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니, '조나단 에드워즈의 참된 기독교', 1장 오늘날의 명목상 기독교
스위니, “조나단 에드워즈의 참된 기독교”
1장 오늘날의 명목상 기독교
명목상 기독교를 알아채거나 발견하기란 매우 어렵다. 전염병과 같이 거기에 있는 것은 분명한데 정확히 어디 있는지 집어내기는 매우 힘들다. 그럼에도 두 가지는 분명하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의 성숙 수준은 상당히 낮다. 그리고 많은 교회들이 성도들에게 기독교의 본질적인 기초를 가르치는 데 실패하고 있다.
린지와 갤럽에 따르면 중생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 33퍼센트가 낙태 찬성의 입장을 고수하고,
* 26퍼센트가 점성술을 믿고,
* 20퍼센트가 환생을 믿는다.
이 가운데 많은 이들이 소위 성경적 교리를 가르친다는 복음적인 교회에 출석할 공산이 크다. 하지만 이들은 신앙과 도덕에 있어서 성경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견해를 믿고 있다. 이들이 믿는 신앙이 참된 기독교와 충돌한다면 이들의 신앙생활도 참된 기독교와 충돌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조지 바나는 ‘오늘날의 목회자’에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성경 읽기와 성경 지식에 대한 참담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첫째, 한 주일에 성경을 한 번이라도 읽는 사람은 그리스도인 열 명 가운데 네 명에 불과했다. 둘째, 성경을 읽는 그리스도인도 다음과 같은 양상을 드러낸다.
“성경을 읽는 그리스도인도 한 주 통틀어 성경을 읽는 데 대략 한 시간 정도 투자한다. 아마도 씻고, 출퇴근하고, 텔레비전을 보고, 신문을 읽고, 밥을 먹거나 통화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할 것이다. 이로 보건대, 성경은 대부분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결코 우선순위에 있지 아니하다.”
이 통계는 우리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매주 하나님의 말씀을 펼쳐 보는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조차 샤워하는 시간보다 더 적은 시간 동안만 성경을 읽는다. 복음주의 비평가인 데이비드 웰즈는 복음주의자의 52퍼센트가 “원죄 개념을 대놓고 거부한”다는 바나의 여론조사 결과를 언급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 과반수가 인간에 대한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전적으로 부인한다는 것이다. 웰스는 자신을 복음주의자라고 고백하는 사람들 가운데 32퍼센트만이 절대적인 진리나 절대적인 도덕을 믿는다는 통계 결과를 지적했다.
1999년에 바나 조사 그룹은 보수적인 복음주의 신자의 이혼율이 불신자의 이혼율보다 명백히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초교파 개신교인의 이혼율 34퍼센트
* 주요 교파 개신교인의 이혼율 25퍼센트
* 무신론자/불가지론자의 이혼율 21퍼센트
이혼에 있어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다른 입장을 취하는 대신, 믿지 않는 이웃과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문화의 조류와 싸우거나 거슬러 가기는 커녕, 세상 문화에 완전히 휩쓸려 가고 있다.
보수적인 개신교를 믿는 부모를 둔 수 백명의 십대들과 인터뷰하고 조사한 사람들은 오늘날 “교회 아이들”이 믿지 않는 세상의 아이들과 똑같이 말하고 행동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사회학자 스미스는 일반적으로 미국의 십대들은 선행을 강조하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강조하고, 관대하고, 벌을 내리지 않고, 두루 쓸모 있는 하나님을 믿는 것을 강조하는 상대주의적이고 혼합된 신앙, 스미스 자신이 ‘도덕적인 심리치료 이신론’을 믿고 실천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오늘날 개신교 교회를 다니는 대부분의 십대들은 신앙고백의 차원에서는 이미 개신교 복음의 핵심을 사실상 버렸다. 열다섯 살 백인 소년은 복음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만일 올바른 일을 하고 나쁜 일은 하지 않는다면, 안 좋은 일은 전혀 없을 거예요. 당신은 천국에 갈 거니까 걱정 마세요. 혹시 천국에 가지 못한다면 기독교에 완전히 속은 거죠.(이 소년은 웃었다.) 복음이 대충 뭐 그런 거죠.’”
