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바울인들의 『진리의 열쇠』(The Key of Truth)의 요해(要解)/ 권현익
4. 바울인들의 『진리의 열쇠』(The Key of Truth)의 요해(要解)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바울인들의 교리와 삶이 담긴 『진리의 열쇠』 필사본이 발견된 것이다. 이로써 바울인들은 누구이며, 그들은 어떤 신앙과 삶을 가졌었는지 재발견하고, 그들의 역사와 신학에 대한 교회사적 평가를 새롭게 해야 할 완전히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것이다. 많은 사실들이 나타나 여러 가지 진실들이 규명되고 기존의 견해가 결정적으로 뒤집어질 계기가 당도한 것이다.
이 책 『진리의 열쇠』는 8-9세기 작성된 것으로, 11세기 메소포타미아의 공작 그레고리의 언급에 의해 그 존재가 알려진 바 있었으나 그 원본은 발견된 적이 없었다. 전량 분실 내지 소실된 상황으로 덮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1891년 옥스퍼드 대학교의 교수인 프레데릭 코니베어가 아르메니아의 에치미아진 도서관에서 『진리의 열쇠』 필사본을 발견하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두 차례의 현지 방문 끝에, 1893년 아르메니아 당국자로부터 복사본을 기증받을 수 있었는데, 이를 기초로 우선 『아르메니아 바울인들 교회의 매뉴얼, 진리의 열쇠』라는 제목의 책으로 관련 발굴 자료를 출간하였다.
(1) 『진리의 열쇠』 발견 과정
1837년 주교 가라베드가 개최한 에치미아진 회의에서 시라큰 지역의 아르크벨리 마을에 ‘25가구 정도로 추정되는 주민들이 톤락인들의 신앙을 고백하며 바울인들의 사상이 계속 전해지고 있는 현상’에 대하여 불편한 의견을 내놓은 적이 있었다.
그들의 활동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곳에 정교회를 세웠다. 그럼에도 3년 후에 톤락인들이 밤에 개인들의 집에서 세례를 주고 성찬을 행하는 것이 관찰되었다. 정교회는 이들을 이단자로 정죄하여 법원에 회부하였으나 오히려 법원은 이들에게 사면을 선언하고 톤락인들들을 석방시켰다. 공의회는 지역 행정관에게 호소하였고, 1843년 주 행정관은 톤락인들을 형법에 따라 군대로 징집하였다. 1837년 종교재판소는 아르크벨리의 조르주(톤락의 새 이름)에서 가르쳤던 “진리의 열쇠”라는 제목의 필사본이 존재함을 확인하여 입수하였다. 1838년 2월에 예레반의 컨시스토리가 성 총회에 이를 전달하여 그 내용이 공개되었고, 이를 에치미아진 도서관에 보관하였던 것이다. 원작은 9세기 아르메니아의 바울인들이 행한 세례식과 예배 규칙, 교리교육과 세례, 유아 세례, 예배, 성모 숭배, 성인 숭배처럼 정교회가 남용한 교리들과 신앙 행위들에 관한 내용이었다.
(2) 코니베어의 공헌
고대 아르메니아 언어로 된 이 필사본은 제국의 이단 사냥 기간을 지나면서 38% 정도가 찢겨 나간 채로 남겨졌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소실된 대부분이 요지를 ‘설명하는 부분’에 속해 있어서 아르메니아의 역사가들과 고문학 연구자들은 다른 자료들을 근거로 소실된 부분의 대강을 거의 복구해 냈다는 점이다. 이 책에 따르면 바울인들 공동체는 사도적 기원을 갖고 있고, 1세기 때 세워진 아르메니아 교회를 그 원형으로 하고 있다.
초대 교회의 신앙은 안디옥과 팔미라 교회를 통하여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아라랏 지역과 토로스 산맥으로 퍼져 나갔음을 설명하고 있는데, 사도적 가르침을 간직한 토로스 산맥 주변의 교회들은 바울인들이 역사 속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그 시대까지 순수한 신앙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르메니아 초기 기독교의 중심지인 타론은 바울인들이 활동하는 베이스 캠프 역할을 하였다.
애초에 코이베어는 ‘진리의 열쇠’를 연구함으로써 지금까지 알려진 바와 같이 바울인들에게서 마르키온 또는 최소한 마니교적인 요소를 발견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이 비록 구약 성경을 많이 혹은 자주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거기서 고대의 이단적 요소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고 강조하였다. 이 책의 발간으로 바울인들에 대하여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맞게 되었다.
