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로이드 존스, '에베소서 강해', 2권, 8장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사' (김영희)

강대식 2021. 6. 28. 11:08

8 장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사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2:4-7)

 

- 우리의 고통의 대부분은 우리가 이중적인 실패를 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죄의 깊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우리 구원의 높이와 영광과 위대성을 인식하는 데 실패한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죄사함을 받는다는 차원에서 생각하고 만족해한다. 그 점에서 머문다는 것은 비극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들로서 자기들에게 진정으로 해당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이해하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는 우리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 것이 그리스도의 연합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인도하는 첫 번째 요점은 중생이다.

 

- 두 번째 단계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일으키셨다고 말하고 있다.

사도의 논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심을 받으실 때 육체적으로 우리 주님에게 일어났던 그 일과 영적으로 우리에게 해당되는 일이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님에게 일어난 것이 무엇인가를 명심해야 한다. 주님은 죽어 무덤 가운데 있었으며 사망의 영역에 있었다. 그는 사망의 상태와 장소에서 벗어났다. 그는 이제 다른 영역에 계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 그는 40일 동안 택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다. 그런 다음 하늘로 올라가셨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우리의 구원은 바로 그것에 비유할 수 있다. 우리 주님께서 존재하고 계셨던 영역 속에서 이러한 완전한 변화가 있었다. 살아나시고 자신을 나타내시되 새로운 방식으로 나타내셨다. 바울은 바로 그것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인들인 모든 사람들에게 관한 진리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함으로 인해서 그리스도에게 일어났던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다. 에베소 사람들이 이해하기를 바라는 것은 영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일으키신 이 동일한 능력이 믿는 우리 속에도 역사하고 있으며 우리 안에서 이 놀라운 사역을 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 이것은 그리스도인에 관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가?

이 점을 알아내는 가장 훌륭한 방식은 로마서 6장에 비추어 보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어느 서신이든지 그 서신에 관한 가장 훌륭한 주석은 사도 바울에 의해서 쓰여진 다른 여러 서신들 모두를 읽어 보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바울 서신들 가운데 어떤 하나라도 주의 깊고 철저하게 연구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시간을 드린다면 여러분은 기독교 교리의 전체 윤곽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1. 소극적인 국면

1) 그리스도인은 정의상 더 이상 영적으로 죽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영적인 무덤에 있지 않다. 전에는 죄와 허물로 죽어 있었고 영적인 무덤에 처하여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인 우리가 그곳에서 나오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나오듯이 우리도 무덤에서 벗어났다. 우리는 더 이상 그 영역에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근본적인 변화요 가장 심오한 사실이다. 그것은 죽음과 생명의 차이요, 무덤에 있는 것과 세상에 나와 자유롭게 행보하는 것의 차이이다.

 

2) 이 사실은 우리가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지 않다는 것과 더 이상 정죄 아래 있지 않다는 적극적 증거이다. 예수는 우리의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4:25)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담당하시고 그 형벌로써 죽음을 당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제물을 만족하게 열납하셨다는 것의 대답은 부활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망과 죽음의 영역에서 벗어나서 다시 나타난 것은 하나님께서 죄가 완전히 심판 받았음을 만족하게 여기셨다는 절대적인 증거이다. 이 점은 분명히 우리에게도 똑같은 힘을 가지고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 너희도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라!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5:1-2),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8:1) 우리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서 무덤에서 나왔으며 죽음과 모든 관계를 청산하였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 진리를 알아야 한다. 또한 그 확신을 누려야 한다. 여러분 속에 있는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연합했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살아났기 때문이다. 확신에 대한 제 일차적 기초는 그것을 믿고 그것이 진리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더 이상 어떠한 정죄도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는가? 더 이상 오는 형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가?

 

3) 우리는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라는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 모든 사람들은 율법 이래 태어났다. 우리를 도전하고 우리에게 직면하고, 실패 때문에 우리를 도전하는 하나님의 율법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율법으로 처리하신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 우리는 은혜 아래 있다. 물론 그것은 우리가 더 이상 도덕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이상 법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데 의미가 있다. 그것은 인격적인 관계이다. 이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 물론 선한 아버지라면 아들이 양육을 받아야 하며, 역시 어떠한 법에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순전히 법적인 형식으로 다루신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그 영역에서 건짐을 받은 것이다. 율법이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완전하게 필요한 충분한 형벌을 집행하였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더 이상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요구를 할 수가 없다.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새로운 관계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4)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함으로 인해서 우리는 지금 죄에 대하여 죽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6:1-2),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니”(6:6) 그것은 분명히 우리가 완전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가 죄 없는 자라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다시는 죄 짓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요일1:8)

그 말의 의미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그것은 더 이상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전에는 죄에 의해서 조종을 받고 있었고 지배를 받고 있었고 마음과 몸속에 있는 정욕들과 욕심에 의해서 여러 방식으로 통제를 받고 있었다. 우리는 바로 그 죄의 체계에 대해서 죽었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6:14)

 

우리는 더 이상 죄와 허물 안에서 행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곳에서 해방되었다. 여전히 유혹에 굴복할 수도 있고 죄의 충동에 반응을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죄에 대해서 노예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더 이상 죄에게 통제를 당하지 않는다. 그것이 원리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그와 함께 살아났고 더 이상 죄와 율법과 사망의 체제에 속해 있지 않다. 유혹과 죄를 구별할 수 없어서 이 점을 깨닫지 못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다.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는 악한 사상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여전히 죄의 체계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그 사상들은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물론 몸속에 죄의 경향이 남아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체적인 자세가 완전히 달라짐을 깨닫는다. 더 이상 거기에 투쟁이나 싸움이 없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결정적인 전투로 인해서 전체적인 상황과 소유권이 바뀌었다. 우리는 더 이상 죄 아래 있지 않고 죄에 대해서 죽었으며 죄의 지배와 통제라는 문제에 있어서 거기서 벗어났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던 것은”(6:6) 바울은 우리가 그것을 안다고 말한다.

