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바울인들의 아라랏 계속의 사도적 교회들과의 교류/ 권현익
(6) 아라랏 계곡의 사도적 교회들과의 교류
바울인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계속하여 성경의 사본들을 수집하였고, 그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하면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신학적 견해를 더욱 분명하게 형성해 갔다. 그리하여 그들의 교리는 매우 성경적이었으며 그들의 삶은 어느 시대의 성도들보다 순수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한 마음으로 이해하고 단순한 삶과 가난한 삶을 실천하였으므로, 그들의 대적자들과 박해자들 가운데 있던 사람들조차도 정직하고 공정하게 평가할 수밖에 없는 장면에서는 그들의 모범적인 삶을 결코 부정하지 못했다.
바울인들이 사도덕 신앙을 갖게 된 배경과 관련하여 『진리의 열쇠』는 바울인들이 핍박을 피하여 사도적 전통을 갖고 있는 ‘계곡의 교회’로 들어가 그들과 교류하게 되면서 사도적 신앙을 접하게 되었고, 이후 대규모 운동으로 확장해 갔다고 분명하게 알려 준다. 무엇보다 계곡의 교회들과 접촉한 바울인들은 ‘분명한 성경 해석’과 ‘고대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을 접하면서 이전에 가졌던 신학적 불분명성이나 오류로부터 점차 벗어나 더욱 순전한 복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 과정을 거친 바울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가장 주요한 특징은, 그들이 성경에 매우 높은 가치를 두었을 뿐 아니라 성경을 배운 자들로서의 일관된 삶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대적들이 바울인들을 ‘아동을 살해하여 제사하는 흉악한 범죄자들’ 따위의 비난으로 고소하곤 하였으나 사실은 그들의 선행으로 말미암아 상당히 놀랐다는 기록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코니베어는 바울인들이 머물렀던 산악 지대 즉, ‘계곡의 교회’가 또 다른 역사적 의미가 있음을 밝힌다. 이 산악 지대는 모글렘 세력과 몽골 타타르족의 침공을 저지하여 로마 문명을 지키는 방어벽 역할을 했던 지역으로 기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은 서구 세속 문명사의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 중요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바울인들에 대한 편견과 이에 근거한 그릇된 증오로 동로마 제국과 비잔틴 교회는 그들을 학살하고 추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 지역을 모슬렘에게 고스란이 넘겨주는 효과를 내고 말았고, 오히려 그들에게서 초대 교회의 순수한 흔적을 제거해 보려 했던 애초의 목적은 달성하지도 못하게 되고 말았다.
코니베어는 다음과 같이 알려 준다. “북쪽 토로스 지역의 바울인들 약20만 명은 8세기에서 10세기 사이에 트라키아와 도나우 강 지역으로 강제 이주를 당하였지만, 이는 오히려 서유럽 여러 지역으로 이 바울인들을 이동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곳으로부터 바울인들은 수 세기에 걸쳐 보헤미아, 폴란드,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로 선교사를 보내게 되었고, 그들의 활동으로 훗날 잉글랜드의 청교도 운동까지도 준비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만들게 되었다.
역사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은 박해와 고난을 통하여 형성된 동방의 ‘계곡 사람들’인 톤락 바울인들을, 같은 이유와 목적으로 서방 지역에 남겨 놓으셨던 피에몽 계곡의 발도인들과 교류하게 하시고 또 그들 사이의 일치를 발견하게 하셔서 16세기 거대한 종교개혁 운동과 17세기 청교도 운동을 준비시키는 일꾼들이 되게 하셨다.
동방과 서방에서 ‘계곡의 사람들’이 서로 만났을 때에 교리적 차이로 인한 갈등이 일체 발생하지 않았던 것은, 바울인들이 톤락에서 사도적 신앙을 미리 경험하였던 것이 중요한 원인이었다.
- 권현익, '16세기 종교개혁 이전의 참교회의 역사', P 398-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