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에베소서 강해", 2권, 5장 하나님의 진노 (김영희요약)
제 5 장 하나님의 진노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3)
- 죄 가운데 있는 사람에 관한 사도의 최종적인 진술이다.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 있는 사람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며 무엇을 행하시는가를 보여 준다. 이처럼 주요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오늘날 세상이 이렇게 된 것은 바로 이 점을 끊임없이 망각해 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나도 자기중심적이고 우리 자신에게만 관심을 기울인 나머지,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내려다보시는 방식이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요점임을 기억하지 못한다.
- 네 번째 원리,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을 어떻게 보시는가?
사도는 두 가지 일을 말하고 있다. 첫째,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이며,
둘째, 우리는 모두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이다.
* 세상에 직면하고 있는 난제들을 제쳐 두고 어째서 이러한 것에 주의를 환기시켜야 되는가?
① 그것이 성경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② 우리가 이 본문에서 대하고 있는 것은 결국 하나의 사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의 진노의 교리가 진리라면 그것이야말로 이 순간에 있어서 우리 모두에게 직면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3차 대전이 일어나느냐 일어나지 않느냐는 문제보다 무한히 더 중요한 문제이다.
③ 사도의 전체의 논증은 우리가 결코 이 교리를 이해할 수 있기 전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진노의 교리와 하나님의 심판의 교리를 이해하기까지는
주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 어째서 이 세상에 오셔야만 하였는가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이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절대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것이 어째서 우리 구원에 있어서 그처럼 진수가 되는가 하는 것이다.
저는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의 교리를 밝히지 않고 그 질문에 대해 대답하려는 시도를 무시한다.
어째서 그리스도께서 죽어야만 했으며, 어찌해서 우리가 그의 피로써 구원을 받는 것인가?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기 위해서 그가 그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시고, 다시 살아나신다고 하는
그 일이 그처럼 진수가 되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오직 한 가지 답변은,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이 교리뿐 이다.
④ 이 교리는 진정한 복음전도의 입장에서 진수가 된다. 어째서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가?
그들은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결코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의 거룩에 관한 진리를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공의와 의에 대해서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들은 영원한 심판자로서의 하나님과, 인간의 죄를 향하신 하나님의 진노에 관한 어떤 것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 교리는 복음 전도에 있어서 진수가 된다. 만일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절대적인 필요성을 진실로 믿는다면 우리는 이 교리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1.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
“다른 이들과 같이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 “다른 이들”이란 믿지 아니하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에 있어서 인기가 없을 뿐 아니라 혐오감과 증오를 받고 있는 엄청난 교리를 직면하고 있다.
현대적 개념은 하나님은 사랑이요, 우리는 사랑의 차원에서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 개념에는 하나님이 일종의 부족 신이라는 고대 개념에서 출원된다.
부족 신에 불과했던 구약의 하나님은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우리는 신약의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한다.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진노 개념은 일종의 하나님의 성격 속에 자녀들을 언제나 복종시키고 훈련시키는 데
엄격하고 처벌을 가했던 완고한 억압적인 아버지의 개념을 집어넣은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그러한 논리에 대한 대답은, 먼저 “진노”라는 말 자체를 오해하는 것으로
진노를 즉각적으로 어떤 겉잡을 수 없는 분냄으로 생각한다. 곧 자제력을 잃어버리고 폭언을 하며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의 분노와 하나님의 진노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진노는 의를 기초한 일종의 의분이다.
성경적인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사랑의 다른 측면에 불과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데 대한 피할 수 없는 당연한 귀추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또한 공의와 의의 하나님이시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격멸되고 거부당하면 공의와 의와 하나님의 진노밖에는 아무것도 나올 것이 없다.
이 교리는 구약성경에서 맨 처음부터 발견된다.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타락했을 때
하나님은 인간을 동산에서 쫒아내고 동산의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셨다.
노아 홍수의 사건, 소돔과 고모라, 이스라엘 자녀들의 징벌, 민족이든 개인이든 간에
징벌하시는 하나님의 징벌 등에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율법을 주시고 만일 인간들이 그것을 어기면
인간들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이다.
여러분이 이 하나님의 진노의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구약을 진실로 믿을 수 없다.
신약에도 그 교리가 어느 곳에서나 나타난다. 세례 요한은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고 말했다.
실로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메시지이기도 했다.
놀라운 것은 사랑의 하나님에 관해 요약되고 있는 요한복음 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사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함이요” 영생이 아니면 멸망이다.
요한복음 3:36은 더욱더 명백하게 말하고 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바울은 로마서 1:18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니” 했다.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를 떠나서는 복음을 말하지 않는다.
그가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 때문이다.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엡5:6)
또 요한계시록에도 “어린양의 진노”에 관한 문구에서 그것을 발견하게 된다.
