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로이드 존스, '빌립보서 강해', 2부 5장 하나님의 의 (김영희)

강대식 2020. 2. 5. 20:45

5 장 하나님의 의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3:9)

 

- 본문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이유를 한 가지 더 밝히고 있다. 다른 모든 것은 감히 비교할 생각도 들지 않을 만큼 이 이유는 바울에게 가슴 벅찬 것이었다. 본문에서 말하는 것은 의 문제와 관련된 지식이다.

 

. “가 무엇인가?

- 이것은 사도에게 늘 문젯거리였다고 할 수 있다. 의는 우리가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설 수 있느냐 하는 질문과 관련되어 있다.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9:2) 이것이 문제이다. 사도는 복음에서 그 대답을 발견했다. 그랬기 때문에 다른 것들이 전부 하찮아 보인 것이며, 자랑하던 모든 것들이 쓰레기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 위대한 대답을 찾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것들은 전부 였다.

 

의는 바울의 중심교리로서, 자신의 서신 거의 모든 곳에서 이 교리를 설명하고 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었으니”(고전1:30),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갈라디아서 3, 로마서 3장에서도 같은 교리를 설명한다. 사실상 의는 사도의 교리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라고 할 수 있다. 의에 대한 가르침을 분명히 모르면 그의 어떤 가르침도 이해할 수 없다. 의의 교리로부터 그가 가르치는 다른 교리가 나온다.

나아가, 교회 역사상 우리 주와 구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이 교리만큼 중대한 결과를 불러온 교리는 없을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존 웨슬리 등, 그들의 삶이 영적으로 뒤집혀 버린 결과를 가져왔다.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이 교리야말로 이제껏 들은 어떤 말보다 놀랍고 경이롭고 가슴 벅찬 말이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 “의 정의 중 가장 좋은 정의는 의는 정의와 의를 공히 가리킨다”. 즉 의는 법대로 하는 것이다. 첫째, 법에 정해진 대로 재판하고 판결하는 것이다. 둘째, 법이 명하는 바에 순종하는 것이다. 로마서 3장에서 바울은 이 두 가지 의미로 라는 단어를 쓴다.

 

1. 법을 집행한다는 의미의 의(3:25-26)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여기에서 의는 정의를 가르킨다.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라는 말은 하나님이 정의로우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정의롭게 죄를 사하실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2. 법이 명하는 바에 순종하는 의미의 의(3:20-22)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우리의 의는 법에 순종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의는 법대로 판결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법을 정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실 때도 자신의 의, 또는 정의를 나타내신다. 하나님의 입장과 우리의 입장에 따라 의의 의미가 두 가지로 나뉜다.

 

.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한 법의 요구를 온전히 만족시킬 수 있는가?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하나님이 정하신 법의 통치를 받는다. 우리는 모두 그 법 아래 살고 있다. 좋든 싫든 이것이 현실이다. 바울은 3장 마지막 분석에서 그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다고 말한다.

 

1. 자신이 예전에 따랐던 유대인의 방식대로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아주 익숙한 방법이다. 유대인의 법 아래에서 의를 추구했던 과거의 바울이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현대인이나 다를 바가 없다. 오늘날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 보라. 거의 대부분 무언가를 하거나 무언가를 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라고, 즉 인간적인 노력의 차원에서 대답한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버린 유대인들의 옛 방식을 현대적으로 표현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옛 방식의 특징은 이중적이다. 과거의 바울은 자신과 자신의 노력을 의지하여 스스로 의로워지고자 노력한 것이다. 그는 율법, 특히 의식과 관련된 율법을 부지런히 지켰다. 자기 힘으로 노력한 것이다.

 

의식과 관련된 율법의 명령을 따름으로 외적인 의를 얻으려 했다는 것이다. 바울은 6절에서 율법의 의로는 자신이 아무런 흠도 없었다고 말한다. 이것이 그의 자랑거리였다. 과거 그는 율법에 자신을 비추어 볼 때 아무런 흠이 없고 하나님 앞에 능히 설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의식과 관련된 명령만 외적으로 흠 없이 지킨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외적이고 표면적이며 기계적인 명령, 의식에 관련된 명령을 곧 하나님의 법으로 착각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자기가 이해하고 해석한 법으로 대체해 놓고 자신의 그 부족한 해석을 준수했음을 깨달은 것이다. 자신이 그토록 자랑하던 의는 자기 의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것은 바리새인의 전적인 문제이기도 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아주 흔한 태도이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10:2-3)

 

바울은 일정한 명령들과 하나님의 법을 기계적이고 표면적으로 일치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알았다. 하나님의 법은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라는 것이었다. 그는 로마서 7:7-9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바가 전적인(온 존재와 마음을 다하는) 충성임을 깨달았을 때, 자신은 무거운 정죄감에 짓눌려 죽었다고 고백한다.

