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욤 파렐

칼뱅은 루터와 비견되는 명성, 파렐은 세상의 영예와는 무관/ 권현익

강대식 2022. 9. 9. 21:16

칼뱅은 루터와 비견되는 명성, 파렐은 세상의 영예와는 무관/ 권현익

 

칼뱅이 주네브로 다시 돌아간 시절부터 파렐은 주네브의 역사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후 파렐의 모습은 그가 오랫동안 관심을 가졌던 메츠에서 확인된다.

파렐의 마지막 방문이다. 메츠는 새로운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도미니크회 수도사들 중 일부가 개혁교리와 순수한 삶을 설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542년 메츠 행정관에 선출된 카스페르가

그들의 집과 영지에서 개혁주의 예배를 허용했고,

그 결과 개혁주의 공동체가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그해 12월 초, 파렐은 개혁교회를 조직하기 위해 초청받았다.

여전히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도시의 방문을 염려하는

주변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파렐은 메츠로 향했다.

 

파렐의 도착 소식을 접한 의회는 그를 소환했다.

파렐에게 “당신은 누구의 명령을 받고 이곳으로 왔는가?”라며 심문했다.

이에 파렐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과 공동체의 일부 회원들이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의회가 그를 초대한 사람들의 명단 제시를 요구했으나 파렐은 거부했다.

상원은 황제로부터 파렐의 설교 금지와 모든 주민은 의회가 개최될 때까지

로마교회의 신자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황제의 명령을 받아냈다.

 

파렐은 기욤 퍼스텐버그 백작의 보호를 받으며 이웃 도시인 고르즈로 갔다.

파렐은 고르즈의 수도원 예배당에서 설교했다.

하루는 파렐이 성모의 영광을 노래하는 한 수도사에게 다가가 질문했다.

그러자 그곳의 청중들 중에 있던 여인들이 파렐에게 달려들어

그의 목을 조르는 일이 발생했다.

 

파렐은 이 일로 생명을 잃을 뻔했고, 수일간 그의 방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파렐은 이런 상황 속에서도 더 많은 설교를 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주일, 비참한 일이 일어났다.

300명의 신자들이 성찬에 참석했는데,

나팔소리와 함께 무장한 병사들이 급습한 것이다.

 

이는 피에를 카롤리가 그 지역의 영주인 기즈 공작에게 고발했기 때문이다.

이날 기즈 공작은 그의 아들 프랑수아 기즈에게 무장 병사들의 지휘를 맡겨

현장에서 일부 개혁교회 신자들을 죽였다.

그리고 체포된 다수의 사람들은 익사시켰다.

 

프랑수아 기즈는 이후에도 개혁자들의 대적으로 활동했고,

1561년 3월에는 프랑스 바시에서 위그노들의 학살을 주도해

프랑스 종교전쟁에 불을 붙인 주범이기도 했다.

 

이 공격으로 파렐 역시 부상을 당해 백작과 함께 성 안으로 몸을 피했고,

백작은 곧 파렐과 부상자들을 스트라스부르로 이송시켰다.

이들은 그곳에서 얼마 동안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후 파렐은 주네브를 다시 방문했다.

시대가 바뀌면서 어느덧 칼뱅은 주네브 공화국의 수장격이 되어 있었다.

파렐은 칼뱅이 시민들로부터 존경과 순종을 받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주네브에 도착한 파렐이 입었던 낡고 찢어진 옷은

그의 가난함과 검소함과 아울러 그가 성실한 사역자임을 보여 주었다.

의회는 그를 위해 새로운 의복을 만들어 선물하려고 했다.

그러나 개혁자는 의회와 주네브인들로부터 얽매이지 않은 채

자유롭게 진리를 전하기 원했기에 정중히 거절했다.

하지만 칼뱅은 그 옷을 잘 보관했다가

추후 파렐에게 자신이 옷을 집에 보관하고 있다며 편지했다.

 

칼뱅은 파렐이 주네브 근처에 정착하기를 원했으나,

주님은 그의 종에게 다른 임무를 주셨다.

주님께서는 파렐의 경우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사용하신 반면,

칼뱅은 루터에 비견되는 명성을 얻게 하셨다.

 

그럼에도 칼뱅은 파렐에게 매우 친밀한 우정을 나눴고,

그의 주네브 체류를 도울 수 없는 것을 아쉬워했다.

칼뱅은 베른 의회가 파렐에게 로잔 아카데미의 교수직을 허락하기 기대했으나

거절을 당했다.

그 이유는 베른이 축일과 세례대와 누룩을 넣지 않은 빵에 반대한 파렐을

여전히 용서하지 않고 차갑게 대했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로 파렐은 마지막까지 세상의 영예와는 무관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럼에도 파렐은 흔들리지 않은 가운데 계속해서 복음증거자로 활동했다.

몽벨리아르와 메츠, 주네브, 독일 및 프랑스의 여러 지역에서

그의 활동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 권현익, 『기욤 파렐과 종교개혁』, PP 674-6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