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 주일설교, '이리로 보낸 이', 창 45:8
2021-02-14 주일설교
본문: 창 45:8
제목: 이리로 보낸 이
1.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45:8)
요셉이 17살에 애굽에 노예로 팔려 온 것은 분명 열 형들의 소행이었다.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창37:28)
‘그런즉’은 앞에서 요셉이 한 설명에 대한 결론을 의미한다.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45:4-8)
당신들이 분명 나를 팔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시는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야곱이 죽은 후 요셉이 보복할까 형들이 두려워할 때 요셉의 대답은 같은 설명이다.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50:19-21)
내가 당신들에게 보복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이 된다.
심판은 하나님의 권한이다. 내가 그럴 수는 없다.
우리도 우리에게 해악을 끼친 사람들에게 보복하지 않아야 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19-21)
원수의 머리 위에 놓여 있던 숯불을 ‘치워주는’ 진정한 사랑의 행동,
원수들마저도 잠잠케 하고 결국 선으로 악을 이기는 행동이다.
원수의 머리 위에 ‘쌓아두어’ 심판을 받게 한다면 앞 뒤 문장과 잘 맞지 않는다.
원어는 ‘잡아채다’가 원뜻, 시52:5‘뽑아낸다’, 잠6:27‘품는다’, 사30:14‘취하다’.
하나님은 당신들의 악을 선으로 바꾸셨다.
엘리사가 사로잡은 아람 군대에게 빵과 물을 주었더니 다시는 쳐들어오지 않았다(왕하6장)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하시느라 보낸 원수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알게 해주시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잔인하게 망하게 한 앗수르와 바벨론에 배나 갚아주셨다.
친히 원수를 갚으려던 다윗에게 하나님은 아비가일을 보내주시고 깨닫고 복수를 거두니까
나발은 열흘 후에 친히 치시매 죽게 하였다.(삼상25:38)
압살롭의 반란 때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였지만 다윗은 참고 넘기니 회복시켜 주셨다.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삼하16:10-12)
우리가 친히 원수 갚지 않을 때 하나님이 그 원수의 악을 선으로 바꿔주신다는 것을 믿으라.
또 원수의 악행으로 고난을 받고 성숙하였을 때 하나님은 배나 선으로 우리에게 갚아주신다.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을 따라 상 주시는 분이시다.
이리로, 지금 현재의 나의 환경과 처지로, 보낸 이는, 사람들이나 세상이 아니다.
원수들이, 악인들이 기여를 했고, 하고 있지만, 그것은 그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고, 나를 만드시는 것이고, 선으로 갚아주시고, 쓰시려는 것이다.
2. 이리로 보내신 목적은 큰 구원의 사명을 감당케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이 큰 구원의 사명을 감당케 하기 위하여 바로가 이름을 지어주었다.
‘사브낫바네아’, 생명을 주는 자, 생명의 구원자, 생명의 부양자이다.
하나님이 바로를 통해 요셉의 사명을 확실히 해주는 이름이었다.
어렵고 힘들고 낙심될 때마다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고 하나님이신 것을 기억하자.
낮추시고 주리게 하실 때마다 이리로 보낸 이는 사람들이 아니고 하나님이시다.
요셉을 유혹한 보디발의 아내나 감옥생활의 억울함도 그들이 보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었다.
감옥에서 술관원과 떡 관원을 만나 꿈을 해석하게 하신 이도 하나님이셨고,
풀려난 술 관원이 이년 동안 요셉을 잊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셨고,
만 이년 후에 바로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셨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창40:23)
“만 이 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창41:9)
만 이년을 더 감옥에 머물렀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술 관원을 의지한 탓이었다.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창40;14-15)
곤경에 처했을 때,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하는 생각과 하는 말을 보면
그 사람의 성숙도를 가늠할 수 있다.
감옥생활 2년을 더한 후에는, 요셉은 성숙하였고, 형들을 다시 만났을 때,
그는 보복하지 않았고, 보디발이나 보디발의 아내에게도, 친히 보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리로 보내신 이가 하나님이시기에 현재와 미래를 인도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고난이 왜 이리 길까? 인내를 온전히 이루기 위함이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4)
모세의 광야 40년은 그냥 흘러보낸 세월이 아니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12:3)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냈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었고,
온전하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모세,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온유한 모세를 만들어 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로 칠려고 할 때다 권력으로 맞대응하지 않고 모세는 머리를 숙였다.
고난이 언제 끝이 나느냐? 하나님의 때가 차고 하나님의 때가 이를 때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모든 준비를 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게 될 것을 믿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강하고 담대하게 기다려야 한다.
바울처럼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워가야 한다.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워야 한다.
그러할 때 우리는 아무 염려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게 될 것이다.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게 될 것이다.
지금 이리로 보낸 이는 사람들도 세상도 원수들도 아니다.