또한 그는 율법이 죄에 대해 심판을 선고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율법은 먼저 적극적인 계명을 주고 그것들을 지키도록 요구하고, 그것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심판을 선고한다. 바울은 자신이 이 두 가지 측면에서 다 실패했음을 분명히 알았다.

 

2. 복음의 진정한 메시지가 전하는 의의 특징은 이것이다.

첫 번째 특징, 이 의는 하나님의 의이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를 요구하시고 청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거저 주신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렇게 타락하고 무력한 인간, 죄에 빠진 인간에게 거저 의를 주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감격에 겨워 어쩔 줄 모르는 것이다.

 

복음은 단번에 율법의 요구를 채울 수 있는 방법, 하나님이 그 정의를 훼손시키시지 않고서도 우리를 용납하실 수 있는 방법을 보여준다. 율법은 자기에게 순종하고 자기를 존중하며 살 것을 요구한다. 동시에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을 고발한다. “율법의 정의에는 이 두 가지가 다 포함되어 있다. 내 죄 값을 면하려면, 내가 율법을 지키고 존중할 수 있으려면, 적극적으로 율법에 동의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속에 생겨나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복음은 이 이중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일을 해 주시는지 알려 준다. 이 의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므로 내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이다.

 

두 번째 특징, 하나님이 이 의를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다는 것이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일을 믿음으로써 나는 의로워진다.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방법이요 의를 주시는 방법이다. 율법은 죄에 대해 죽음을 선고한다. 나는 죄 값을 치러야 한다. 또한 율법은 나를 지키고 존중하는가?”라고 묻는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이 문제를 어떻게 도와주시는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인간이 되어 세상에 태어나셨다. 그는 이 땅에서 율법 아래 사는 내내 하나님의 법에 온전히, 절대적으로 순종하셨다. 완벽하고 온전한 의, 적극적인 의를 이루셨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십자가에 달리셨다. 율법의 요구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율법은 그를 고소할 수 없었고 어떤 흠도 찾아낼 수 없었다.

하나님은 나무에 달린 그의 육신 안에서 우리 죄를 벌하셨고, 우리 죄의 책임을 그에게 지우셨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에게 죄 값을 물리심으로써, 죄 값에 대한 율법의 요구가 채워졌고 의를 행하라는 적극적인 요구도 채워졌다. 그런데 복음의 놀라운 메시지는 바로 그 의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하나님이 죄인을 돌아보시면서 , 온전한 의가 여기 있다. 네 모습은 예전 그대로지만 그럼에도 너에게 이 의를 주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제안이다. 바울은 이것을 알았다.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예전 모습 그대로인데도 그 의를 받아 누리게 된 것이다. 바로 이것이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의이다.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믿음으로라는 것은 우리 믿음의 일부라도 의에 기여한다는 뜻이 아니다. 의는 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으로서, 율법을 만족시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 의는 그리스도 안에만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이다. 믿음은 단지 의를 받게 하는 장치의 역할을 할 뿐이다. 그 의를 받는 방법이 바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나는 그를 믿음으로 그의 일부가 되어 그의 의를 받아 누리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이 율법을 어긴 죄 값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 순종의 상까지 받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무죄한 자로 여기실 뿐 아니라 율법을 온전히 지킨 자로 여겨 주신다. 나는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다.

자기 힘으로 무언가를 하려 드는 것은 의의 교리를 부인하는 행동이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주시는 의이다. 그러므로 죽음의 자리에 이르렀을 때 유일한 여러분의 소망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이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그를 믿는 것뿐이다. 그리스도의 의로 옷을 입고 죄의 가리움을 받아야 한다. 복음은 이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율법을 지키신 분은 그리스도지만, 그 상은 내가 받을 것이다.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의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가 가장 고상한 것은 바로 이 의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