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도인들과 루터, 칼뱅과의 관계, 화형 당하는 목사들의 신앙 고백/ 권현익
발도인들과 루터, 칼뱅과의 관계, 화형 당하는 목사들의 신앙 고백/ 권현익
신학자 요하네스 에크는 루터를 향하여 “그는 오래 전에 정죄받았던 알비인들, 위클리프, 후스의 이단 사상을 새롭게 드러냈을 뿐이다”라며 비난하였다. 리옹의 역사를 기록하였던 클로드 루비는 “루터의 주요 사상적 원리들은 이단 발도인들의 교리적 기초에 충실한 발도인들의 유산에 불과하다”고 말하였다.
겐트 주교 린다누스는 1560년경 로마 교회의 교리를 변호하는 자신의 책에서 “장 칼뱅은 발도인들의 교리를 상속했다”고 밝혔고, 연대기 학자인 예수회의 피에르 고티에(1685-1749)는 도표를 작성하면서까지 발도인들과 칼뱅의 교리가 서로 일치함을 증명하기도 하였다. 아이네아스 실비우스(훗날 교황 바오 2세) 역시 “칼뱅이 가르친 교리는 발도인들의 교리와 동일하다”고 선언하였다. 이 견해는 장 카르돈의 견해를 따른 것으로 그는 “주네브의 이단은 알비인들의 교리를 수용하였다”라고 주장하였다.
프랑스 유명 역사학자인 프랑수아 외드(1610-1683)는 “발도인들은 칼뱅주의자들이라 불리는 사람들과 거의 동일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예수회의 로베르토 벨라르미노는 “890년에 피에몽 계곡에서 공개적으로 가르치고 고백했던 신앙은 개혁 교회의 고백과 거의 일치한다”고 주장했고, 베네딕트회 수도사인 질베르 게네브라는 그의 저서 ‘연대기’ 3권에서 “로마 교회의 전통을 거부하였던 튀랭의 클로드와 그의 추종자들의 교리는 칼뱅주의 교리와 동일하므로 발도인들은 곧 칼뱅주의이다”고 언급하였다.
로마교회의 사제이며 독일의 역사학자 요하네스 얀센은 “칼뱅주의는 투르의 베렌가리우스, 발도인들, 피카르디인들, 알비인들, 위클리프와 같은 고대 이단들의 교리를 차용했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개신교 역사학자인 라 포플리니에르는 “발도인들의 가르침은 유럽의 모든 국가로 퍼져 나갔으며, 그들의 가르침은 오늘날 개혁 교회의 교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말하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여러 주장들을 근거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도들의 가르침이 발도인들을 통하여 16세기 종교개혁자들에게 계승되어 ‘하나이고 거룩하며 카톨릭적이고 사도적인 교회’가 세대와 세대를 이어 계속적으로 존재해 왔다는 사실이다.
발도인들 교회의 총회장을 지낸 페이랑이 “발도인들은 칼뱅의 종교개혁 길을 열었으므로, 발도인들 교회는 어머니 교회가 된다”고 말한 것처럼, 칼뱅이 역사 속에 등장한 것은 발도인들을 비롯한 선진 개혁자들의 수고와 순교의 열매라고 볼 수 있다. 그 증거로서 칼뱅은 피카르디인들이 머물렀던 피카르디의 누이용에서 출생하였고, 무엇보다 칼뱅의 회심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올리베탕이 발도인들의 바르브로 활동하였다는 점이다. 또한 신학과 관련된 칼뱅의 첫 논문이 바로 발도인들의 올리베탕 번역 성경의 서문이었다는 것에서 발도인들과 칼뱅은 밀접한 상호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보헤미아의 발도인들은 청년들의 신학 연장 교육을 위하여 알사스 지역으로 많이 보냈고, 그곳에서 그들은 활약하여 알사스 지역이 16세기 종교개혁의 중심 역할을 할 수 있는 터전이 되도록 만들어 놓았다. 또한 저지대 국가에서 활동한 발도인들은 ‘왈도인들’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데, 왈론 신앙 고백의 저자이며 순교자인 귀도 드 브레를 통하여 벨직 신경(1561년)으로 그 열매를 거두게 된다. 그의 신앙 고백은 1585년 알베르 총회에서 확인되었고, 도르트 회의에서 공식적인 신앙 고백으로 채택되었다.