하나님이 이리로 보내셨음을 믿고 알고 확신하고
지금 여기서 doing도 해야겠지만, 중요한 것은 being인 것을 유념해야 한다.
doing은 수단이요, being이 목적인 것을 알아야 한다.
긴 광야 생활을 통해 주리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는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말씀으로 살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아들의 형상’을 닮게 하기 위해서 부르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들을 영화롭게 하신다.
큰 구원의 사명, 생명을 살리고 부양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이리로 보내시고 여기서 일들을 통해 우리를 사브낫바네아로 만들어 가신다.
형들이 팔아 억울한 노예생활,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거절하여 억울한 감옥생활,
모든 과정, 사건들이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배열하셔서 요셉을 사브낫바네아로 만드셨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 전에 택하셔서 부르신 자들은
또 하나의 요셉으로 다윗으로 모세로 아브라함으로 만들어 가심을 믿어야 한다.
이리로 저리로, 사건들을 통해, 사람들을 통해, 보내셔서, 성숙을 만들고 사명을 감당케 하신다.
헤브론 또한 큰 구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올라가는 것이다. 성숙한 갈렙, 다윗이 올라갔다.
고난은 성숙을 만들지만 풍요와 안일과 사치는 성숙을 만들지 못한다.
청교도들은 위대한 고난자들이었다. 영국에서는 권력자들에게 고난을 당하였고,
뉴잉글랜드에서는 자연으로부터 고난을 당했다, 그 고난이 위대한 성숙을 이루게 했다.
3. 나를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운 분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애굽으로 보낸 이가 하나님이셨고, 노예생활, 죄수생활로 성숙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셨고,
요셉을, 바로에게 아버지로, 그 온 집의 주로,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신 분도 하나님이셨다.
실제로는 바로가 하였지만,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씀하신다.
이리로 보낸 분이 하나님이셨고, 대애굽 제국의 총리로 세우신 분도 하나님이셨다.
모세는 상을 바라보고 그리스도를 위한 모든 수모와 고난을 참았다.
하나님은 모세를 만드신 후, 화를 당한 연수대로, 그를 기쁘게 해주셨다.
우리를 고난으로 연단하신 하나님은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으로 갚아주신다.
고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성숙)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 축복과 영광을 이루는 순서이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우리가 지나온 고난과 위기와 슬픔들, 그것이 구속사를 이루고 선하신 영광을 이루어간다.
“내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시16:6)
멱우리 15년, 약대 2년, 화서 4년은 주님이 이리로 보내신 곳이고, 줄로 재어 준 구역이었다.
이제 하나님은 줄로 재어, 아름다운 구역에, 실로 아름다운 기업으로 보내실 것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한 적이 없는 사울 왕과 솔로몬 왕은 파멸로 끝이 났다.
말씀을 버리니까 하나님은 왕권을 버리게 하셨다.
솔로몬은 아비 덕에 생전에는 화를 모면했지만 자식 대에 다 받게 하셨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은 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는다.
십자가 없는 영광, 죽음 없는 부활은 없다.
NO CROSS, NO CROWN !!!.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 협착한 길은 외면하고, 찾는 이도 적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 넓은 길, 크고 화려한 곳으로만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고 있다.
진리에는,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세상이 알아주는 축복, 자기 이익과 유익에만, 관심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이다.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다.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면 구원함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어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그들이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데 대한 심판을 받게 하시는 것이다.
목사가 거짓을 설교하고 권력으로 다스리기를 좋아하는데 교인들은 그것을 좋게 여기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다. 너희가 마지막에는 어찌 하려느냐? 하신다.
사도들이 성령의 지혜로 가르친 전통으로 돌아가야 한다.
개혁자들이, 청교도들이 돌이킨 초대교회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
주님이 분부하신 모든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한다.
사람의 지혜와 세상의 초등학문을 버리고, 성령의 지혜가 가르친 전통으로 돌아가야 한다.
진리로 돌이키시려는 고난과 연단을 요리 조리 피하고 회개할 줄 모르다가 멸망으로 치달았다.
더 늦기 전에 청교도들의 고귀한 책들을 읽어야 한다.
성경을 바로 알고, 진리를 바로 알고,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유일한 길이다.
사람의 계명을 교훈을 삼아 가르치면 헛되이 하나님을 경배할 뿐이다.
입으로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입술로만 하나님을 경배하고, 마음은 멀 뿐이다.
우리 몸에 베어 있는 세상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말씀의 그것으로 바꾸지 않으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다가, 반드시, 사사시대, 중세 천년의 암흑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아브라함 요셉 다윗 모세가 어떤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되었는지,
말씀을 통해, 바른 해석을 통해, 알고서, 그 자취를 따라가시기 바란다.
전에 기록된 바는 다 우리의 교훈을 위해서 기록된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주님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우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다.
죄가 있어 매를 맞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으면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