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히브리서 강해', 15장 하나님의 친 백성 (김영희)
15 장 하나님의 친백성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잔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히9:1-4)
-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기독교회가 내내 겪어 왔고 지금도 겪고 있는 문제는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어찌 된 일인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며, 자신에게 열려 있는 모든 영광스러운 가능성 또한 모른다. 구약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백성이었는데도 계속 불행했고 혼란에 빠졌으며 곤경과 난관에 봉착했다.
그들의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들이 누구인지 계속 잊고 지낸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자신들이 위대한 백성임을 잊어버렸고 하나님의 백성임을 인식하지 못했다.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무엇을 주셨으며 무엇을 주려 하시는지 잊어버렸다. 계속 다른 나라만 쳐다보며 그들처럼 되고 싶어 했고, 다른 나라가 가진 것들을 부러워했다.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참된 본질을 깨닫지 못한 채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방식으로만 계속 자신들을 이해했다’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다.
그들은 어떤 핑계도 댈 수 없었다. 그들이 어디에 가든 언약궤가 항상 따라갔다. 언약궤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자손이 맺은 약정의 증거로서, 하나님은 그 안에 물건들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 을 보관하게 하셨다. 성전을 바라볼 때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마다 이스라엘 자손은 언약궤와 그 안에 있는 물건들을 기억해야 했다. 이렇게 하나님은 그들의 정체성과 핵심 본질을 상기시킴으로써, 순전히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을 이해하려 드는 지속적인 성향 및 곤경과 재난에 계속 짓눌리는 성향에서 구해 주고자 하셨다.
하고 싶은 말은 과거 어느 때보다 오늘날 이 기념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교회가 왜 이토록 무력하고 무능해졌는가? 왜 이토록 비웃음과 조롱과 무시의 대상이 되었는가? 왜 이토록 인간적인 조직의 방식과 방법을 의지하고 있는가? 또 우리 그리스도인은 왜 이토록 형편없는 표본이 되어 버렸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사람들에 대한 신약성경의 묘사 및 사도 바울 같은 인물이 자기 경험이나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빛나는 표현들과 자기 자신을 한번 비교해 보라.
우리는 이스라엘 자손과 똑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다. 신약성경의 기념물로 돌아가는 대신 기독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기념물이 옛적에는 언약궤 안에 들어 있었지만 지금은 신약성경 안에 들어 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낮은 차원에 머물려 한다. 너무나 쉽게 성경이 아닌 인간의 생각과 철학과 상식에서 끌어온 기준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해하려 한다. 이 모든 성향을 바로잡는 길은 하나님이 친히 백성에게 주신 기념물들을 기억하는 것이다. 주시며 말씀하신 요지는 이것이다. “이것들을 영구한 기념물로 보관해라. 어디에 가든 무슨 일을 겪든 이 세 가지 기념물을 항상 기억해라. 이것들이 너희의 안녕과 행복과 삶 전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기본원리를 제시해 줄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이 기념물들로 돌아가야 한다.
- 이 기념물들을 살펴보면
그들에게는 물리적인 형태로 주어졌고 우리에게는 영적인 형태로 주어졌지만, 전달하는 메시지는 완전히 동일하다.
1.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
광야 길을 가던 이스라엘 자손은 애굽의 별미를 그리워하며 양식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친히 양식을 주겠다고 하셨고,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지면에 작은 이슬방울처럼 보이는 것들이 내려앉아 있었다. 백성들은 그것을 거두며 만나, 즉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불렀다. 여정이 끝날 때까지 하나님은 계속 만나를 내려 주셨다.
만나가 의미하는 바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기적적이고 초자연적인 요소가 있음을 상기시키는 영구한 기념물이다. 우리가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사실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다르다는 것이다. 광야를 지나던 이스라엘 자손을 보라. 다른 모든 나라는 자급자족하며 살았지만, 이스라엘 자손은 만나를 거두어 살았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행동이요 기적적인 역사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기원부터 기적적이고 초자연적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행동을 통해 창조된 나라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한 나라를 만들어 내셨다. 그들은 후에 애굽으로 내려갔고 노예로 매여 사는 처지가 되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놀라운 기적을 행하심으로 애굽에서 이끌어내셨다. 하나님과 그의 기적적이고 전능한 능력을 떠나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역사를 이해할 수가 없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평범한 역사가 아니며, 단순한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기적의 이야기이며 초자연적인 역사이다. 언약궤 안의 만나 항아리는 이 사실을 계속 상기시켰다.
* 우리도 이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① 그리스도인은 그 자신이 하나의 기적이다. 완전히 구별된 존재이다.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다. 스스로 행동하고 노력해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다. 만나를 주신 하나님이 친히 생명을 주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여타의 사람들과 좀 다르거나 좀 나은 존재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존재이다.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다.(벧전2:9) 출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후의 삶도 그렇다. 이스라엘은 평범한 수단으로 살지 않았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 주시는 놀라운 떡으로 살면서 길을 갔다. 이것은 기독교의 핵심교리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일관성과 통일성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상기해야 할 사실이 이것이다. 어느 때나 하나님의 교회는 영적인 기관이다.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 곳이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세상의 수단과 방법으로 존속하려 들 때가 너무 많다. 그러면 옛적 이스라엘 자손처럼 곤경과 재앙을 면치 못한다.
