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낙흥, '조나단 에드워즈 --', 12 기독교적 실천, 정서론 평가
12 기독교적 실천
에드워즈는 이 실천 부분에 책 전체의 거의 4분의 1에 가가운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은혜롭고 거룩한 정서는 기독교적 실천으로 표현되고 열매 맺는다.” 은혜의 속성은 거룩한 행동과 실천을 낳는 것이다. “참된 은혜는 비활동적이지 않다. 천하에 은혜보다 더 활동적인 것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명 자체, 가장 활동적인 종류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샘이 시내를 낳고 태양이 햇살을 발산하며 생명체가 숨을 쉬듯, “경건은 실천을 낳는다.”“기독교적 체험에 속하는 모든 은혜”는 거룩한 실천으로 연결된다.
기독교적 실천의 내용
1) 순종이다.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기 위해 그는 “가장 사랑하는 죄”, “선천적으로 자신이 가장 유혹을 잘 느끼는 죄도 버려야” 한다. 그의 언행은 진지하고 종교적이며, 독실하고 겸손하며, 온유하고 관용하며, 화평하고 존중하며, 친절하고 공손하며, 선의, 자비, 사랑이 가득해야 한다.
2) 신앙생활에 아주 열성적이어야 한다. “하나님께 대한 봉사”를 아주 진지하고 근면하게 수행해야 한다. 그는 “종교적인 일들”에 자신을 바쳐 그것을 자기 “생의 주된 과업”으로 삼아야 한다. 그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오직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야 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태만하고 해이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노골적 반역이다. 그러한 ‘악한 종’은 바깥 어두운 데 던져질 것이다.
3) 견인이다. 참 그리스도인은 “생의 마지막까지” 모든 시험과 시련을 뚫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한다. 비록 실족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신앙 생활을 계속적으로 싫어하거나 소홀히 하지는 않는다. “가장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리고 “가장 어려운 일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대한 순종을 중지하지는 않는다.
그에게 있어 기독교적 실천은 “거룩한 삶”과 동의어다. “그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6). 성경은 거룩한 행실을 은혜의 주된 증거로 가장 많이 언급하고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증거들 중 으뜸으로 간주한다.
교회원의 자격 요건
에드워즈는 기독교의 핵심을 고백하고 행하는 자가 참 신자이며 참 신자라야 교회의 정회원으로 인정되어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독교의 핵심은 이렇다. 죄를 회개하고 모든 죄를 버리며, 자신의 죄성과 비참과 (구원에 있어)무능, 자기 의의 불충분성, 그리고 완전히 멸망할 상태를 확실히 깨닫는 것, 자신이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를 받아 완전한 버림을 당해 마땅함을 느끼는 것, 복음의 진리를 믿는 것, 즉 우리의 온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우리의 유일한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 다시 말해 오직 전심으로 그리스도의 충족성과 완전한 탁월성만을 의지하는 것, 다른 어떤 것보다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는 것, 하나님을 자신의 완전하고 영원한 분깃으로 모시는 것, 그분을 위해 이 헛된 세상의 즐거움을 포함한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리는 것, 그분에게 자기 마음과 자기 전부를 드려 온전히, 그리고 영원히 그분의 것이 되는 것, 전생을 바쳐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 우리 왕이신 그리스도께 우리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 하나님의 모든 계명, 심지어 가장 어렵고 자기부인적인 계명에도 순종하는 것, 인류에 대한 선의 등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인정 받으려면 위에 언급한 신앙고백과 그것에 상응하는 “가시적인 성결한 삶”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말과 행실에서 그의 경건을 부정할 만한 것도 없지만 그것을 증명할 “커다란 적극적 증거”도 없는 사람을 그는 참 신자로 보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은혜 체험의 순서와 방식 진술의 가치
그 전의 청교도 신학자들은 교회 회원권 지망자들에게 그들의 특별한 회심 체험의 과정과 방식을 진술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한 영혼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기 위해 성령께서 그 마음에 역사하신 순서와 방식을 진술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라 믿었다. 그 체험의 결과, 즉 거룩한 삶이라는 열매가 더 결정적이라고 보았다. 그가 보기에 체험에 대한 간증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증거들을 무시하는 것은 비성경적이었다. “훨씬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증거란 기독교 진리에 대한 견실한 지식, 그리고 신앙고백에 상응하는 삶,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참 성도라는 “최선의 증거”라는 것이었다.
