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주일설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막 2:21-22
2022-01-30 주일설교
본문: 막 2:21-22
제목;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오늘 본문을 이해할려면 앞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예수님은 오셔서 공생애 동안 세리와 죄인들을 가까이 하셨다.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랐다.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다.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 예수를 따름이었다.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이를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다른 하나는, 금식에 관련된 사건이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하고 있었다.
그들이 물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이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그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오늘 본문이다.
1. 생배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다
낡은 옷은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이 지켜온 전통이다.
그들은 이 낡은 전통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였다.
이 낡은 전통에 의하면 나름대로의 기준으로 의인과 죄인은 구별이 되었다.
그들은 계율을 지킴으로 의인들이었고 세리와 창녀들은 대표적인 죄인들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셔서 의인인 바리새인들이 아니라,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하셨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아 식사를 한다는 것은 그들의 전통상 도저히 용납될 수 없었다.
예수님은 진리의 최종 확정으로 오신 분이시다.
그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셨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이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다.
하나님만이 그의 선택하시는 사람들에게 그의 진리의 명확성을 주시며,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저들의 심령 속에 이것을 인쳐 주신다.
신앙의 신비란, 이처럼 성령으로 말미암아 진리를 명확하게 습득하는 것을 말한다.
참된 신앙은 항상 부귀영화와 같이 가시적으로 현상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고
진리의 교훈과 같이 풍성하고 충만하지만,
결코 가시적으로 표현하여 드러낼 수 없는 무한한 은혜를 추구하는 것이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모든 날 마지막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함께 종말의 때를 말한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은 최종적으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종결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에 관한 신약성경의 말씀을 끝으로 더는 계시가 없다.
이 사람 저 사람을 통해 예언에 예언을, 계시에 계시를 더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너희가 유대 전통을 통해 계명과 그 해석을 들어왔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고 가르치셨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마5:21-22)
율법을 페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 오셨다고 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셨다.
유대인이 가르친 전통은 낡은 옷과 같았고,
주님의 완전한 가르침은 생베와 같았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하셨다.
생베를 낡은 옷에 붙이거나 기울 수 없음을 말씀한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은 낡은 옷이요 낡은 가죽부대이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하는 것은 생베요 새 부대이다.
병든 자에게라야 의원이 필요하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 때문이다.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하는 것은 낡은 옷이고 낡은 가죽부대이다.
신랑의 빼앗긴 날에 금식하는 것은 생베요 새 부대이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다.
예수님이 병자와 맹인과 귀신들린 자를 고쳐 안식을 주는 것은 보이지 않고
안식일 범한 것만 보이는 것이 낡은 옷이요 낡은 가죽부대이다.
2. 새 포도주는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다.
예수님이 오셔서 유대 전통의 가르침에 속하여 그들을 따랐다면,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낡은 옷, 낡은 가죽 부대는 사람들이 오래 입고 오래 넣어둔 부대라 익숙하고 친하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르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사람들을 사로잡은 것일 뿐이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면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것이 된다.
낡은 옷, 낡은 가죽부대가 바로 다른 복음이요 다른 예수요 다른 영이다.
성령께서 새롭게 하고 거룩하게 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 만든 전통이다.
이 낡은 옷 낡은 부대가 이스라엘의 사사시대 왕정시대를 지배하다 멸망케 하였다.
중세 천년도 이 낡은 옷, 낡은 부대가 암흑시대로 만든 것이다.
종교개혁이후 5백년 개신교 역사도 사람이 만든 지혜와 전통으로 만연해 가고 있다.
새 포도주는 헌 부대에 넣는 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진리가 새 포도주인 것을 모르는 것이다.
성경을, 성령의 가르친 지혜로, 사도와 선지자들이 가르친 전통으로,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참으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하면, 이전 것에서 새 것으로 회심하지 못하면,
내가 따르는 가르침이 낡은 옷, 낡은 가죽 부대인 줄을 알 수가 없다.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만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2:13)
이 말씀이 성령의 인도와 조명으로 깨달아져야만 한다.
낡은 옷 낡은 가죽 부대에 취해 사는 사람들에게는
생베 새 포도주는 낯설고 위험하고 해롭게 보인다.
그래서 낡은 가죽 부대 이스라엘은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그래서 로마 교회는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고 사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학살했다.
이단으로 몰고 십자군을 동원하여 대학살의 만행을 저질렀다.
제도권으로 정착한 종교는 항상 낡은 가죽 부대 그 이상일 수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길이 넓어 그리로 가는 자들이 많다고 하셨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하셨다.
이스라엘 역사와 기독교 역사는 그 사실을 여실이 증거하고 있다.
눈을 감아서 귀가 어두워서 보지 못하고 듣지를 못하는 것이다.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
역사를 모르면 현실에 안주하고 우물 안에 개구리가 될 수밖에 없다.
3.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하셨다.
이 모든 것은 성경이다.
문제는, 성경의 해석이다.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성령이 가르치신 해석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새 포도주이다.
새 포도주는 성령의 인도와 조명을 따라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의 경건서적에서 만날 수 있다.
