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보고밀인들-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새로운 평가/ 권현익
6) 보고밀인들에 대한 새로운 평가
기존에 알려진 보고밀인들의 신앙을 보면, 답이 없는 의문들만 점저 더 쌓여 간다.
그런 허황된 교리들과 이를 설파하는 설교와 전도로써
당시 유럽의 대중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갈 수가 있었겠으며,
당시의 정교회에 염증을 느낀 보통 사람들의 마음에 상당한 호소력을 가지는 것이 가능했을까?
이들의 지역에서 이들의 신앙과 삶을 추적할 수 있는 역사적 흔적들이 거의 멸절되었다고 볼 정도로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들 자신의 신앙 고백서나 설교, 양육을 위한 자료들이 씨를 말려 버린 것처럼 사라진 것은
그들에 대한 박해의 처참함과 지속성의 정도를 역설하고 있음을 가늠할 수 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관한 사실들이 전하여져서
결국 16세기 종교개혁의 씨앗이 되고 있다는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보고밀인들에 대한 동방 정교회와 로마 교회의 지속된 박해와 공격을 상상하면서
그들의 의도를 추측해 보고 이들이 역사 위에 남긴 선명한 의문들을 들추어 볼 때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두려움을 피할 수가 없다. 419-420
‘보고밀인들과 개혁 교회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는 것일까?’라는 질문은
사실, 이미 오래전에 제기되었다.
브로킷은 매우 도발적인 제목의
『불가리아와 보스니아의 보고밀인들, 또는 동방의 초기 개신교: 개신교 역사의 잃어버린 부분을 회복하려는 시도』(1879)
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브로킷은 이 책에서 보고밀인들이 오늘날 개신교회 형성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음에도
개신교의 역사 속에서조차 철저히 무시되고 잊혔음을 안타까워하였다.
불가리아의 유명 문학자인 이반 쉬쉬마노프(1862-1928)도
“보고밀인들은 유럽의 첫 개신교인들로 알려진 위클리프 후스 루터보다도 수 세기나 앞서서 존재하였고,
그들의 가르침은 이탈리아(특히 롬바르디아), 프랑스(특히 프로방스), 벨기에, 네델란드, 라인강 계곡, 메츠,
스트라스부르, 쾰른, 본, 트리어, 심지어 잉글랜드에도 들어가
‘종교개혁의 새벽별’이라 불리는 위클리프(1328-1384)와 대륙의 얀 후스(1369-1415),
마르틴 루터(1483-1546)에게도 상당한 큰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하였다.
비잔틴의 통치 아래 강력한 박해가 시작되면서 보고밀인들은 세르비아 지역을 안전한 피난처로 선택하고
점점 이곳으로 모여들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네마냐 왕국의 핵심이 되는 세르비아 지역이
보고밀인들 신앙으로 개종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이들의 기록 보관소 덕분에 보고밀인들의 교리를 상당히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을 얻게 되었다.
일부 보고밀인들이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18:36)라는 예수의 말씀을
이원론적으로 오해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보는 것은
오늘날의 교회 안에도 유사한 이원론 사고를 하는 신자들이 적지 않음을 볼 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보고밀인들에 관한 기존의 이해와 표현을 과감하게 조정할 필요가 있다.
사실 그들은 들에 핀 백합화도 입히시며 공중의 새도 먹이신다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철저히 신뢰하고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았으며, 주님의 나라를 구하는 삶을 살았을 뿐이었다.
보고밀인들의 중심 기도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로서 이 주기도를 가지고
하루에 낮 동안 7번, 밤에도 정해진 시간에 5번 기도하였으며, 이동 중에도 기도하였다.
이러한 기도의 삶은 베긴회와 베긴회 수녀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2세기 초 보고밀인들은 항가리와 달마티아에서처럼 보스니아에서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고,
‘파타리아’에서 유래된 ‘파타레네스인들’이라 불렸으며
그들의 신앙은 점차 이탈리아의 서부 지역으로 전파되어 갔다.
- 권현익, '16세기 종교개혁 이전 참 교회의 역사', PP 419-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