“십대 그리스도인들은 곧잘, 자신의 신앙이 가족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거나, 이성 교제를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지와 관련이 있다거나, 학교 생활이나 일상적인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것은 신앙이 자기 삶에 있어서 중요하고 영향력이 크다고 분명하게 밝힌 십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현 상황의 배후 핵심 요인들을 파악하기 위해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로 또는 ‘빛의 시대’로 두 세기 정도 되돌아가 보아야 한다. 계몽주의 시대 수많은 핵심 사상가들이 신앙에 ‘미신’이란 딱지를 붙이고 인간 이성에 가장 높은 지위를 부여하면서, 국가 교회와 교회의 교리들에 반대했다. 그들은 성경의 권위와 진정성에 의문을 제기했고 성경에서 자신들이 이성의 잣대에 비추어 거짓과 미신으로 생각되는 모든 것을 제거해 버리려고 노력했다. 이런 사고가 전체 사회에 들어가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지만, 한때 기독교로 특징지어졌던 유럽은 19, 20세기에 급속히 세속화되어 갔다. 불신앙적 사고는 교회와 신학교까지 퍼져 나갔고 전통적인 교회 안에 있던 많은 이들이 정통적인 믿음을 버리게 되었다.
20세기 중반 이후 이들은 세속적인 ‘포스트모던’ 정신을 수용하여, 어떤 ‘교리’든 상관없이, 모든 ‘교리’를 회피하고 신비를 받아들였다. 절대적인 진리를 강조하는 대신에 공동체를 위한 진리, 공동체가 결정하는 진리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이런 포스트모더니즘을 채택한 그리스도인들이 보수 진보 상관없이 교리를 경시하고 개인적인 체험과 신비를 강조하는 새로운 종류의 교회를 세우고 있다. 교회 지성의 약화와 영향력 있는 신학교의 자유주의 신학의 수용은 많은 보수적인 기독교 지도자들로 하여금 교회의 활력과 성장을 위한 열쇠를 번창하는 세상 기업에서 찾도록 몰아가고 있다. 성경 중심적인 설교를 들을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성경적 세계관과 단절되었다. 많은 ‘주류 교단’ 교회들이 자유주의를 받아들임으로써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의 중요성을 경시하거나 심지어 버려 버렸다.
많은 복음주의 교회들이 성경적으로 풍성하고 부요한 그리고 신학적으로 올바른 원리와 방법론에서 실용주의가 주도하는 원리와 시각과 방법론으로 이행했다. 실용주의가 교회의 성장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도 개개인의 신앙에 대한 관심보다 숫자에 대한 관심이 클 때, 명목상 기독교가 교회에 침투해 자리 잡기가 쉬워진다. 교회가 사람들을 데려오는 데 지나친 관심을 가지면 사람들을 목양하는 것을 놓쳐 버릴 수 있다. 미지근한 신앙, 전혀 기독교가 아닌 명목상 기독교도 쉽게 용납된다.
오스 기니스, “‘이것은 효과가 있느냐’에 대한 관심이 ‘이것이 참이냐’에 대한 관심을 앞지른 지 이미 오래다. 신학이 기술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인격은 기술 앞에 무색해졌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자아를 섬기는 것으로 교묘하게 변질되었다. 실용주의는 기껏해야 방법과 조직에 있어서는 풍성하지만 신앙과 교리에 있어서는 빈약하고 피상적인 복음 전도를 낳을 뿐이다. 우리는 미국 역사상 가장 세속적인 그리스도인들이다.”
이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다. 기니스가 밝힌 대로 현대의 소비지상주의를 받아들여 교회 회원들은 자신들을 소비자로, 교회는 자신을 서비스 제공 업체로 여기고 있다. 오늘날 많은 목사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먹이려고 선지자적이고, 성경에 충실하고, 하나님 중심적인 설교를 더 이상 하지 않는다. 대신 사람들의 실용적인 필요와 심리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간단하고 가벼운 설교를 한다.
