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0 주일설교,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고후 7:1
2020-09-20 주일설교
제목: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본문: 고후 7:1
1. 우리는 아버지와 자녀 관계의 약속을 가졌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고후7:1)
아버지 하나님은 무엇보다 거룩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이다. 우리 같은 육신적이고 죄악된 사랑이 아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본질이요 으뜸가는 속성이다.
그 거룩이 법으로 나타나는 것이 공의와 정의이다.
사랑은 그 다음 순서이다. 순서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의 사랑만을 알고 거룩함을 모른다면 그처럼 불경한 것은 없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로 시작하셨다.
이름은 그 존재를 대표하고 그 존재 자체를 가리킨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아버지 자신이 거룩히 여김을 받음을 말한다.
아버지의 존재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이 첫째요 으뜸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은 거룩 그 다음이다.
거룩은 적극적으로는 본질적이고 완벽한 순결함을 의미하고,
소극적으로는 죄와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으며 관계 없으심을 의미한다.
그래서 죄를 처리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은 인간들과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죄는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고 ,
인간이 지은 모든 죄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따라 반드시 심판과 형벌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희생제물이 되셔야 했고,
인간을 대신하여 형벌을 받는 대속제물이 되셔야 했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는 화목제물이 되셔야 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보면서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함께
동시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아야 한다.
죄의 무서움을 보아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약속을 받게 되었다.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6:16)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고후6:18)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관계,
하나님은 우리를 영접하여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자녀가 되는 관계가 되는 약속이다.
하나님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맺을려면,
성령으로 거듭나고, 그 결과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이를 위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하나님이 다 하시고
우리가 할 일은 믿음까지 선물로 받아 죄를 회개하는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회개의 열매를 맺으며 아들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의 말씀을 순종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의 약속을 받은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은 회개와 성화이다.
그런데도 구약 이스라엘이나 신약 시대의 교인들이나 마찬가지로 이 일을 소홀히 하고 있다.
이 땅에서의 성공과 출세, 형통과 축복은 그것을 추구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거룩을 이룬 자를 쓰시고 축복하시고 영광을 주신다.
광야 생활의 고난과 연단은 오로지 거룩을 위한 것이다.
거룩을 추구하고 성결에 힘쓰는 자를 하나님은 축복하신다.
성공과 출세와 부자를 추구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뿐이다.
하나님의 자녀되는 약속을 받은 자는 더더욱 거룩에 힘써야 한다.
2.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거룩함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인들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을 모른다.
하나님의 사랑만 알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모르는데 기인한다.
상담학과 경영학이 교회를 지배하면 하나님은 더 이상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다.
인간이 만든 하나님이요, 인간에게 수종드는 하나님이 되어 버린다.
인간의 지혜와 세상의 초등학문은 성경을 인간 수준으로 인간 중심으로 해석한다.
바리새인의 누룩과 사두개인의 누룩은 성경을 율법화 세속화할 뿐이다.
거룩과 의는 겉을 꾸미는 외식일 뿐이고 내용은 다른 것으로 채운다.
탐욕과 방탕, 외식과 불법으로 가득하게 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너희 의가 그들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루살이는 걸러내지만 낙타는 꿀꺽 삼키고 만다.
회칠한 무덤일 뿐이다.
겉은 하얗고 깨끗하지만 속은 시체와 벌레가 우굴거릴 뿐이다.
교회는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도록 끊임없이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을 안다면 그 교회는 성경을 제대로 가르치는 곳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쳤을 때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셨다.(창22:12)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내 중심으로 내 이기적 욕심을 따라 살 수 없다.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라면,
이삭까지도 아끼지 않는 것이 경외하는 것이다.
십일조와 예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빈손으로 하나님을 뵈올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 인색한 자가 복을 바라는 것처럼 꼴불견은 없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 날까지 우리의 거룩함은 멈출 수 없다.