가시적 거룩의 구체적 내용
하나님에 대한 봉사의 삶,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생활, 마태복음 5~7장, 로마서 12장, 그리고 신약의 많은 다른 부분들에 나타난 규칙들의 상당한 부분에 준하는 삶, 그리스도의 명령과 복음의 규칙들 및 십계명의 첫 번째 돌 판에 나타난 의무들에 대한 순종,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사랑, 인간, 성도들, 적들에 대한 사랑, 온유와 용서, 자비와 자선, 자신의 일을 돌아볼 뿐 더러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아보는 것, 특정인들과 대중들의 영혼 및 육체에 선을 행하는 것, 절제와 육신을 죽이는 일, 겸손한 말씨, 혀를 재갈 먹여 그것을 사옹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 교회, 가정, 직장, 동네 등 모든 장소에서, 그리고 주일이든 주중이든 모든 때에, 모든 형편과 시험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행하는 것, 자기 부인,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신앙과 형제들의 유익을 위해 고난을 받는 것, 그리스도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버리는 것 등이었다. 이러한 것들에 비하면 다른 모든 체험들은 족히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실로 기독교적 행실은 체험의 진술보다 한 사람의 신앙고백의 진실성을 훨씬 더 잘 입증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아마 많은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에드워즈가 제시한 그러한 증거들이 회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성화에 관한 것이라 느낄 것이다.
성경적 근거
성경도 기독교적 행실을 은혜의 뚜렷하고 확실한 증거로 말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2:3)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 굳세게 하리로다”(요일3:18-19). “그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19-20)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하리라”이러한 성구들에 근거하여 에드워즈는 기독교적 행실이야말로 구원 얻는 믿음에 대한 모든 증거들 가운데 “으뜸”이며 “죄의 깨달음, 회심에 있어서의 조명들과 위로들의 방법이나, 명상에서 시작되고 끝나는 어떤 내재적 발견들이나 은혜의 작용들보다 훨씬 더 선호해야 할”것이라고 단언한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요14:21-24)
거룩한 행실은 또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사용될 커다란 증거라고 에드워즈는 강조한다. 그것은 마25:19-30의 양과 염소 비유, 계20:12, 고후5:10 등에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선한 의도의 한계
단순히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한다. “사람이 어떤 일을 자기 성향대로 행할 자유가 있을 때 그것에 마음이 있다는 으뜸가는 증거는 그것을 행하는 것이다” “지옥이 선한 의도로 포장되어 있다”고 꼬집는 청교도들의 전통을 따른다. 경건이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라 그것을 행하는 것이다.
신앙고백의 진실성에 대한 시험 방법
시련에 의해 고백의 진실성을 시험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예를 든다. 사람들은 금 색깔과 모양을 가진 광석을 용광로에 집어넣음으로써 과연 그것이 금인지 아닌지를 시험한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어려운 의무들, 즉 시험들은 신앙고백자들이 참 성도인지 아닌지 시험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신 것은 그들이 광야에서 만난 어려움들에 의해서였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했을 때 자신의 외아들을 바치는 어려운 명령이었다. 이처럼 어려운 명령에 의해 신앙의 진실성을 시험하는 것은 예수께서도 사용하신 방법이었다고 한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그런 다음에 와서 나를 따르라고 부자 청년에게 시험했다. 여러 종류의 땅에 떨어진 씨들이 처음 싹이 날 때는 다 비슷해 보이나 타는 태양의 열기에 의해 차이가 드러나게 된다고 예수는 교훈하셨다. 결론적으로 에드워즈는 기독교적 행실이야말로 어떤 신앙고백자가 참 은혜받은 사람임을 나타내는 “가장 고유한 증거”이며 은혜의 모든 표징들 중 “으뜸”이며, “표지들 중 표지”이며 “증거들 중 증거”로서 모든 다른 표지들을 인치고 관 씌우는 것이다. 행위 구원이 아니라 구원받은 증거로서의 행위이다. 체험이 행위에 영향을 미칠 때 그 체험이야말로 영적이고 신적인 것이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한다.
반론에 대한 답변
1) 행실의 의미에 대한 에드워즈의 강조는 참된 은혜의 주된 증거가 영적 체험이라는 많은 선한 사람들의 관념에 반대된다는 것이다.
