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 주일설교, "평강의 주", 살후 3:13-16
2021-04-11 주일설교
본문: 살후 3:13-16
제목: 평강의 주
1.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인간은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모르는 인간들이 자기들은 선하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선언한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14:2-3)
아담의 후손들은 구원 받기 전에는 다 죄인들이고 행하는 것은 죄 뿐이다.
이 죄가 인간과 세상을 모든 비극과 불행으로 몰고가는 데도 깨닫지 못하고 선을 자랑한다.
모든 불경건과 불의에 대해서는 하나님은 반드시 진노와 분노를 쏟아 부으신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롬1:1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롬2:8)
선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10:18)
인간은 구원 받아야 선을 행할 수 있다.
또 선을 행하기 위하여 구원 받는다.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야 선을 행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선하신 뜻을 알아야 선을 분별하고 선을 행할 수 있게 된다.
이 세상 퐁속을 따르는 자들, 심령이 새롭게 되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할 수 없다.
선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진리의 말씀에, 성령의 역사하심에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선을 행하다가 결과와 열매가 늦게 오기 때문에 때로는 낙심하고 게을러질 수 있다.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사람들은 믿음과 오래참음으로 받는다. 그 본을 받아야 한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아니하고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게 하신다.
기도도 항상 구하고 낙심하지 말라고 하신다.
불의한 재판관도 낙심하지 않고 구하는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는 데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시지 않겠느냐 오래 참으시겠느냐 하셨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을 믿는다면
우리는 낙심할 수가 없다. 잠시 침체해질 수는 있어도 낙심하지는 말아야 한다.
믿음이 있으면 인내하게 되고, 믿음이 있으면 사랑하게 된다.
로마서는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다 죄라고 한다.
삼위 하나님과 그 진리의 말씀을 믿지 않고서 하는 인간의 의와 선은 더러운 옷과 같다.
은혜와 선물로 주신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선을 행하게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한다.
믿음은 들음으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성경을 멀리하고 설교를 멀리하고 가르침을 멀리하는 사람은 믿음이 자랄 수가 없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이 약속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다.
정말 성령으로 거듭나서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었느냐가 중요하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5)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
전혀 회개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 교회만 다닌다고 구원 받은 줄로 착각하고 있다.
회개한 적이 없기에 변화도 없고 성숙도 없으며 빛과 소금의 역할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들이 거듭남과 회개(회심)의 중요성을 역설하지 않기 때문이다.
회개도 성령으로 하고 믿음도 성령으로 가져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야 한다.
성령으로 난 믿음은 이미 거룩하게 하셨기에 그렇게 쉽게 낙심하지 아니한다.
진리의 말씀을 믿고 구원 받은 사람들은 쉽게 낙심하지 아니하고 낙심이 오래 가지 않는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사람 만들고 쓰시는 과정을 보면서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약속의 말씀들을 소망으로 붙들고 믿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고 있다면 머지 않아 헤브론에 오를 것을 믿어야 한다.
다윗도 적지에 망명하여 살다가 모든 것을 다 잃는 시글락 위기를 겪고서야 헤브론에 올랐다.
요셉 13년, 아브라함 25년, 모세 40년, 광야 생활의 연단 끝에 영광스런 기업을 주셨다.
그 연단이 있었기에 능히 주신 기업과 사명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만물을 통치하시는 것과
심는 대로 거두게 하시고 행한 대로 갚아주심으로 반드시 상 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한다.
낙심하고 흔들렸다면 다시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돌이켜야 한다.
2.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않는 자와는 사귀지 말라.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살후3:14-15)
사도들이 전한 복음과는 다른 복음, 다른 교훈을 전하는 자들과는 인사도 하지 말고
집에 들이지도 말고 그들에게서 나와 따로 있으라고 하였다.
그 정도는 아니고 여기서는 사도가 전한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 관한 것이다.
일시적으로 불순종한다고 하여 원수가 될 수는 없다.
우리도 시시때때로 불순종하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공적으로 문제가 있을 때는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고 하신다.
사실 심판은 우리 몫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권한을 침범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과 진리는 엄연히 살아 있다.
그것이 우리의 모든 생활의 최고 기준이 되고 규범이 되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도 질서와 품위가 있어야 하고 범법에 대해서는 권징과 징계가 있어야 한다.
범법의 정도에 따라서 권징과 징계도 비례해야 한다.
작은 잘못에 대해 지나치게 큰 벌을 주는 것은 권한 남용이다.
무조건 관용은 무질서를 낳고 경건을 해치고 불의를 조장한다.