거룩함은 우리 구원의 목적인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택하신 것은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셨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은
물로 씻어 말씀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었다.(엡5:25-27)
성령의 지혜는 온전한 거룩함을 가르치고
사람의 지혜는 적당한 겉 수준의 거룩을 가르친다.
온전한 거룩을 이룰려면 성령의 지혜로 가르침을 받고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나도 힘을 다해 수고를 해야 한다.
주님은 종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시는데,
성도들은 종들에게 가르침을 받아 지켜야 하는데,
가르칠려고 하는 자도 없고 배울려고 하는 자도 없다.
가르치는 자에게도, 배우는 자에게도, 그 자세와 마음가짐에
혁신적인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교회도, 목사도, 교인도 아무 소망이 없다.
장사하는 집, 강도의 소굴은 번창할지라도,
거짓 목사들, 일만 스승들은 넘쳐날지라도,
그들은 결국 멸망으로 인도될 것이고, 영원한 지옥불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다.
하나님께 열심을 잃어버린 시대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을 잃었기 때문이다.
성령의 지혜로 가르친 말씀을 가르치고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은 우리 시대와는 다르게 가르쳤다.
사도와 선지자들은 우리 시대와는 다르게 가르쳤다.
아버지 스승들이 되어 복음으로 생명을 낳았고 해산하는 수고를 하였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우리 시대와는 다르게 배웠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고, 성경을 매일 상고하였다.
말씀에 대한 우리의 자세가, 말씀을 배우는 우리의 마음가짐이, 달라져야 한다.
말씀 공부를 통해 우리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이 달라져야 하고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는 일에 마음과 뜻을 다해야 한다.
그 끝에 축복이 있고 영광이 있다.
3.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이 하여야 한다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이 우리의 육과 영을 더럽히고 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7-8)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11:4)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을 받지 않을려면
바른 복음 참 예수 진리의 영을 분별할 줄 알아야겠지요.
사도가 바로 가르쳤는데도 그 모양이 되었으니,
바로 가르침을 받지 못하는 현대 교회는 어떤 모양일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성령의 지혜로 가르침을 다시 받아야 한다.
신뢰할만한 경건 서적들을 손에 쥐어야 한다.
아버지 스승을 만나기 위해 찾아나서야 한다.
그것이 천국을 침노하는 것이고,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아지는 길이다.
그것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이고, 협착한 길이다.
찾는 이도 적은 이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그것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이 하는 길이다.
우리의 육체는 성령과 대립하면서 육과 영을 더럽힌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은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갈5:16-17)
육체를 더럽히는 것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 같은 것들이라 하였다.
육과 영을 깨끗이 하는 것은 성령의 열매들이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 하였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리고 영의 생각이 있고 육의 생각이 있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을 낳지만, 육의 생각은 사망을 낳는다.
하나님은 영의 기도를 받으시지, 육의 기도는 받지 아니하신다.
특히 우리의 영을 더럽히는 것은 미혹의 영이다.
진리의 영을 바로 알아야 미혹의 영을 분별할 수 있다.
이 또한 말씀을 제대로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진리보다 불의를 더 좋아하면 하나님은 미혹의 역사를 보내어 거짓 것을 믿게 하신다.
말씀 공부에 목숨을 거는 일생 일대의 대전환이 있기를 바란다.
한가족교회와 청교도아카데미의 사명은 성령의 지혜로 말씀을 가르치는 데 있다.
헤브론에 오르는 것도 오직 그 사명을 위한 것이다.
주께 받은 사명 곧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기 위해서는
자기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던 바울을 본받아야 한다.
헤브론은 바로 이 사명을 완수하게 하기 위해 주시는 것이다.
말씀으로 살고 목숨을 다해 말씀을 사랑하였던 청교도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
사도들은 주님을 본받아, 영으로 생명으로 가르치고 살았다.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은 사도들이 가르친 이 전통으로 돌이킨 것이었다.
우리는 이들을 통해 다시 사도들이 가르친 전통으로 돌아가야 한다.
청교도 신앙으로 무장한 이들이 교회를 개혁하고 사회를 개혁하게 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