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니, '에드워즈의 참된 기독교', 2장 에드워즈 당시의 명목상 기독교
2장 에드워즈 당시의 명목상 기독교
“여러분이 하나님의 집에서 높이 평가하고 기뻐하게 될 주된 것은 하나님의 집의 외적인 장식이나 높은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규례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데 여러분의 시간을 쏟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아버지 집에 자신을 위한 자리를 준비하십시오”
에드워즈는 교회를 입신출세나 사회적 지위를 쌓는 수단으로 삼지 말고,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라고 촉구했다. 이름 뿐인 신앙을 갖고 있는 자칭 그리스도인은 종교의 외형을 추구하고 교회가 자신을 섬겨 주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가 자신들을 위해 해 주는 것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통해 이루시는 것에서 기쁨을 발견한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자신의 생애에서 상당한 기간 명목상 기독교와 싸워야만 했다.
국가 교회라는 사실 자체, 탁월하게 경건한 목회자가 교회를 목양한다는 사실 자체 그리고 그 교회 회원이라는 것 자체가 저절로 하나님을 알게 만들거나, 하나님을 믿을 것이라고 보증해 줄 수 없다. 흔히 있는 일이지만, 많은 이들이 자기 자신을 너무 중요하게 여기는 데 정신이 팔려 구원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소홀히 한다.
에드워즈는 야고보서 2:19을 기초로 1752년에 “귀신들이 경험한 것과는 다른 은혜”라는 설교에서 귀신들조차 영적인 것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고 영적인 실재에서 비롯되는 감정들을 경험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이와 같이 사탄에게 속한 귀신들이 성경 지식과 몇 가지 종교적 감정을 갖고 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닌 것처럼, 어떤 사람이 성경 지식이 있고 신앙과 관련된 정서를 경험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의 회심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해 이론적인 지식이 아무리 많다고 할지라도, 이론적인 지식은 구원 얻는 은혜를 소유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표가 결고 아니다. 사탄은 타락하기 전에, 하늘의 밝고 영광스러운 천사들 가운데 하나였다. 불꽃과 계명성으로 묘사되던 존재였고 힘과 지혜에 있어서 탁월한 존재였다. 그리고 사탄은 타락한 지금 죄악된 존재가 되었으나, 타락으로 말미암아 사탄에게 있던 천사로서의 본성적 기능들이 파괴되어 버린 것은 아니다. 이것은 사람이 타락할 때, 사람으로서의 본성적 기능이 상실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에드워즈는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다음의 탁월한 표현으로 자신의 주장을 요약했다. “사탄은 신학에 있어서 정통적이다. 사탄은 참된 교리의 체계를 믿는다. 사탄은 이신론자도, 소시니안주의자도, 아리안주의자도, 펠라기우스주의자도, 반율법주의자도 아니다. 사탄의 신앙 조항은 모두 건전하고, 철저하고 흔들림이 없다.” 사탄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수많은 신학적 핵심 개념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구원 얻는 믿음은 갖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성경 본문과 본문의 가르침으로 보건대, 기독교 신앙에 대해 이론적인 지식이 아무리 많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참된 경건을 소유하고 있다는 확실한 표는 결코 아니라는 것이 명백하다. 죄인이 칭의되는 방법과 회심의 본질과 그리스도의 구속을 적용하는 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가장 분명하고 정확하게 말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교회를 계몽하여 세우고, 진리를 부인하는 자들의 잘못을 깨우치고, 세상에 널리 빛을 비춘다고 할지라도, 통상적인 참된 성도 수백 명과 최고의 신학자들이 갖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이 모든 것은 그 사람 속에 얼마가 되었든지 구원 얻는 은혜가 있다는 확실한 표는 결코 아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열렬한 갈망이 있다. 이것은 아주 흔히 경건의 표지로 오해되곤 한다. 그래서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네가 의에 굶주리고 목마르며,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열렬히 갈망하고, 천국을 열망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사실 이 모든 것은 자기 사랑에서 비롯된 구원에 대한 갈망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것은 귀신들의 간절한 소원과 다르지 않는 원리에서 말미암은 갈망에 불과하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심판을 정말 무서워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의 존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 그리고 하나님은 죄를 반드시 그리고 기꺼이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 자체가 죄인을 의롭게 하거나 구원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이것은 귀신들에게도 있는 확신이다. 귀신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알고 자신들의 비참함에서 해방되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해도 귀신들은 회심하지 않는다. 이것은 자신의 죄악된 삶을 어떤 이유로든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수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더 나아가 어떤 사람이 기독교의 신앙에 속한 것들에 막연한 기쁨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그 사람의 회심을 반드시 증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에드워즈는 중생하지 못한 죄인도 기독교 속에서 기쁨을 발견하고 종교적인 이유로 행복해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근본 원인이 그리스도가 특별히 당신을 위해 죽으셨고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식의 직접적인 음성이나 어떤 다른 증거 때문이라면, 하나님에 대한 여러분의 사랑은 자기 사랑의 원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귀신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원리도 바로 자기 사랑의 원리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되는 존재를, 그리고 자신을 중요시하는 존재를 사랑하는 데는 은혜가 필요 없다. 