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히브리서 강해', 6장 우리를 위한 죽음 (김영희)
6 장 우리를 위한 죽음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2:8하-9)
-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왜 그렇게 낡은 복음에 대한 고찰을 듣는 건가?” 히브리서 첫 네 구절에 그 대답이 나온다. 그 부분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복음에서 떠내려가지 않고 복음을 등한하지 않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이 메시지의 권위와 원천(하나님 자신)에 있다. 성부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셨고 그를 통해 말씀하셨다. 아들을 통해 하신 일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입으로 세상에 알리셨다. 이보다 더 큰 권위는 없다. 복음은 하나님이 친히 이 어지러운 세상에 주신 메시지요, 연약함과 부끄러움과 무력함에 빠져 있는 각 개인에게 주신 메시지이다.
두 번째 이유는 세상은 심판을 받을 것이며, 우리는 영혼을 가지고 세상에서 한 일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성경이 시종일관 전하는 중대한 메시지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책임 있는 존재로 만드셨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아주 존엄하고 책임 있는 존재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자기 인생으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과 화목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 그를 거슬러 죄를 짓고 세상에서 인생을 남용한 무서운 결과를 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등한시한다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할 수 있겠는가?
세 번째 이유는 그 크기에 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시려는 목적, 즉 죄의 타락과 파멸에서 건져내 친히 예비하신 영광으로 이끄시려는 것보다 더 큰 목적은 생각할 수 없다. 복음은 장차 올 세상, 죄와 악이 완전히 추방될 세상에 대해 알려 준다. 의가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광의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이 그 세상에서 다스릴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에 참여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자 기독교의 구원이다. 구원은 하나님이 이 크고 신성한 목적의 창시자요 지휘관이요 주창자요 창안자로 세우신 성자 안에서, 성자를 통해 주시는 죄 사함이다.
-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10)
여기에서 말하는 모든 일이 일어나야 했던 것은 오직 이것만이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 일치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공평하심과 의로우심과 거룩하심을 올바로 나타내는 방법은 오직 이것뿐이다. 죄인들을 구원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올바로 나타내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의 죽음밖에 없다. 인간은 죄사함을 받아야 할 뿐 아니라 율법을 온전히 지켜야 한다. 인간에게는 사탄을 정복해 줄 분이 필요하고, 새로운 본성이 필요하다. 동정하고 이해하며 도와줄 대제사장이 필요하며, 마지막 때 하나님 앞에 데려가 줄 분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그 모든 필요를 그리스도 안에서 채워 주셨다. 하나님이 아들의 성육신과 고난과 십자가 죽음과 장사됨과 부활이라는 방법을 택하지 않으셨다면 그 필요는 채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 얼마나 완전한 구원이요 이 얼마나 완전한 구주신가! 하나님의 사랑을 올바로 나타내는 방법은 오직 이것뿐이다.
1. “이같이 큰 구원”에 치르신 비용의 측면에서 이 구원의 크기를 살펴보자.
우리는 가치가 아닌 가격으로 대상을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구원의 가격은 얼마나 되는가? 히브리서 2장이 다루는 주제이자, 이것은 히브리서 전체의 주제, 사실상 성경 전체의 주제라고도 할 수 있다.
아담과 하와가 짐승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는 것,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다른 점, 구약의 제사제도 등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전부 한 인물과 사건을 가리킴을 알게 된다. 구약성경은 한결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키고 있다.
또 신약성경이 주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실들에 상대적으로 그토록 많은 분량을 할애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사도행전을 읽어보라. 사도들이 설교할 때 강조한 바가 무엇인지 보라.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고 죽으셔야만 했다는 사실, 예수야말로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전면에 내세웠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예수의 죽음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성경은 의도적으로 십자가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십자가 죽음은 복음 전체가 걸린 핵심교리로서, 십자가 죽음을 떠나서는 복음의 주장을 이해할 수가 없다. 십자가 죽음은 성경의 큰 주제이자 찬송집의 큰 주제이다.
복음을 참으로 전하려면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죽음에 항상 중점을 두어야 한다. 우리가 일차적으로 유념해야 할 것은 기적적인 일이 아니라 우리가 “들은 것”, 곧 복음이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이 “들은 것”을 전해 준 자들은 일개 철학이나 행복의 비결을 가르치지 않았다. 복음의 사자로서 예수를 전했다. 이것이 그들이 이끌어 낸 추론이요 도출해 낸 교리였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죽음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겠다고 작정한 이유가 여기 있었다.