칼뱅과 피에몽 발도인들 교회 간의 긴밀하며 지속적인 관계를 대변해 주는 한 사건이 있었다. 장 베누는 피에몽 계곡의 사역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하여 파송되었는데, 그는 프랑스 개혁 교회를 조직한 칼뱅의 첫 동역자였으며, 푸아티에 총회 참석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가 계곡으로 들어갈 때 앙토니 목사도 동행했는데, 앙토니는 복음을 위하여 왕실 판사직을 포기했던 인물이다. 그들은 피에몽에서 몇 개월 동안 머물면서 상황을 파악한 후 계속에 정착하기 위한 준비를 위해 주네브로 돌아갔다. 준비를 끝내고 계곡을 향할 때 장 베누의 두 친구 바타이와 토랑이 동행하였다. 앙토니의 친한 친구인 드렝갈레는 처음에는 주네브 국경까지만 동행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막상 이별의 시간이 되었을 때, 그는 “나는 너를 떠나지 않고 발도인들 계곡까지 함께 가서 구원의 도리인 개혁주의의 축복을 나눌 것이다”라고 결심하였고, 다섯 명이 피에몽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사부아 지역을 통과하기 위하여 포시니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체포되어 샹베리에 투옥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숨기려 하지 않았고, 판사는 1555년 6월 10일 긴 대화를 통해 그들을 개종시키려고 노력하였지만,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판사는 그들에게 “이단자들에게는 사형이 선고되는데 지금이라도 당신들의 오류들을 포기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였다. 그때 장 베누 목사는 “아닙니다”라고 간결하게 대답한 후 “우리 주님으로부터 처음으로 배운 것은 그분을 따름에는 반드시 핍박이 따른다는 사실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판사는 또다시 “그렇다고 주님께서 죽으라고 명령하신 적은 없지 않는가?”라고 묻자 베누 목사는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또 다시 판사가 “너는 매우 젊은데 네 인생도 돌아봐야 하지 않는가?”라고 말하자 “우리 앞에 놓인 삶은 천국에서의 삶입니다. 우리의 이 간절한 소망을 당신이 없앨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또 다시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대담하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말하자 “죽어야만 그 삶에 이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판사는 그들로부터 조금의 신앙적 양보라도 얻어 내려고 노력했지만, 그리스도의 용감한 제자들인 그들의 마음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두 목사는 세속 재판소로 넘겨졌고, 1555년 8월에 갤리선 노예형을 선고받았다.
왕의 대리인(검찰총장)은 이 사건을 다시 재판하라고 명령하였고, 재판이 진행될수록 그들에 대한 존경심은 더욱 커져 판사는 마지막으로 앙토니 목사에게 “주네브에서 평온하게 살면서 자유롭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해 주겠다”며 개종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거부했고, 결국 이들 모두에게 산 채로 화형이 선고되었다.
칼뱅은 그들에 관하 소식을 접하고, 곧바로 샹베리 감옥에 있는 그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서신을 보냈다. “당신이 순교적 소명을 다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전에도 그러했듯이 계속 그 소명을 다해 주십시오. 당신이 비록 계곡으로부터 아주 먼 곳에 있을지라도 당신을 통해 맺게 될 순교의 증거들은 발도인들에게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당신의 하나님께서는 동료들의 외침이 도달하기 전에 감당할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들은 사형 집행 날짜를 알지 못하였기에 자신들을 순교자로 합당하게 여기신 하나님께 감사하자고 서로를 격려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 날 아침 감옥 밖으로 불려 나갔다. 그러나 베누 목사는 저항할 수 없는 불안감에 압도당했고, 식은땀과 함께 그가 다짐했던 결심은 허물어지는 듯하였으나, 곧 하나님의 손길이 그를 붙드심으로 그는 다시 회복되어 순교에 동참하였다. 자신의 약함으로 혹 상심하였을 교우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겼다. “형제들이여, 내 약함에 마음이 상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나는 내면적으로 잠시 갈등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선하시며 자비로우신 하나님과 나의 유일한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께 나의 죄들을 고백하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유언과 같은 그의 이 편지는 라로셸 총회에서 베즈의 입을 통하여 처음으로 알려졌는데, 그들은 8월 28일에 화형당했다.
- 권현익, 『16세기 종교개혁 이전 참 교회의 역사』, PP 337-3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