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히브리서 강해', 7장 두 관점, 두 운명 (김영희)
7 장 두 관점, 두 운명
“만물이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도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히2:8하-9상)
- 신년이 오면 사람들은 대부분 습관적으로 자기 삶을 검토하고 상황을 두루 살펴본다. “현 상황이 야기된 이유가 무엇인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이 두 질문과 관련하여 취할 수 있는 관점은 오직 두 가지뿐이라고 생각한다. 즉 비기독교적 인생관과 기독교적 인생관이 있는 것이다.
1. 비그리스도인의 관점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오늘날 상황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현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상태를 보면서 만족감이나 행복감을 느낄 수는 없다. 사람들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있다. 우리가 이렇게 된 데는 세상의 상황 및 삶의 불확실성, 현대인이 겪고 있고 시달리고 있는 온갖 어려움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흥미롭게도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상가들이 누구보다 비관적인 이들이 많다. 극심한 비관론자 중에는 선도적인 과학자도 있다. 인간을 각성시키는 무슨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한 세상은 결국 폭파되고 문명은 파괴될 것이라고 말한다. 온 세상이 지금 무서운 재앙을 향해 나아가는 중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삶을 심각하게 바라보는 비그리스도인 사상가들은 깊은 우려와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그들이 보여주는 다소 모순되는 태도가 있는데, 그토록 두려워하면서도 여전히 힘을 내고자 애를 쓰며 완전한 비관론자가 되길 거부하는 것이다. 상황이 참으로 절망적이라는 사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신년 초마다 낙관론이 등장한다. 우리를 안심시키려 들며 우리가 매달릴 만한 것을 제공하려 든다. 그러나 해를 거듭할수록 점점 나아지리라는 말은 헛된 것이 되어 버렸다.
많은 사람이 정치활동이나 교육이나 서로 알아가려는 노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전쟁을 종식하면 모두 함께 행복해질 뿐 아니라 유례없는 번영기를 누릴 것이라고 믿었으나, 그런 날은 오지 않았다. 지금도 미래를 기대하며 희망과 위로의 말을 찾는 이들이 있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해왔던 말 외에 다른 말을 하지 못한다.
전형적인 현대 사상가 버트런드 러셀과 그의 책 『변화하는 세상을 위한 새로운 희망』을 보라. 그는 이성을 사용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데서 모든 문제가 비롯된다고 말한다. 이 사람의 해결책은 생각하라고 권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3-4세기 전에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과 소크라테스가 했던 말이다. 지난 100년간 우리가 들은 말도 “생각하라 이성으로 문제를 바로 잡으라”라는 것이었다. 학교를 세우고 사람들에게 할 일만 알려 주면 저마다 일어나서 행동하리라는 것이었다. 최근처럼 생각하는 훈련을 많이 받은 시대는 없다. 그런데 패륜과 악덕이 무섭게 증가했다.
이 방책은 새로운 희망이 되지 못한다고 말하고 싶다. 인간이 최소한 배웠어야 하는 교훈은 ‘생각하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임이 분명하다. 문제는 추론하지 않거나 생각하지 않는 데 있지 않다. 이 비기독교적인 관점은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
1) 이처럼 비기독교적 관점이 항상 우리를 실망시키는 이유는 인간과 세상의 삶에 관한 세 가지 기본 사실을 모르는 데 있다.
① 첫 번째, 인간 자신과 그의 본성에 전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문제이다.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약4:1) 전쟁을 일으키는 장본인은 다름 아닌 인간이다. 사람들은 히틀러 같은 독재자를 보며 경악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사생활에서 똑같은 짓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리 경악하지 않는다. 집단이 하는 행위나 개인이 하는 행위나 똑같이 악하다. 개인도 국가도 그 본성이 악하고 왜곡되고 부정하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하는 것이다. 비그리스도인 사상가들은 결코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알지 못한다. 무엇이 옳은 일인지 알려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옳은 일을 사랑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다. 이 점을 생각지 못하는 것이 비기독교적 관점의 오류이다.
② 두 번째, 마귀의 존재를 잊고 있는 것이다. 세상을 볼 때마다 “대체 무엇이 사람들을 조정해서 저런 짓을 하게 만들까?”라고 묻게 된다. 성경은 마귀를 “이 세상 신”(고후4:4),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엡2:2)으로 묘사한다. 알든 모르든,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사악하고 더럽고 악의적인 영들이 거주하고 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와 목표는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고 인간과 역사의 전 과정을 파괴하는 것이다.
③ 세 번째, 인간이 죄를 짓고 하나님께 반역함으로 그의 진노 아래 있게 되었으며 그 때문에 평강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48:22)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않는 한 행복해질 수 없다고 말한다. 비그리스도인은 세상이 비참한 상태에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을 떠난 미래에는 아무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자기 문제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처럼 진단이 잘못된 탓에 치료법도 잘못 찾는다. 이것이 비기독교적 관점이 특징이다.
2. 기독교적 관점
기독교적 관점은 본문에 완벽하게 나와 있다. 현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기독교적 관점이나 비기독교적 관점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말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리스도인은 더 깊이 분석하고 더 현실적이고 정직하며 용감하다. 비그리스도인은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덮으려 든다. 상황이 나아지고 있다고, 어쨌든 인간에게도 좋은 점이 있다고 말하려 든다.
