드워즈는 남편을 존경스럽게 대하지만, “남편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 아내에 대해 말했다. “어떤 나무 형상이 남편 앞에서 존경의 몸짓을 취하도록 고안되었다고 해서” 기뻐하지 않는 것처럼, 남편은 “아내의 겉으로 드러나는 존경에” 더 이상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이 없는 아내는 사랑이 없는 신앙과 같다. 실제를 서툴게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
마이클 맥클리먼드, 「한 권으로 읽는 조나단 에드워즈 신학」, PP 459-4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