새 부대는 성령으로 거듭나고 회심하는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눈을 떠서 어둠에서 빛으로, 모든 것에 대한 관점과 해석이 대전환을 이루지 않았다면
그 사람의 회심은 의심쩍은 것이다.
이 새로운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어야 한다.
이 모든 날 마지막 아들을 통하여 완전하게 말씀하신 진리로,
사도들이 초대교회에서 성령의 지혜로 가르친 전통으로, 돌아가는 것이,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는 것이다.
사사시대 이스라엘, 왕정시대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묵은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은 것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중세 천년이 암흑시대가 된 것도 묵은 포도주 낡은 부대로 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숫자와 세력과 그 권력으로 불의로 진리를 막았다.
참 교회와 참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다.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하였다.
제도권 종교는 항상 묵은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은 자들이 장악한다는 것,
그들이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은 자들을 핍박하고 없앨려고 한다는 것,
오늘날도 교회는 여전히 그러하다는 것을 알고 깨달아야 만 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고 산 사람들이 계곡의 사람들 곧 발도인들, 그리고 위그노들이었다.
그들은 성령을 통하여 가르침을 받은 첫 세기의 믿음의 비밀을 따랐다.
사도의 가르침을 보존하고 순교를 마다하지 않고 전달하였다.
그들은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기 위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주야로 가르치고 배웠다.
매일 밤마다 밤을 세웠다고 한다.
학교나 신학교를 졸업한 계곡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예수 그리스도보다 교황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하기 위하여 떠나갔다.
이들은 알바인들, 툴루스인들, 피카르디인들, 레온인들, 페트로브뤼인들, 앙리인들,
카타르인들, 때로는 이단 아리우스파, 마니교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곳곳으로 흩어졌다.
그곳에서 ‘하나의 거룩한 교회’를 지켜 나갔다.
발도인들은 가는 곳마다 학교를 세웠는데, 파도바 교구에 41개, 크로아티아의 라백에 10개,
롬바르디아, 프로방스 및 여러 왕국의 여러 도시에
로마 교회의 신학교보다 더 많은 학교를 갖고 있었다.
‘가르쳐 지키게 하라’ 주님의 말씀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
그들은 공개적으로 토론했으며, 시장이나 넓은 들판에서 열리는 엄숙한 모임에 사람들을 초대했다.
진지한 논쟁으로 사람들을 설득했고, 들판과 홀, 지붕에서도 설교를 하였다.
핍박을 피해 알프스 산맥을 넘어 스위스로 피하기도 했지만,
그 안전함을 뿌리치고 다시 알프스를 넘어 계곡으로 돌아와 이 신앙을 지키고 보존하였다.
이 계곡의 순교자들을 통하여 개혁자들이 나오고 청교도들이 이어진 것이다.
루터는 1533년 출판한 ‘발도인들 신앙고백서’ 서문에서 자신이 교황주의에 빠져 있을 시기에
발도인들은 영벌을 받아야 될 무리라고 판단하고 미워했음을 솔직히 인정했다.
교황은 이 선한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함으로 큰 학대를 저질렀지만,
자신은 그들의 신앙 고백과 신앙 서적들을 접한 후,
그들이 거룩한 순교자로서 칭송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하였다.
“발도인들은 모든 인본적인 교리들을 내버리고 주의 법에 능력이 있음을 알았으며,
주야로 성경을 묵상한, 성경의 특별한 전문가들이었으며, 성경에 매우 정통한 사람들이었다.
반면에 로마 교회의 고위직들은 성경을 무시하거나 성경을 전혀 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루터는 발도인들의 신앙 고백을 접한 후 발도인들에게 큰 빛을 비추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하였다. 이렇게 발도인들에 대한 모든 의심들이 제거되었고,
영혼의 유일한 목자와 감독이 되시는 그분께서 ‘하나의 양떼’로 모으셨음을 확인하였다.
개혁자 하인리히 볼링거도 1530년 “계시록 설교” 서론에서 발도인들에 관해 말했다.
“400년 그 이상 동안 프랑스, 이탈리아, 게르만, 폴란드, 보혜미아와 기타 여러 국가에서
발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했고, 그들의 신앙 고백은 계속 이어왔다.
그들은 로마 교회와 교황을 비판했고, 그로 인해 결국 다양하며 잔인한 고통을 당하였으며,
영광스러운 순교에 이르렀다. 발도인들은 지속적이고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전파하였다.
교황의 강요 때문에 왕들과 영주들은 군사력으로 매번 그들을 제거하려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노력들을 허사로 만드셨기에 그들은 결코 멸절되지 않았다.”
이렇게 길게 개혁자들의 글을 설교에서 인용하는 것은,
참 교회의 맥을 이어온 발도인들에 대해 우리가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안타까움과 반성에서
이제라도 알리고 싶어서이다.
이들은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며 주께 받은 사명
곧 은혜의 복음을 알고 살고 증언하기 위해 헌신하였다.
이들이야말로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은 산 표본들이요 모범들이었다.
이들이 없었다면, 개혁자들과 종교 개혁도 없었고, 청교도도 없었고,
오늘날까지 초대 교회의 전통과 가르침은 이어져 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들을 본받고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을 본받아 참 신앙의 길을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