자기 사랑으로도 충분하다. 눅6: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에드워즈는 일반 은총의 영향 아래, 자기 사랑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도, 하나님에 대한 구원에 이르는 지식과 믿음 없이도 기독교 교리와 경험을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도 기독교의 진리를 피상적으로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다. 감동을 받고 외적인 행실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심지어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에 대한 지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해 자기 사랑의 원리에 따라 감사하며 살아감으로 어느 정도 행복하고 소망적인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지식을 개인적으로 자기 영혼에 적용하여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전심으로 믿지 않는다면 성경적인 교리 자체가 우리를 죄와 심판에서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에드워즈는 명목상의 기독교가 퍼지는 것을 근본적으로 방지할 수 있는 것이 없다(하나님 중심적인 교회, 매우 경건한 목회자의 목양, 심지어 성경적인 부흥조차도)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대개의 경우 매우 쓰라린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이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교회에 출석하고 종교적인 의무를 행하면서 이것들이 용서와 구원을 얻어다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명목상 그리스도인들은 참된 기독교를 대면해서 기독교의 경건과 성경적인 진리로부터 약간의 감미로움은 맛보지만, 이것은 수박 겉핥기에 불과하다. 그래서 명목상 그리스도인들은 심판을 두려워하지만 자신의 죄를 회개할 정도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알거나 죄를 깨닫지는 못한다. 그리스도를 영접할 만큼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에 사로잡히지는 않는다. 심지어 일련의 성경 교리의 타당성을 설명할 수 있을만큼 성경적인 교리를 이해하면서도, 자신이 설명할 수 있는 성경의 진리로 말미암아 자기 영혼이 변화되지는 않는다. 마음을 꿰뚫어야 할 성경의 진리가 양심을 가볍게 스치고 지나감으로써 영혼을 관통하지 않고 표면만 스치고 지나간다.
에드워즈 시대에서 오늘날로 오면 상황은 더욱 심각하고 명목상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노골적으로 행동한다. 명목상 그리스도인들은 일종의 영화 펑론가와 같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펼쳐지는 흥미진진한 기독교 이야기를 보면서, 이야기의 구성을 이해하고, 무시무시한 장면에 깜짝 놀라고, 선한 사람들이 이길 때 행복해 한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않는다. 자기가 좋아하는 장면은 정지시켜서 보고, 좋아하지 않는 부분은 앞으로 빨리 감으면서, 자신이 선호하는 장면은 몇 번이고 반복해 돌려본다. 결국 자신이 좋아하는 장면, 반복해서 돌려본 장면을 통해 전체 이야기를 결정해 버린다. 그리고는 자신이 그 이야기를 끝내고 싶을 때, 영화를 꺼 버린다. 명목상 그리스도인은 기독교가 자신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것처럼, 기독교가 자신을 변화시키도록 허락하지 않고 기독교에 참여하지 않는다. 명목상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변화를 위해 주어진 것을, 그냥 스쳐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는 구경꾼에 불과하다.
에드워즈의 경험에서 위로를 받으라. 최고 경영자 마인드, 개인적인 매력 그리고 재치와 유머가 인생의 ‘성공’을 보장해 주지 않는 것처럼, 매우 깊은 경건, 탁월하고 무게 있는 설교 그리고 걸출한 지성이 교회가 영적으로 성숙하고 성장하는 것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우리는 잃어버린 자를 새롭게 하고 성경적인 열정을 불어넣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하지만 이런 노력이 긍정적인 반응까지 보장해 줄 수 없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성경을 신실하게 설교하고 올바르게 목양할지라도 에드워즈와 마찬가지로 명목상 그리스도인들을 직면하게 된다. 우리는 교회와 가정에서 거짓된 신앙을 분별 포착하고 진리를 증진하기 위해 진력해야 하지만, 이와 동시에 하나님이 자신의 신비한 섭리를 따라 우리의 수고를 참된 부흥으로 응답해 주실 수도 있고 다르게 응답해 주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에드워즈는 미지근한 기독교에 직면해서 교회 안의 많은 이들이 종교의 본질이 아니라 종교의 외양 또는 종교적 치장을 좋아하고 관심을 갖는 행태와 열심히 싸웠다. 에드워즈 당시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보다 회중석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느냐에 더 큰 자부심을 가졌다. 오늘날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우리 앞에 주어진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는 망각한 채, 좋은 상황과 환경을 만끽하고 동료 회원들의 관심을 받으며 자신이 만들어 낸 비전과 관심사에 모든 시간을 쏟아 부을 수 있다. 복음의 사명보다 자기 자신에게 더 초점을 맞춘 것, 이것이 바로 노샘프턴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오늘날에도 주의하지 않으면 똑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단순히 지식이나 감정 또는 인상에서 확신을 찾지 말라. 에드워즈의 설교가 분명하게 가르쳐 준 것처럼, 영적 지식 자체, 감정 또는 인상 자체에서 구원의 확신이나 참 신자된 증거를 찾을 수 없다. 심지어 마귀도 종교적 지식과 감정,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에서 오지 않은 유사한 것들을 가질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지식, 성경이 추천하는 감정 그리고 성경에 기초한 영적 인상과 견해를 발전시켜야 하고 발전시키도록 격려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친히 회심시키는 역사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