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8 주일설교, '하나님의 그리스도', 눅 9:20-26
2021-11-28 주일설교
본문: 눅 9:20-26
제목: 하나님의 그리스도
1. “주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나님의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뜻이다.
주님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약속된 메시야, 만왕의 왕이시라는 것이다.
마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로 기록하였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그분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 메시야인 것이다.
이를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주님 말씀하셨다.
그 권위 있는 가르치심과 행하신 기적들을 그들은 삼년 동안 보면서 확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보면서도 사람들은 죽은 세례요한이니, 엘라야니,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여겼다.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신 것은 모든 일은 때가 있기 때문이다.
부활로 완전히 증명되기 전까지는 감추어져야만 했다.
주님의 부활 후 베드로는 첫 설교에서 성전이 울리도록 외쳤다.
그가 그리스도시라는 것이 온전히 선포되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2:33)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들의 기록과 고백을 보면서도,
아직도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성경대로 못 믿고 훌륭한 인간 예수 정도로만 여기는 자들이 있다.
대놓고 말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 심중에 확신을 못하는 자들이 그들이다.
알게 하시는 이는 혈육이 아니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영적인 것은 오직 성령으로만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속에 든 것이 오직 육신의 것이고 영의 역사는 없기 때문이다.
교회는 베드로의 이 신앙 고백 위에 서 있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카톨릭은 베드로 위에 세웠다고, 교황은 그 후계자라고 한다.
음부의 권세가 지배하는 교회는 지금도 그러하다.
주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는 신앙고백의 내용과 의미가 확실하지 못하다면,
그의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미 삼켜버리고 이겨버린 교회이고,
확실하다면, 그 교회는 주님이 세우셨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이다.
비록 교황주의자들이 참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불태워 죽였어도,
그들은 지금 천국 주님의 보좌 옆에 있고, 교황주의자들은 지옥 험한 곳에 있을 것이다.
제도권 종교를 장악한 지도자와 무리들은 항상 착각 속에서 거짓 평안과 형통을 누린다.
2. “인자가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왜? 하나님의 그리스도가 오신 목적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율법이 정한 대로 죄의 삯은 사망이요, 피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
구약에서는 짐승의 피로 대신했지만, 그것이 사람을 온전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 짐승의 피는 주님이 단 한번의 영원한 제사로 피 흘리실 것을 예표한 것이었다.
그리스도가 죽으신 육체로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휘장을 가르셨고,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보좌 앞에 어느 때나 담대히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우리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기도하는 것이다.
누구에게? 고난 받고 죽으심을 당한다고 하시는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서라고 하신다.
그들은 제도권 유대교를 장악하고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다.
그들도 메시야를 기다리고 기도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고난 받는 그리스도’는 못 보고 ‘영광의 그리스도’만 보고 기다렸다.
그들은 로마 식민지에서 해방되고 세계를 다스리는 왕중의 왕, 메시야를 기다렸다.
그런데 개신교도 제도권 종교가 된 이후에는 항상 그 대표자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
장로들은 그대로 장로들이고, 대제사장들은 대교단 대형 교회 목사들쯤 될 것이고,
서기관들은 유명 신학대학 교수들로 보면 맞을 것이다.
초대교회로부터 그 전통과 가르침을 이어받지 않는 교회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유대인들처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있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저주 받을 짓을 하고 있다.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의 경건서적들이 유산으로 남겨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절대로 그들의 책을 보거나 가르치지 않는다.
그에 속한 교회 교인들도 사도의 전통을 잇고 있는 그들의 책을 결코 읽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신앙 생활 교회 생활 잘 하고 있다.
성령의 지혜로 가르치는 성경해석과 사람의 지혜로 가르치는 성경해석의 차이를 모르니까
다수의 힘과 큰 교단, 큰 교회 세력의 힘만 믿고 천국행 티켓을 따논 당상으로 여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다수를 위해 죽으시지 않으셨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벧전1:2)만을 위해 죽으셨다.
하나님 아버지가 창세전에 미리 아신 자들은,
성령께서 거듭나고 회심하고 거룩하게 하셔서 순종하게 하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하기 위해 택하셨다.
그들만을 위해서, 그리스도는 피를 흘리셨다.
이 세 조건에 해당되지 않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피와 아무 상관이 없다.
중세 카톨릭은 참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으로 몰아 수십 수백만 명을 죽였다.
현대 교회는 교회만 오면 구원 받는다고 속여 대교단들을 이루고 멸망으로 인도하고 있다.