진리에 대해서는 엄격하고 작은 잘못에 대해서는 관용이 필요하다.
사랑도 진리 안에서 하고 진리도 사랑으로 실천해야 한다.
인자와 진리는 항상 함께 가야 한다.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시25:10)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시40:11)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잠3:3)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와 사귀지 말라는 것은
그를 부끄럽게 해서 돌이키기 위함도 있지만,
그런 사람과는 어울리다가 같이 물들고 같이 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목하여 사귀지 말라는 것은
교회 전체에 경각심을 주기 위함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 문제는 교회가 권징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잘못된 사랑과 관용으로 인하여 진리에 대해서도 양보와 타협을 하고
세력 키우기에 연연하여 교리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연합을 우선시하고 있다.
교리와 진리를 끝까지 지키고 순종하는 사람은 항상 소수였고 다수가 아니었다.
영국의 명예혁명을 낳은 원천은 2천명의 청교도들의 진리에 대한 믿음과 실천이었다.
그 진리에 대한 믿음과 실천이 영국을 강대국으로 만들었고 세계를 2백년 동안 제패하게 하였다.
청교도들의 진리에 대한 믿음과 실천이 미국을 건설하고 세계를 2백년 동안 제패하게 하고 있다.
진리에 대한 믿음과 실천이 축복을 낳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공과 출세를 위해 달려가고 부르짖는다고 축복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늦는 것 같아도 진리가 승리하지, 불의가 승리하지 않는다.
성경은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한다.
그 형통은 오래가지 못하고 등불이 꺼지듯 꺼지고 만다고 한다.
무성한 풀이 베이듯이 푸른 채소가 시들듯이 사라지고 만다고 한다.
사도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과 사귀지 말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결국 사망과 멸망에 이르고 말기 때문이다.
사도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이고
하나님은 말씀에 청종하는 자를 축복하고 청종하지 않는 자를 저주하신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사는 자를 축복하시고 떡으로만 사는 자를 저주하신다.
하나님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자를 축복하시고 아닌 자를 저주하신다.
정말 나와 내 자손이 축복 받고 형통하고 싶다면, 우리 마음이 부와 권력으로 향하지 말게 하고,
오직 주와 주의 은혜의 말씀께로 향하게 해야 한다.
“내 마음을 주의 증거들에게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하지 말게 하소서”(시119:36)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성경을 즐거워하며 그의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이다.
어디로 가든 무엇을 하든 형통하는 사람은 성경이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자이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와는 사귀지도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시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세요.
3. 평강의 주께서 때마다 일마다 평강을 주신다.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3:16)
주님은 ‘평강의 주’이시다.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이시다.
사도 바울은 편지 첫 머리에 항상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께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하고 축원한다.
은혜의 결과가 평강이다.
평강이 없다는 것은 은혜가 없기 때문이다. 은혜가 매말랐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어도 하나님의 은혜가 살아 있으면 그 마음은 평강을 누린다.
평강은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는 것이다.
친히 때마다 일마다 평강을 주시는 곳 그곳이 하나님 나라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곳이 천국이고 하나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 곧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르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면서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야 한다.
평안을 누릴려면,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하기를 배워야 한다.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워야 한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세상 사는 동안 우리는 환난(고난)을 당한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이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기 때문이다.
소유로 환경으로 평안을 누릴려고 하는 사람들은 결코 평안을 누릴 수 없다.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려야 한다. 담대해야 한다.
주님이 이미 세상을 이기셨고 우리도 이길 것이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제일 먼저 명하시는 것은 강하고 담대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주시는 평안을 누리며
어떤 환경에서도 담대해야 한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말씀이 없으면 낙심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말씀으로, 말씀을 믿는 그 믿음으로, 우리는 강하고 담대해야 한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지 소유나 환경으로 살지 않는다.
근심한다고 두려워한다고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음만 불안하고 지옥을 살 뿐이다. 믿음의 미약함을 드러낼 뿐이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내일 일은 내일이 걱정하게 하라고 하신다.
들에 핀 백합화, 공중 나는 새도 먹이시는데 너희는 이보다 훨씬 귀하니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우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우리가 항상 기억하고 실천해야 할 말씀이다.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하고,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고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주시고 이루시는 것은 주님의 때에 하실 것이고, (때와 시기는 아버지의 권한에 두셨다,)
하나님은 평강부터 주셔서 그 평강으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신다.
근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게 해주신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와는 사귀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평강을 때마다 일마다 어떤 때나 무슨 일을 하든 주시고 함께 하시길 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