교회의 상황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개인들도 같은 시험에 빠져 있다. 자신이 초자연적으로 태어난 존재이며 이후에도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양식을 먹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은 채 삶을 이어 가려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적 양식을 이미 주셨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이다. 그런데 지금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가? 영혼을 먹여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떡, 하늘의 떡뿐이다. 하나님이 언약궤 안에 두게 하신 만나를 잊는 것은 비극이다. 우리에게는 만나가 필요하다. 만나가 없으면 삶이 쇠약해지고, 그리스도인의 특징으로 항상 나타나야 할 활력이 사라진다.
② 그리스도인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항상 때에 맞게 돌보아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죄를 짓고 원망하며 거역하는 옛적 백성들도 친히 부양해 주셨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마10:30) 하나님은 우리 자신보다 무한히 더 우리의 안녕을 염려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그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며 축복할 자를 찾는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하나님의 자원은 무한하다는 사실도 기억하라.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왜 우리를 광야로 끌고 왔느냐?”라고 항변했다. 그때 모세가 내놓은 대답은 이것이다. “너희를 인도하는 이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심을 모르느냐 내일 아침 너희 눈앞에 기적이 펼쳐질 것이다.” 여러분도 곧 광야를 방랑할지 모르며, 이미 광야로 들어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나 항아리가 있다는 사실, 여러분을 사랑하시며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상기시키는 기념물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배고프고 목말라 곧 죽을 때 만나가 내리고 샘이 터질 것이다. 전적으로 의지하면 때에 맞게 돌보아 주실 것이며, 그 무한한 자원은 결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2. 아론의 싹난 지팡이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를 방랑하던 시절, 세 사람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 이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반기를 들었다. “우리도 아론처럼 하나님께 향을 드릴 수 있고 제사를 드릴 수 있지 않느냐” 그들은 이렇게 반역하다가 하나님의 벌을 받았다.(민16:) 그리고 17장에 기록된 지팡이의 사건이 일어났다. 하나님은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언약궤 안에 보관함으로써 그에게 올바로 나아가는 법을 상기시키는 영구한 기념물로 삼게 하셨다. 기적의 생명을 얻은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길을 갈 때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갈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나아오는 한 가지 방법, 유일한 방법을 단번에 확정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이 또한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교훈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만 유일한 방법으로서 하나님이 친히 그 방법을 계시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인간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야 한다. 현대인은 “글쎄, 꼭 그래야 할 것 같지는 않은데”라고 한다. 철학이나 인간의 생각을 끌어들인다. 하나님의 계시보다 인간의 견해를 앞세운다. 그러나 아론의 지팡이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예배해야 한다’ 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영구한 기념물이다.
그 방법은 이것이다. “내가 제사장을 세웠으니, 너희는 그 제사장을 통해서만 내게 나아와야 한다. 내가 아론을 불렀고 그에게 할 일을 알려 주었다. 너희는 오직 이 방법으로만 –제사장과 제사를 통해서만- 나아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일을 통해서만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려 준다.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 없이는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갈 수 없다. 하나님은 속죄제물 없이 나아오는 자를 받아 주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아들 나사렛 예수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인간의 죄를 담당하시고 하나님 앞에 속죄를 이루신 일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서도 죄사함을 받고 양심의 평안과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새 생명을 얻고 확실한 천국의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한번 그렇게 해보라고 하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다른 터를 닦아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3:11)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피가 필요하다. 죽음의 마지막 고통을 겪을 때 붙잡을 유일한 소망 역시 그리스도께서 나와 내 죄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케 해주신 이 일에 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
3. 언약의 돌판들
이 돌판들이 상기시키는 문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하셨다.(벧전1:16) 하나님은 십계명을 통해 자기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셨다. 그래서 언약의 돌판들을 언약궤 안에 보관하게 하신 것이다. 빛과 어둠은 사귈 수 없고 옳고 그른 것은 섞일 수 없다. 하나님은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 분이다.(합1:13)
축복을 알려면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2:14)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들의 거역을 참으시며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참으신 이유가 무엇인가? 계속해서 죄를 지으면서도 쉽게 용서받게 하시기 위해서인가? 아니다! 거룩한 백성이 되는 놀랍고도 영광스러우며 귀중한 특권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자신을 닮게 하시며 자신이 살았던 대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이처럼 우리를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 그는 죽으셨다.
이것이 축복의 조건이다.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다면,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충만한 영광을 전부 경험하고 싶다면, 바울처럼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라고 말하고 싶다면, 임종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라고 말하고 싶다면, 이 모든 복을 얻고 싶다면, 하나님이 알려 주신 거룩한 삶, 자신의 성령을 선물로 주어 가능케하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신분이요 그리스도인 됨의 의미이다. 그리스도인은 그저 남들보다 조금 나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새로운 피조물, 그가 친히 붙드시고 지키시며 부양하시는 백성, 그와 교제하는 영광스러운 운명으로 부름받은 백성, 그때까지 거룩한 하나님께 합당한 거룩한 삶을 가는 백성이다.
하나님께 사랑받는 백성들이여! 그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르신 저 높은 부름의 참된 높이까지 올라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