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 초기 사상과 사역의 발전의 공을 워필드에게 돌리는 로이드 존스/ 이안 머리
사역 초기 사상과 사역의 발전의 공을 워필드에게 돌리는 로이드 존스/ 이안 머리
사람들이 로이드 존스를 오로지 ‘복음 전도자’로만 보지 않고 그 이상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1932년 첫 번째 북미 지역 방문과 관계가 있다. 그의 장기적 사역과 관련해서 볼 때 대서양을 건너온 데서 얻은 장기적인 효과는 많은 시간을 홀로 조용히 보낸 데서 비롯되었다.
그를 초청한 캐나다 토론토의 연합 장로교회는 베단과 엘리자베스까지 포함한 세 식구에게 숙소를 낙스 신학교 바로 맞은 편에 마련해 주었다. 낙스 신학교에 멋진 도서관이 있다는 말을 들은 존스는 아침 공부를 하기 위해 거기로 갔다. 그러나 도서관에 간 그는 신착 도서용 서가에서 한 발짝도 더 나갈 수가 없었다.
당시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에서 최종판으로 발간하고 있던 벤자민 워필드 전집 몇 권을 그 서가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는 마치 코르테스가 태평양을 처음 봤을 때처럼 그 책에 빠져들었다고 말했다. 과거 개혁주의자들의 저서가 그랬던 것처럼 위필드의 책에도 성경에 견고히 뿌리내린 신학이 있었다.
게다가 그의 저서는 개혁주의자들의 책에 비해 주해 면에서 면밀성이 두드러졌고, 거기에다 경건성마저 겸비하고 있어 책 전체가 학문의 차원만으로는 평가할 수 없는 성과를 이루고 있었다.
로이드 존스는 한 서평에서 말하기를 “진리에 대한 워필드 자신의 지식과 경험 그리고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그의 지식과 경험은 우리가 누리는 큰 구원의 영광과 경이에 대해 대다수 저자들에 비해 더 깊은 감동을 줄 정도”라고 했다.
나중에 영국으로 돌아간 그는 곧 “(워필드) 전집 10권 원본을 구입하여 자랑스럽게 소장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위필드 저작을 통해 받은 감동과 영향력은 다른 서적들을 능가하였다. 로이드 존스는 이 시기 자신의 사상과 사역 발전을 다른 누구보다도 위필드의 공으로 돌렸다.
지금까지 로이드 존스는 주로 전도설교를 기반으로 명성을 쌓아 왔다. 이때까지 그는 성향도 지적이었고 목회자로서도 주로 지적 훈련만 해왔지만 교리적 가르침이나 현대 신학의 오류에 맞서 신앙을 변증하는 일에는 뚜렷이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 누구도 그를 가리켜 ‘신학자’나 ‘교사’라고 하지는 않을 터였다. 심지어 처음 설교를 시작했을 즈음 그는 교리의 정확성을 까다롭게 따지고 드는 걸 공공연히 비난한 적도 있었다. 그가 성경에서 가장 좋아했던 책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이었다.
우리의 믿음이 바울 서신보다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와야 한다는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을 배격하기는 했지만 그의 사상과 가르침에서 바울이 가르치는 요소들은 이후와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아직 미미했다.
그런 그에게 위필드는 교리를 가르쳐야 할 필요성에 대해 새로운 통찰을 주었다. 복음 전도자 역할을 그만두지는 않았지만 이제 그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요구된다는 강한 확신에 이르게 되었다.
낙스 신학교 도서관에서의 ‘발견’은 지대한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앞으로 그가 워필드에 대해 하는 말들은 자신의 사역을 잘 설명해 주는 말일 수 있었다. “그는 개혁주의 신앙을 주장하기만 하지 않았다. 이를 주장함과 동시에 다른 모든 신학 체계나 특정 분파의 신학 체계에 대한 개혁주의 신앙의 우월성을 보여주었다.”
- 이안 머리, 『20세기 최고의 설교자 마틴 로이드 존스』, pp 284-2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