그 결과는 참으로 엄청난 것이었다. 바울인들이 참 교회로서 소유했을 기념비적 기억들과 진실한 기록들이 모두 박탈당하고 소각되었으며, 학살과 분서라는 역사적 사실마저도 가해자들에 의해 덮이고 감춰졌으며 관련한 모든 중요한 역사적 기록들이 수집되고 소각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진리의 열쇠』가 기록된 시기에 레오 황제와 총대주교 게르마누스가 내놓았던 “바울인들에게서 신앙적 오류를 발견할 수 없었다”는 고백이 기록을 통하여 나타났고, 오히려 바울인들을 보호하라고 명령하는 편지까지도 쥐어졌다는 기록이 발굴되기에 이르렀다.
(3) 기존에 알려진 바울인들의 교리
비평자들은 바울인들을 처음부터 ‘저주의 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에, 바울인들의 교리를 일방적으로 난도질하고 확대 해석하면서 그들을 이단으로 만들어 놓았다.
바울인들 공동체가 형성되었던 지역에 원래부터 존재했던 설화가 있다.
- 선하고 악한 두 종류의 신이 존재한다. 전형적인 이원론 사상.
- 기독론. 그리스도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보내신 ‘천사’.
(4) 바울인들에 대한 새로운 평가의 기준이 된 『진리의 열쇠』
바울인들은 비잔틴 교회로부터 마니교의 영향을 받은 극히 혐오할 이단으로 정죄받았다. 그리하여 개신교 내에서도 기독교의 모든 이단 종파 가운데 극단적으로 비방을 받았고, 심지어 개신교 계통의 이단으로조차 취급되지 못할 정도로 극렬하게 무시당하였다. 그러나 바울인들이 그동안 너무나 억울하게 마니교적 이단이라는 누명을 쓰고 있음이 밝혀지고, 오히려 사도적 전통을 이어온 개신교회의 원류에 든든히 서 있었던 순교적 교회였음이 분명히 밝혀지게 되었다. 『진리의 열쇠』를 통하여 빛 가운데 드러난 놀라운 역사의 진실이다!
바울인들의 교리와 규례를 들여다보면, 이들은 구약과 신약 성경을 그들의 교리와 생활을 세우는 데 끊임없이 사용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삶의 방식이나 옷차림의 차별과 같은 방식으로 교회 지도자들과 평신도를 구분한 적이 없었다. 이런 점에 있어서는 비잔틴 교회의 실상과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그리고 주교들로 구성된 공의회가 교회의 모든 주요 사안들을 결정하는 사제 중심의 결정기관을 만들지 않았다. 또한 바울인들의 교사들에게 계서 제도와 같은 계급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고 모두가 평등한 관계를 형성하였는데, 이 모든 것들은 사도들로부터 배운 그대로 단순한 삶을 추구한 결과였다.
그들은 로마 교회의 모든 성화상 숭배를 분명하게 반대하였다. 당시 로마 교회에서는 기적을 동반한다는 성유골을 숭배하는 큰 유행이 일어났는데, 유물과 유골은 쌓여 갔으나 그들의 삶과 선행은 오히려 갈수록 더 궁핍해졌다.
그들은 삼위일체에 관한 정통 견해를 갖고 있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본성을 가지신 하나님 아들의 실체로서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을 믿고 항상 고백하였다.
이와 같은 바울인들의 교리가 전파되면서 캉브레와 아라스의 주교 제라르는 교권의 행사에 위협을 느꼈고, 1025년 아라스에서 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바울인 건덜퍼스를 이단 전파자로 정죄하였다. 그때 재판장에 섰던 그는 다음과 같이 자기변호를 하였는제, 우리에게 알려진 바와 같은 금용주의나 이원론적인 사상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아 가르치고 행하는 규율은 사도들이 전하여 준 것들과 결코 충돌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것에서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 육체적 욕심에 스스로 굴레를 씌우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의 손으로 노력한 것으로써 생계를 꾸려나가고,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며, 우리를 고발하는 일에 열심인 모든 사람들에게 오히려 자비와 자선을 베푸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 권현익, 『16세기 종교개혁 이전 참 교회의 역사』, pp 386-3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