이 죽음에 주의하지 않는 자들, 이 죽음을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긴요한 중심 사건으로 보지 않는 자들은 사실상 “이같이 큰 구원”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구원을 위해 주님이 고통스럽게 치르신 비용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고백의 잣대는 십자가이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검증할 수 있는 시금석이 이것이다. 이제 다시 묻겠다. 그가 이런 큰 값을 치르셨는데도 십자가 죽음이 나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 비용의 크기를 보면 십자가가 왜 중심 사건인지 알 수 있다. 십자가를 긴요한 중심 사건으로 여기지 않는 자, 자기 신분 전체의 토대로 보지 않는 자는 사실상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다른 많은 주장들도 십자가에 기초하고 있다. 거룩하라는 신약성경의 중대한 호소도 어떤 의미에서 십자가에 기초하고 있다.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7-18)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대속을 위해 이처럼 엄청난 값을 치르신 것을 아는 자는 당연히 거룩해지려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주신 것은 단지 죄 사함만 위해서가 아니라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으로 구별하고자 자신을 주셨다고 말한다.(딛2:14)
성경이 자주 제공하는 큰 위로와 위안의 전적인 토대 또한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고난 당하고 견디신 일들에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대부분 삶에서 실패하는 것은 바로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한 탓이다.
2. 주님이 이 큰 구원을 위해 치르신 값과 비용은 무엇인가?
출발점으로 삼을 것은 그가 성육신하여 세상에 오신 일이다. 그는 하나님의 본체시요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시다. 그런 분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결국 십자가와 무덤으로 끝나게 될 여정을 시작하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바울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라는 말로 이에 대한 통찰을 제공해 준다.(빌2:6-7)
주님은 지고한 신의 권리를 가지고 계셨지만, 자신을 낮추어 땅으로 내려오셨고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 자신을 제한하여 인간 육신의 한계에 가둠으로써 고통과 필멸을 겪기로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죽으실 수 없다. 죽으시려면 인간이 되셔야 한다. 우리는 지금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살펴보고자 애쓰는 중이다. 그러나 신약 메시지의 핵심이 여기 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무력한 아기가 되어 구유에 누우셨다. 우리를 대속하고자 이렇게 하셨다. 성육신 한 가지만으로도 그가 치르신 비용은 정도를 넘어서며 우리 이해를 넘어선다.
아기로 오신 것도 모자라 더 자신을 낮추셨다. 육신의 부모와 그들의 가르침에 순종하셨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하나님이 평범한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살면서 먹고 살기에도 부족한 벌이를 위해 목수로서 육체노동을 하셨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할 수 있겠는가? 그는 지치고 피곤하다는 것, 육체의 연약함을 경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셨다. 온 세상과 우주의 주인께서 이런 한계 안에 스스로 갇히셨다.
또 시험도 받으셨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2:18)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을 시험하지 않으시며 스스로 시험받지도 않으신다고 말한다.(약1:13) 하나님의 영원하신 이들이요 모든 천사 위에 계신 하나님이 사탄의 시험을 받는 비용을 치르신 것이다. 우리의 신실하신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해, 우리를 대속하시고 장차 올 영광을 예비해 주시기 위해 이 모든 시험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히브리서 기자는 죄인들이 그에게 “거역한 일”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히12:3)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무슨 일을 당하셨는지 보라. 주님을 비웃고 조롱하며 함정을 팠던 것을 보라. 돌을 던지며 혐오하며 죽일 방법을 모색했던 것을 보라. 심지어 제자들도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 또한 우리의 대속을 위해 치르신 비용이다.
나사로의 무덤가에서 그 심령에서 흘러나오는 탄식 소리도 들어 보라. “눈물을 흘리시더라”(요11:35) 이 두 마디야말로 성경 전체에서 가장 엄청난 단어가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이것은 인간적 나약함의 표현이 아니다. 저와 여러분을 대속하여 영광의 상속자로 삼으시기 위한 고난의 일부이다. 예루살렘 때문에 울며 신음하시는 모습도 보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서 세상의 삶을 마치기 직전 고독하게 기도하시는 모습도 보기 바란다. 자신이 씨름하는 동안 깨어 기도해 줄 것을 제자들에게 부탁하였으나 그들이 잠들어 버린 내내 핏방울처럼 뚝뚝 흘리신 땀은 그가 겪으신 고통의 표출이었다. 진땀 흐르는 고통은 무엇인지 여러분은 알 것이다. 그런데 피땀 흐르는 고통이 무엇인지 상상할 수 있겠는가? 죽음의 공포나 육체의 고통 앞에 위축되었기에 그토록 땀을 흘리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일어날 일을 아셨고 자신이 속죄제물로 바쳐질 것을 미리 아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렇게까지 하셨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깨닫는다면, 굳이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단하라고 호소하거나 압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간증을 동원하거나 감정을 조작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며 역사이다.