 

옛사람은 아담적인 사람이요 아담 안에 있었던 사람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을 때 옛사람도 역시 죽었다. 나는 새 인류의 일원이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더 이상 나를 아담 안에 있는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같은 인격을 가지고 있으며 여전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새롭고 다른 사람임을 안다. 나의 전체적인 지위와 또 신분이 달라진다. 여전히 내가 육신 안에 있으나 새 인류의 일원이 된 것이다. 바울이 우리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하는 의미가 그러하다.

 

나는 더 이상 진노 아래 있지 않다. 하나님의 율법 아래 있지 않다. 더 이상 죄의 지배 아래 있지 않으며 사탄의 지배 아래 있지 않다. 그것은 내가 더 이상 아담에 속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단순한 그리고 일차적인 그리스도인에 대한 진리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다라는 사실에 대한 소극적인 국면이다.

 

2. 적극적인 국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누고 있으며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같이 된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6:11)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기 때문에 지금은 하나님께 대해서 살아 있다. 자연인은 하나님께 대해서 죽어 있다. 그는 마치 하나님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세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서 영원토록 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한하고 절대적인 어떤 것에 대해서 깨어나게 된 것이다.

 

1) 하나님께 대해서 살았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새로운 자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더 이상 하나님께 대해서 원수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을 소원한다.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이 사랑이시며 자비하시고 긍휼을 띄고 계시는 분이며 선하신 분임을 알게 되었다. 더 이상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고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온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피하려고 나무 뒤에 숨으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을 뵈올까”(42:1-2)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사망에서 생명으로의 변화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변화이다. 그것은 본질적인 변화이다. 전에는 심히 두려워하였고 무서워하였던 분을 지금은 소원하고 있다니!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그리고 참된 그리스도인의 가장 위대한 소원은 하나님께 더욱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그는 새로운 본성을 가지게 된다. 이 새로운 본성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특징이다.

 

2) 하나님께 대해서 살았을 뿐만 아니라 새생명 가운데서 행하고 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해 완전히 대조를 이룬다. 사도는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4:24)라고 말한다. 그는 더 이상 죄와 허물 가운데서 행하지 아니하고 이 전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살고 있다는 것이며, 또한 더 이상 육체와 육체의 원하는 것들에 의해서 지배를 받지 않으며, 이 새로운 사고방식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마음속에서 또한 심정 가운데 의지 가운데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은 새 마음을 가지고 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12:2) 그는 모든 것을 다른 방식으로 보게 된다. 더 이상 시간의 차원에서만 생각하지 않으며 영원의 차원에서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 세상은 잠깐이요 지나가 버리는 인생임을 안다. 이제 그는 영의 차원에서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그 세상에다 다 쏟아 놓는다. 그것은 전적으로 몸과 이성적인 것에 의해서 묶여져 있는 삶이요 사고방식이며 그것을 초월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사고세계 안으로 들림을 받아 그의 가치 기준을 전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사물들을 평가한다. 어느 것이든지 그것이 그에게 가져올 어떤 유의 즐거움이 아니라 그것이 그의 영혼에 어떠한 가치를 가지고 있느냐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한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관계에 어떻게 작용하느냐? 그는 모든 것을 새로운 가치기준을 가지고 있다.

 

명백한 또 다른 것은 성경에 관심을 가지고 모든 책들보다 성경을 우선하여 놓게 된다. 이것만이 그를 하나님께 인도하고 하나님의 생명을 더욱더 누리게 하는 오직 유일한 책임을 인식한다. 그의 마음은 이 책을 기초로 해서 작용하기 시작한다. 또한 자기의 시간을 묵상하는 데 점점 더 바치게 된다. 자신과 하나님과 영광과 영원에 대해서 생각한다. 자연인은 결코 하지 아니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묵상이다.

 

새 마음의 표증들은 전적으로 새로운 소원을 가진다. 그의 최대의 관심은 의를 위한 것이고 참된 경건이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51:10) 그것이 그의 최대의 소원이다. 그는 죄 때문에 슬퍼한다. 그는 이제 죄의 결과로 따라오는 고통을 귀찮은 것이나 성가신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는 이제 죄는 단순히 율법을 범하는 것이 아니고 그처럼 사랑하사 자기의 독생자를 내주신 하나님을 향하여 범죄하는 것이라고 안다.

 

새로운 사람은 기도할 소원을 가진다. 하나님과 친밀해지기를 어찌나 바라든지 어떤 다른 것보다 하나님과 대화할 시간을 가지게 된다.

그는 성도들과 교제를 가지기를 원한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라고 사도 요한은 말한다.(요일3:14)

또한 밖에 있는 자들을 향해서 연민을 느끼면서 그들의 영혼에 관해서도 관심을 가진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의지를 새로운 방향으로 행사한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이제 그의 문제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가가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서 어떠한 것을 소원해야 하나? 나를 향한 그리스도의 뜻은 무엇인가? 이러한 것들이 이제 그들이 소원하는 것들이다.

 

-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이지와 마음과 의지에 있어서 달라진 것이다.

여러분은 일으키심을 받았는가?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났는가? 여러분은 하나님께 대해서 살아 있는가? 여러분은 하나님을 소원하는가? 매우 사활을 좌우하는 질문들이다.

 

사도 바울의 권면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너희들도 죄에 대해서도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길지어다”(6:11)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