데이비드 웰스는 자신의 책에서 오늘날 교회는 시대정신과 현대 문화, 즉 지적으로 파편화되고, 시장 중심적이고, 유행 의존적이고, 개성 중심적이고, 도덕적으로 상대주의적인 현대 정신을 그대로 흡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용광로의 특징인 긴밀한 유대가 사라진 관계, 짧고 빨리 지나치는 관계를 만들어 낼 뿐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사회는 칵테일 파티다. 해가 뜰 때 생겨나고 달이 뜨기 전에 사라지는 짧은 만남의 장소다. 이런 사회는 현대적인 자아가 매우 수척하고 병약하고 산란한 정신 상태로 자라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광고가 군림하고 윤리와 신앙이 전능한 시장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 소비지상주의 세상에서 우리는 ‘수척’한 자아를 가진 공허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도 깊게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우리는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의미 있게 행동하지 못하고, 오래 집중하지 못한다.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 초점을 맞춘 현대인들은 자존감 향상 훈련을 통해 자아를 드높이고, 죄를 이런저런 치료가 필요한 ‘기질’로 정의 내린 채,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욕구에 재갈을 물리는 성숙의 전통적인 지표를 버려 버렸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커지고 확대되고 견고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소되었다. 하나님도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축소된 것 같다.
실용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자신의 거룩함을 드러낼 목적으로 창조하신 교회가. 많은 경우 세상 문화에 순응하여, 세상의 방법론 세상의 관심사 그리고 심지어 세상의 이데올로기를 채택해 버렸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세상과 다르게 살지 않고, 다르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히 많은 이들이 명목상의 신자, 즉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적인 설교와 복음에 대한 열정이 건강한 교회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에드워즈 자신의 생애가 보여 준다. 그리고 우리는 에드워즈 시대보다 더 많은 도전에 직면해 있다. 갈수록 문화가 기독교 신앙과 세계관에서 더 이탈할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학교, 대중매체 그리고 엔터테인먼트는 지적, 영적 그리고 도덕적 전선에서 기독교 신앙을 직간접으로 공격하고 있다. 실용주의는 어마어마한 성장과 막대한 예산을 굳게 약속하며 우리를 유혹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적 진리와 절대적 도덕을 이제 그만 내려놓으라고 제안한다. 사방에서 자신은 존중하고 하나님은 작게 만들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라고, 이것이 죄의 본질이고 가장 큰 죄악임에도 불구하고, 촉구한다.
이스라엘 역사와 교회의 과거 역사가 가르쳐 주는 대로,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은 쉬운 길이 아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영적, 신학적 거인조차, 더군다나 성경적 기독교에 훨씬 더 우호적인 시대와 환경 속에서도, 명목상 기독교를 물리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고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회적 차원에서 복음적 자기점검이 필요하다. 명목상 기독교라는 문제를 다룰 때는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과 자기 점검이 꼭 필요하다. 모든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냉철하고 진지하게 그리고 주권적인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명목상 기독교를 다루어야 한다. 교회 회원 명부를 도피처로 삼지 말아야 한다. 급속히 성장하는 교단의 경우 더욱 그렇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교회 명부에 있는 수많은 사람 가운데 절반은, 살아 있는 믿음은 고사하고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적도 없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교회에 등록했고 교회에 꾸준히 참석하기 때문에 참석자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가정해 버려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이 배경 음악이 흘러나오는 결단의 시간에 손을 들었다고 해서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인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의 환영 인사에 미소를 짓고, 교회에 후한 헌금을 내고, 여러 프로그램에 등록한다고 해서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인 것은 아니다.
아무리 건강한 교회. 회중이라고 할지라도, 그 교회에 출석한다는 사실 자체, 드리는 예배 자체, 암송하는 신앙고백 자체가 그 사람의 회심을 보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앞선 자료 가운데 가장 두려운 것 가운데 하나는, 건전한 교회에서 자란 우리 자녀들의 서글픈 신앙 상태다. 성경은 부모의 교육과 훈련이 자녀들의 영적인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잠22:6). 자녀들은 단순하고 평범한 상황과 일상의 흐름 속에서 자기 부모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볼 때, 참된 신앙에 대해 가장 잘 배운다고 성경은 가르쳐 준다(신6:7). 건전한 가르침을 동반한 참된 증인으로서의 삶은 큰 능력이 있다. 오늘날에는 자기 삶으로 믿음을 보여 줄 경건한 부모가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