주님은 제자들의 신앙고백이 확실해진 것을 보고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 비로소 말씀하셨다.
지금도 주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확실하지 못한 사람들은,
주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의미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새 포도주는, 왜?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지, 이해도 못하고,
그저 익숙한 헌 부대에 담긴 묵은 포도주 맛에 그냥 취하고 있을 뿐이다.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만이 모여들 것이다.
3. “나를 따라오려거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하는 자들만이 자기가 죽은 자기 십자가를 날마다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다.
떡만으로 살며 오직 자기 왕국의 영광과 출세를 위해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은,
결코 자기를 부인하기는커녕, 자기를 주장하고, 강화시켜야만 할 것으로 여긴다.
현대 심리학이 권장하는 것이 자기 강화요 자기 존중이다.
자존감이 약해서, 자기가 너무 약해서, 뭘 몰라서 이 모양 이 꼴이라는 것이다.
기독교와는 결코 공존할 수 없는 상담학이 교회 안에 만연하다는 것, 뭘 말하는 것인가?
상담학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부인하고, 절대 자기가 죽으면 안 된다.
참 기독교, 참 교회, 참 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가 죽은 자기 십자가를 매일 지고 주님을 따른다.
성령으로 거듭나고 회심한다는 것은 옛 자기가 죽는 것을 의미한다.
옛 자아는 죽고 새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다.(born again!)
그럼에도 우리의 옛 자아는 살아나기 때문에 매일 자기 십자가를 져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날마다 나를 쳐 복종시키노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져야,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난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져야,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난다.
우리는 보배이신 그리스도를 질그릇에 가졌을 뿐이다.
이는 심히 큰 능력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의미한다.
그분의 심히 큰 능력으로 우리는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해도 싸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
내가 약한 그때에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이 내게 머물며 강해진다.
하나님의 능력은 내가 약한 데서 온전히 역사하실 수 있다.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심은,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10)
하나님이 우리에게 긴 광야의 고난 길을 주시는 것은, 나를 강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낮추시고 주리게 하셔서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할 때 모든 것을 주신다.
나의 나라와 나의 의를 먼저 구할 때는 모든 것을 잃게 하신다.
내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해로, 배설물로 여기고 버릴 때,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발견되고, 그리스도를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이 마침내 복을 주시는 것은 내가 광야 길에서 다 낮아지고 죽었을 때이다.
내가 나를 위해 보물을 땅에 쌓아 놓았을 때가 아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리고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한다.
자기 부모 처자 형제 자매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제자가 되지 못한다.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주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주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
매일 자기 강화에 힘쓰고 소유를 늘리고 바벨탑을 높이 쌓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하는 사람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 뿐이다.
종교적인 행위, 종교 활동 많이 한다고 주님과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목숨도 소유도 버리지 못하면, 주님의 제자가 능히 될 수 없다.
제자가 되지 못하면 구원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제자 수준의 믿음과 일반 수준의 믿음이 따로 있는 줄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특출한 사람들만 제자가 되고 다수 일반은 다르다고 여기다가는 큰 일 난다.
다른 것은 제자들의 행위와 공적에 따라 주는 상급이지, 제자 되는 믿음은 다를 수 없다.
4.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나는 주님과 주의 말씀을 부끄러워한 적 없는데요,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하고 있는 사고방식과 가치관과 행동이 그것을 나타낸다.
바리새인의 누룩과 사두개인의 누룩에 젖어 있다면 그는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고 있다면,
그는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을 가르침으로, 주와 주의 말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가르치심을 모르고 오직 사람의 지혜로만 가르치고 배우고 있다면,
그는 주와 주의 말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1:9)
복음은 주님과 주님의 말씀이다.
이 복음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지 못하고 있다면
그는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자이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받는 고난을 모르고 있다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고, 불뱀과 전갈이 있는 광야를 통과하는 것을 모르고 있다면,
그는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자에 속할 뿐이다.
우리 주님이 자기의 영광, 아버지의 영광,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다시 오실 때에
주님은 그 사람을 부끄러워할 것이다.
다시는 주님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유황불 타는 캄캄한 곳으로 가게 된다는 것이다.
사도들의 가르침과 제자의 삶을 이어받은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의 경건서적을 꼭 읽으시라.
읽으면서 내가 다니는 교회의 가르침과 같은지 다른지 그 차이와 구별에 눈을 뜨라.
하나님을 힘써 ‘아는 것에 자라야’ 하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야 한다.
이를 알기 위해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있는 나를, 한심하고, 부끄러운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