주님이 잡히시던 날 밤, 베드로에게 부인당하신 것 또한 고난의 일부였다.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지내며 기적을 목격했고, 변화산에도 겟세마네 동산에도 함께 있었으며, 남들은 몰라도 자신은 주님을 따르겠노라 장담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맹세를 저주하며 부인한 것이다. 세 번째 부인하는 순간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눅22:61) 그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는데, 그가 자신을 부인한 것이다. 그를 위해 곧 죽으려 하시는데, 그가 자신을 모른다고 했다. 이 또한 우리를 위해 치르신 값의 일부이다.
주님은 비웃음과 조롱을 받으셨고 거룩한 등에 채찍을 당하셨다. 거룩한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온갖 고통을 당하셨다. 그의 죽음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신 이유, 성육신 하신 의미는 죽기 위해서였다.
“죽음의 고난”은 의미심장한 말이다. 이 말에 담긴 의미는 첫 번째, 수치이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갈3:13) 십자가의 죽음은 중죄인의 죽음으로서 죽음 중에서도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이었다. 오욕의 죽음이었다. 그 죽음에는 지독한 갈증과 육신의 고통도 따랐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가 이처럼 만인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 죽음을 맛보셨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죽음의 고난”을 받기 위해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으셨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셨다.(고후5:21),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사53:6) 그는 율법을 다 지킨 죄가 없으신 분이시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의 불순종과 죄책을 전부 그에게 지우시고 죄로 삼으셨다. 이 모든 말에 담긴 실제 의미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죄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와 온전한 무게에 그대로 노출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모든 사람의 죄로 보시고, 그 죄를 향한 전능자의 거룩한 진노를 모조리 쏟아 부으셨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 죽음에 담긴 의미이다. 이처럼 그가 진노의 무게를 오롯이 감당하셨기에 우리는 그런 죽음을 당하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처럼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하시며 영원토록 아버지 품속에 계신 분, 아버지와 교제하는 것을 영원한 최고의 기쁨으로 여기시는 분이었다. 그런데 그 얼굴을 볼 수 없는 끔찍한 순간이 찾아왔다. 그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을 느끼고 소리쳤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이 때문에 “이 잔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게 해주소서”라고 세 번씩이나 구하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죄를 사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었고, 결국 복종하셨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십자가는 서서히 죽이는 사형 방식이었음에도 주님은 사람들이 놀랄 만큼 일찍 숨을 거두셨다. 그것은 아버지께 버림받은 형언할 길 없는 고통 때문이었다. 그를 창으로 찔렀을 때 핏덩어리와 물이 흘러나온 것은 심장이 말 그대로 파열된 탓이라는 의학적 근거가 있는 주장에 동의한다. 신체적 고통보다 훨씬 격렬한 영적 고통이 찾아왔다.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고통, 속죄제물이 되는 고통, 추방과 진노와 두려움이 그의 심장을 깨뜨려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것은 우리가 결코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이다. 우리를 “이같이 큰 구원”의 상속자로 삼아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기 위해 그는 이 모든 고통을 겪으셨다.
사람들은 그의 시신을 내려 무덤에 장사지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무덤에 장사되시고 낙원에서 죽은 자들 가운데 계셨던 것을 생각해 보라. 그 비용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이같이 큰 구원”의 크기를 깨닫지 못한다면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우리는 우리 믿음을 시작하시고 완성하신 분, 생명을 지으신 분을 죽였다. 이것이 그가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난과 고통의 분량이다.
주님이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떡을 떼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자신을 기억하라고 하신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그는 우리를 구원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 오셔서 친히 하신 일과 치르신 값을 교회가 결코 잊지 않길 바라셨다.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8-19),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그가 이토록 여러분을 사랑하여 이 모든 일을 대신 당하심으로써 여러분의 죄를 사해 주신 것, 새롭게 살게 해주신 것, 인도하시며, 하나님 앞에 흠 없이 큰 기쁨으로 서게 해주실 것을 알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