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발도인들이 그들의 계곡에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종교의 자유를 쟁취하다/ 권현익
마침내 발도인들이 그들의 계곡에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종교의 자유를 쟁취하다/ 권현익
마침내 1694년 5월 23일 사부아 공작 빅토르는 공식적으로 발도인들이 그들의 계곡에 교회를 다시 세울 수 있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칙령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재건은 오랜 시간이 걸렸고 힘겨웠다. 이때 워터루 전쟁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잉글랜드 장군 찰스 베크위드가 큰 도움을 주었다. 그는 발도인들 계곡을 방문하여 큰 감동을 받아 계곡으로 이주하였고, 그곳에 영구 정착하였다. 그는 발도인들의 아이들을 위한 많은 학교를 지어 주었고, 발도인들 학생들이 스위스 대학에 입학할 수 있도록 개인적으로 학비를 지원하였다. 그는 1862년 토레 펠리체 계곡의 자신의 집에서 사망하였으며, 오늘날까지 발도인들의 영웅으로 남아 있다.
튀랭 출신의 이탈리아 왕 카를로 알베르토 사르데냐는 계곡을 방문하였을 때, 발도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그들을 향한 존경의 표시로 토레 펠리체에 분수대를 설립한다. 그리고 1848년 2월 17일에는 카를로가 해방 칙령에 서명함으로 발도인들에게 시민권 회복과 종교의 자유가 완벽하게 주어진다.
1831년 윌리엄 질리는 복음을 위해 박해를 받으면서도 굴복하지 않고 끝끝내 자유를 쟁취해 낸 이 소중한 발도인들의 역사를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 그 현장의 모습을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판화로 담아 ‘Waldensian researches during a second visit to the Vaudois of Piemoni’을 출판한다. 그 책을 보게 되면 발도인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진리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수고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필자가 발도인들이 거주하였던 계곡 전체를 방문하였을 때, 세 가지 사실에 큰 감동을 받았다. 첫째, 오늘날까지도 잘 정비되어 있지 않은 비포장길의 끝, 더 이상 사람들이 살 수 없다고 판단이 드는 그런 깊은 골짜기에 발도인들은 신앙을 위해 그런 곳에 정착하여 교회를 세웠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둘째, 스위스에서 안락함을 포기하고 영광의 귀환을 결정한 선조들의 숭고한 결단이 헛되지 않고 열매를 맺어 각 계곡마다 발도인들의 교회가 세워졌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셋째 교인들을 수용할 수 있는 예배당의 규모에 놀랐다. 화려한 건축 양식이나 내부의 사치스러운 공간들은 일체 없지만, 예배당을 다 채울 정도로 계곡마다 발도인들로 가득 찼을 것을 상상할 때였다.
- 권현익, 『16세기 종교개혁 이전 참 교회의 역사』, pp 316-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