체험과 실천과의 관계에서 두 극단의 오류를 지적한다. 하나는 내적 체험 없는 외면적 종교적 실천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아무 의미도 없다. 다른 하나는 실천이 없는 소위 “체험”이다. 기독교적 행실을 수반하지도 않고 그것이 뒤따르지도 않는 이러한 체험은 “없느니 보다 못한” 것이라고 혹평한다. 체험의 신빙성에 대해 회의적이 된 이유는 목회 경험이 많아질수록 가짜 체험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입만 살아 있는 신앙에 대해 냉소적이다. “우리 입술이 생기 있고 활발함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봉사에서 활발함으로” 생기 있는 신앙을 입증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사람들은 우리 종교가 진실임을 확신하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의 빛이 사람들 앞에 비취어 그들이 그 선행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라고 에드워즈는 전망했다.
2) 기독교적 실천이 은혜의 주된 증거라는 주장은 “율법적” 주장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에드워즈는 기독교적 행위가 하나님의 은총을 사기 위한 대가로 지불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은총의 표지요 열매라고 대답한다. “값없는 은혜와 거룩한 행실의 필요성은 성경에서 수시로 상호 결합되어 있으며 서로 모순 되지 않는다. 행실을 통해 나타난 믿음의 결과가 그것의 주된 표지들이라 말한다 해서 믿음의 영예와 중요성이 감소되지 않는 것은, 행동과 동작이 생명의 주된 표지들로 간주된다고 해서 생명의 중요성이 감소되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제 5 장 에드워즈의 종교적 정서론 평가
1 에드워즈는 기독교의 진리들을 마음으로 혹은 영으로 이해하고 감지한 체험을 가진 신학자라는 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자신의 남달리 깊은 종교적 체험을 놀라우리만치 정밀한 언어로 형상화하여 후대에 남겨 주었다는 점에서 그의 위대성이 있다. 그는 “하나님의 거룩의 아름다움”을 인지하는 일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사실상 그것이 기독교의 핵심이요 본질이라 보았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도덕적 탁월성의 달콤함과 사랑스러움에 대한 감각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2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해주는 표준을 너무 높인다는 비판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여러 면에서 표준을 낮추고 타협하는 것이 일반화된 현대 교회에서 그는 비현실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엘리트주의를 추구한다는 비난을 받을 위험성이 있다. 단지 현대 교회에서만 아니라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의 신앙을 가진 집단으로 보이는 청교도 교회에서도 그의 기준은 너무 높은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에드워즈의 그처럼 높은 기준은 결국 노샘프턴 교회 다수 교인들과의 갈등으로 이어지고 그의 목사직 해임으로 마무리되었다. 그 사건은 바로 그가 「종교적 정서」에서 주장했던 표준들을 실제 자기 교회의 교회 회원 자격 결정 기준으로 제안함으로 촉발되었다. 그는 철저한 칼빈주의자로서 제세례파의 완전주의에 빠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의 진실한 신앙과 순수한 교회에 대한 청교도적 집착이 이러한 교과서적 기준을 만들게 하였고, 부패한 본성과 연약한 신앙을 가진 현세 교회의 신자들에게는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3 우리는 청교도적인 높은 표준에 감사하고 그 표준에 이르도록 우리 자신을 채찍질할지언정 성경적인 표준자체를 나무랄 일은 아니라고 본다. 현재 한국교회에서 부흥 혹은 성령의 활동이라고 하는 것들의 80%이상이 에드워즈의 표준에서 보면 가짜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 각성해야 할 일이다. 청교도 신앙을 본받고 참된 부흥에 대한 갈망을 새롭게 할 때이다.
4 칼빈은 신자라 할지라도 대부분의 경우 그들이 영적으로 아주 연약하며 영적 진보가 더디다는 사실에 대해 깊은 이해와 관용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또한 현실로 받아들였다. 칼빈은 에드워즈보다 더 목회적이요 온건주의적이었다. 에드워즈는 참신자는 그의 경건을 증명할 만한 “커다란 적극적 증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에드워즈는 어떤 사람 안에서 육적인 요소가 강하게 잔존하는 것, 즉 옛 사람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는 것을 아직 회심되지 않은 탓이라 보는 경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