그리스도인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나의 모든 것을 알며 나에 대해 철저하고 적나라한 진실을 말해 주는 책은 오직 성경뿐이다. 우리는 시기하고 질투하며 추하고 더러운 생각을 하는 피조물이다. 천성적으로 서로 미워하는 피조물이다. 그뿐 아니라 성경은 앞으로 더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고한다. 마지막 때 세상의 모습이 홍수 이전과 아주 흡사할 것이라고 말한다.(마24:38) 홍수 이전 사람들은 홍수가 나서 다 쓸려 갈 때까지 먹고 마셨다.
1)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 복음의 첫 진술이다. 인간은 피조세계의 주인으로 만물을 다스리기는커녕 다스림을 받고 있다. 우리는 아직 만물이 그에게 복종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 본문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들을 수 없는 말을 연이어 해주는데, 그 말은 세 글자로 된 짧은 단어이다.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오직(그러나)---” 기독교 복음 전체가 “그러나”라는 이 한 단어에 담겨있다. 비기독교적 관점과 기독교적 관점의 본질적인 차이가 여기에 있다. 비그리스도인은 “그러나”라는 말을 붙이지 못한다. 그에게는 소망이 없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은 “그러나”에서 출발한다. “오직(그러나)---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2)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은 아주 비관적이다. 그런데 복음의 초청은 무엇인가?
세상의 암울한 모습은 그만 보고 예수를 보라는 것이다. 예수의 무엇을 보라는 뜻인가? 복음은 베들레헴에 태어나 구유에 누운 아기를 보라고 한다. 아무도 정죄할 수 없었던 분을 보라고 한다. 이적을 행하신 놀라운 분,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하신 분(요10:30), 생업을 버리고 따라올 것을 요구하신 분, 그래서 사람들이 떠라갔던 분, 3년간 모두가 놀랄 만한 설교를 하신 후 연약한 모습으로 체포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힌 후 죽어 무덤에 장사되신 분을 보라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은 실제 사실이요 역사이다. 인간의 철학이나 가르침이나 사상이 아니다. 복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한다. 그는 마귀와 그 무리에 종속된 인간의 상태와 실패와 문제를 해결하고자 오셨다. 복음은 그가 완전한 삶을 사셨다고 사탄을 완전히 정복하셨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죽음과 무덤도 정복하셨으며, 부활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높이셨고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 세상에 계셨던 예수는 지금 그 관을 쓰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이처럼 인간의 본성을 입고 인간이 되어 인류가 풀지 못한 문제들을 풀어 주셨다. 하나님은 그에게 세상과 세상의 미래를 넘겨주셨다. 땅에서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기에 세상을 넘겨주셨다. 세상은 이제 그의 수중에 있다. 그가 얼마든지 마음대로 하실 수 있다.
이것이 신약 복음의 메시지로서 저와 여러분은 세상에서 그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세상은 사탄, 마귀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새 백성, 새 나라를 세우고 계신다. 악한 세상에서 사람들을 불러내 자신의 새 나라로 옮기고 계신다. 이 일을 위해 성령을 보내 주셨다. 주님은 자신의 나아가 온전히 완성되는 날까지 이 일을 계속하실 것이며, 완성되는 날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이다. 모든 악을 멸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여실 것이다. 친히 그 나라에 거하시며 다스릴 뿐 아니라 자신에게 속한 모든 자, 자신이 영광으로 이끄신 많은 아들들도 그 나라에 참여시키실 것이다. 그들은 새 나라의 삶을 누릴 것이며, 그것이 그들의 영원한 운명이 될 것이다. 주님은 세상을 대속하시고 구원하시며 온전케 하신 후에 다시 아버지께 바치실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이다. 복음은 그저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이 되라는 메시지가 아니다. 복음은 예수와 그의 계획에 대한 것이다.
3) 이 사실이 우리 각 개인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첫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 대신 저주의 대상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우리 죄를 지신 주님께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졌고, 우리는 사함을 받았다.
더 나아가 인간에게는 새로운 본성이 필요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에게 필요한 새 본성을 주신다. 스스로 인간의 본성을 입으시고 인간에게는 자신의 본성을 입히심으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셨으며(롬8:29), 새로운 인류의 선도자가 되셨다.
또한 우리는 사탄과 악과 지옥을 이길 수 없지만,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자들을 똑같이 사탄을 정복하게 해주신다.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날처럼 악했던 당시의 삶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면서도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오직(그러나)---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께 시선을 고정하라고 말한다. 이것이 차이점이다.
여러분은 세상을 보듯 예수를 보고 있는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고 있는가? 그를 떠난 세상은 정죄를 받고 길을 잃었다는 것, 아무 소망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있는가? 여러분은 여러분의 힘으로는 그 죄를 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그 본성에서 해방되기를 갈망하고 있는가? 예수 없이는 아무 소망이 없음을 알고 있는가? 예수를 그런 분으로 보고 있는가?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느냐 보지 못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영원한 운명과 미래가 달라진다. 이 문제가 시급한 것은, 우리 모두 예수를 볼 날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지 못하는 자들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않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에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계6:15-17)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모든 눈이 그를 보게 될 날, 아무도 피하지 못할 날이 확실히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죄를 위해 죽임 당하신 어린양의 진노보다 무서운 것은 세상에 없다. 지금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고 있는가? 마침내 세상에 다시 오셔서 여러분을 자신에게로 영접하여 장차 올 뛰어난 영광과 말할 수 없는 지복을 우리에게 하실 예수께서 지금 영광과 존귀로 관 쓰고 계신 모습을 보고 있는가?
제가 이처럼 여러분에게 촉구하는 것은 심판 날 “너는 그들에게 좋은 조언이나 즐거움이나 더 나은 행복감을 주는 대신 예수에 대해 알려 주었느냐?”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날에 우리 모두 예수께 충성된 자로 나타나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