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욤 파렐

발도인들과 16세기 종교개혁자들과의 만남/ 권현익

강대식 2022. 9. 6. 15:52

발도인들과 16세기 종교 개혁자들과의 만남/ 권현익

 

파렐이 출생할 무렵, 교황은 발도인들을 제거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그리하여 신실한 그리스도의 증인인 4천 명이 산지에서 그들에게 대량 학살을 당했다.

400여 명의 어린 아이들까지도 무참하게 처형당했던 이 때에,

아기 파렐은 요람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파렐 출생 90년 전의 성탄절에도 사부아 공작은 발도인들을 공격했다.

당시 군인들을 피해 도망가던 발도인들 가운데

눈 위에 쓰러진 어머니의 품에서 얼어붙은 채 사망한 어린 아이들도

무려 80명이나 되었다.

 

사부아 공작과 교황은 이처럼 무력을 동원해 발도인들을 몰살하려 했지만,

그들은 발도인들을 결코 완전히 없앨 수 없었다.

15세기에 일어난 발도인에 대한 탄압으로 평지에서는 발도인들의 숫지가 줄어들었지만,

산악지대인 키소네와 제르마나스카, 펠리체 계곡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16세기 초 발도인들은 프랑스와 독일, 스위스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종교개혁자들을 일으키셔서,

선조 발도인들이 고난받고 죽어가면서 전했던 것과

동일한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는 것이었다.

 

발도인들은 개혁주의자들과의 접촉을 위해 1526년 140명의

바르브(친밀함을 나타내는 ‘삼촌’을 의미하는 말로 ‘설교자’에 대한 호칭)들을 소집해

끼조네 계곡에 위치한 라우스에서 회의를 개최했다.

두 명의 대표 바르브를 개혁자들에게 보내기로 결정했다.

 

한 명은 가장 연장자이자 남부 이탈리아의 칼라브리아 지역 대표인 귀도였고,

다른 한 사람은 바르브들 중 가장 어린 26세의 마르탱 고넹이었다.

그들은 요하네스 로이힐린과 루터, 멜랑흐톤을 만나

종교개혁에 관해 배우며 서적도 구입했다.

 

특히 강력하고 열정적인 루터를 만나 종교개혁 교리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종교개혁의 세 가지 기반인 ‘믿음으로 의롭게 됨’과 ‘만인 제사장’, ‘성경의 무오성’에 관한

내용은 발도인들에게도 매우 관심 있는 주제가 되었다.

 

이전에 루터는 로마교회의 영향을 받아 발도인이 이단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발도인들을 만나 직접 교제하면서 자신의 선입견을 버릴 수 있었다.

그때 발도인들이 들고 온 고대의 신앙고백서에 감동을 받은 루터는

1533년에 『발도인들의 신앙고백서』를 출간했다.

 

루터는 이 책의 서문에서 선조 발도인들을 ‘거룩한 순교자’로 표현했으며,

발도인들에게 진리의 큰 빛을 비추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리고 영혼의 유일한 목자와 감독이 되시는 주님께서

16세기에 개혁교인들을 “발도인들과 하나의 양 우리 안으로 모으셨다”고까지 주장했다.

 

1530년 발도인들은 프로방스의 메링돌에서 다시금 총회를 소집해

루터의 책으로 접한 개혁주의 교리와 규율과 예배에 관한 의문점들에 관한

48개 항의 긴 라틴어 설문지를 작성했다.

그리고 메링돌의 사역자인 피에르 마송과 조르주 모렐을

바르브 대표로 개혁자들에게 보내 그 답을 듣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먼저 바젤로 가서 외콜람피디우스와 면담했다.

그 개혁자는 이 순박한 산악인들이 들고 간 그들의 역사와 신앙 고백이 담긴

양피지를 눈으로 확인하고서 크게 놀라며 기뻐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과 진리와 평화와 의가 되실 뿐 아니라,

목자와 변호자와 우리의 대속제물과 동시에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십니다.

그는 신자들의 구원을 위해 친히 돌아가셨습니다.”

외콜람디우스는 기쁨과 놀라움 가운데 이 사람들을 바라보며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너무도 많은 진리의 빛을 허락하셨습니다”

라고 고백했다.

 

외콜람피디우스는 발도인 대표들이 가져온 질문지에 친절하게 답했고,

스트라스부르의 마르틴 부처에게도 그들을 추천했다.

부처 역시 발도인들의 신학과 종교개혁 신학이 거의 모든 점에서 일치한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고 크게 기뻐했다.

 

외콜람파디우스는 라틴어로 작성한 답변지에서 다음과 같이

발도인들이 개혁자들의 믿음의 선조임을 인정했다.

“적그리스도가 엄청난 권세로 온 땅에 무지함을 퍼뜨린 가운데서도,

여러분을 큰 빛으로 부르신 자비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가운데 계심을 인정합니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여러분들에게 훌륭한 지식과 영적인 복을 주셨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마르티 부처도 “이 시대에 진리의 큰 지식으로 오늘까지 여러분을 보존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언급했다.

 

하인리히 볼링거는

“400년 그 이상 동안 프랑스와 이탈리아, 게르만, 폴란드, 보헤미아와

기타 여러 국가에서 활동한 발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했고,

그들의 신앙 고백을 계속 이어왔다.

그들은 계속되는 설교와 저서를 통해 교황이야말로 사도 요한이 계시록에서 언급한

실제적인 적그리스도라며 고발했다.

그들은 로마교회와 교황을 과감히 비판했고,

그로 인해 여러모로 잔인한 고통을 당했으며, 영광스러운 순교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발도인들은 지속적이며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전파했는데,

그것은 오늘날 우리의 것과 동일하다.

교황의 강요 때문에 왕들과 영주들은 군사력을 동원해

여러 차례 그들을 뿌리째 근절하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런 노력을 허사로 만드시사,

그들은 결코 멸절되지 않았다”라고 기록했다.

 

발도인의 두 대표는 바젤과 베른, 스트라스부르에서 개혁자들을 만난 후

더 이상 다른 지역으로의 여행 계획들을 취소했다.

그 이유는 이미 만난 개혁주의 학자들을 통해 평소의 궁금함들이 모두 해결되었고,

개혁자들의 경건한 삶과 가르침을 통해 개혁주의가 지향하는 것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두 바르브가 산악 지대를 돌아서 귀향하던 중,

그들이 나눈 대화는 디종의 로마교인들에게 의심을 받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곧 몸 수색을 당했고,

그들의 짐에서 종교개혁에 관한 서적들이 발견되어 체포되었다.

다행히도 모렐은 탈출했지만, 마송은 디종에서 처형되었다.

 

모렐은 자신의 사역지인 레밍돌로 돌아가, 개혁자들의 답변서를 그들의 언어로 번역했다.

그 후 그가 발도인의 계곡에 홀로 돌아갔을 때, 계곡 주민들의 슬픔과 상심은 매우 컸다.

그럼에도 그들은 모렐이 가져온 답변을 듣고 싶어 했고,

로마교회와의 관계에 관한 외콜람파디우스의 지적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개혁자들의 답변에 관한 토론을 위해

샹포랑에서 바르브들의 총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 권현익, 『기욤 파렐과 종교개혁』, PP 475-4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