세상을 의로 심판하실 분은 온 세상의 죄를 없이 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
그래서 사랑과 진노가 상충된다고 하는 생각은 성경의 명백한 교훈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우리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개념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도저히 하나님의 긍휼을 이해할 수가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의 진노를 알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길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한다.
사도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까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심에 대한 표현이다. 또한 죄를 심판하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지옥에서 최종적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모든 비그리스도인의 입장이라고 사도는 가르친다.
만일 여러분이 그 개념을 반대한다면 성경을 반대하고 있는 것이고,
성경의 명백한 교훈을 반대하여 자신의 어떤 철학적인 개념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성경과 다투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과 다투고 있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성경이 하나님에 의해서 영감 되었다고 믿는다면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을 기초해서 쌓아 나간다면 우리는 이 시점에서 포기하는 것이 좋다.
성경은 “자연인”과 “육신의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설교자의 직무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해케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설교자의 사명은 메시지를 선포하는 데 있다.
메시지는 모든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까지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이다.
2. 우리는 다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
“우리도 다 본질상 다른 이들과 같이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 “본질상”은 “태어나면서”라는 말이다.
모두 바로 태어날 때부터 다른 이들과 같이 진노의 자녀들이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일어날 문제가 아니었고
또한 우리의 행위로부터 결과된 것이 아니다. 바울은 우리가 우리의 본성 때문에 또는 그 본성이 나타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가 나면서부터 그 위치에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로마서 5장에서 상세하고 철저하게 논증하고 있다. 로마서 5장에서 사도가 증명하고 싶어하는
한 가지 위대한 진리는 신자로서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진 관계가
정확히 우리가 처음에 아담과 가졌던 관계에 대한 정확한 대칭이라는 것이다.
1) 그는 12절에서 이렇게 출발한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음으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곧 아담과 우리의 관계는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와의 관계와 동일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전가시키신 것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사람이 되었음을 믿는다면,
우리는 반드시 아담 안에서 우리에게 전가되었던 것에 관한 진리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죄의 형벌은 죽음이다.
아담은 범죄했고 죽음이 그에게 왔다. 아담이 지은 한 죄의 결과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
2) 13-14절에서 “죄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까지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여러분은 그 말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나는 그저 위로의 복음만을 원한다.
그것이 우리가 말하기 쉬운 방식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쓴 것은
거의 2000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편지로 전해졌던 것이다. 그들은 단순한 신자들이었고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노예와 시이저 집에 있는 군인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이러한 말씀을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숟갈로 떠먹여 주어야 하는 현대 그리스도인들, 또한 멋있고 쉽고 단순한 것만을 원하는
우리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율법은 모세를 통해서 주어졌다. 아담과 모세 사이에는 긴 시간적 간격이 있었다.
죄를 규정지을 법이 없으면 죄가 사람에게 임하지 못하는 것이다. 율법이 모세 때까지 주어지지 않았지만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사람들이 죽었다. 그들 모두가 죽은 것은 아담의 범죄 속에 그들 모두가 휩싸여
함께 수반되었기 때문이다. 사망이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왕노릇하게 된 오직 유일한 이유는
아담의 한 범죄가 그 후손 전체에게 사망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태어난다.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그들은 영아기에 죽었던 영아들이었다.
유아들이 죽은 이유는, 아담의 범죄 속에 그들이 함께 수반되어 있기 때문이다.
3) 15절에서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아담의 한 범죄가 모든 인류로 정죄에 이르게 했다.
반대로 많은 범죄들이 한 사람의 의,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용서를 받았다.
4) 18절,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5) 결론적으로 19절,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여러분과 저는 또는 모든 인류는 아담의 한 범죄로 말미암아서 죄인으로 “지어졌다”.
우리는 “모두 다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다.
그것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다. 성경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이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22)
그것은 정확히 같은 논리이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초석이다.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든지 이해하지 못하든지 그것은 진리이다. 아담은 전 인류였다.
그는 인류 전체를 대표했다. 만일 여러분이 한편으로 그리스도에 관해서 믿는다면
또한 아담에 관한 다른 편을 믿어야 한다. 여러분이 아담에 관한 것을 부인한다면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에 관한 것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 그리스도인이 몇 절의 철학과 자신들의 이해를 기독교 신앙으로 가지고 오는 것보다 비극적인 것은 없다.
비록 우리가 허물과 죄로 인해서 죽었고, 죄로 인해서 오염되었고, 서로 미워하고,
실제로 죄를 지으며 삶을 영위하고 있으며, 그래서 절대적으로 무력하며 무능하다 할지라도
우리가 거스려 범죄한 바로 그 하나님께서 우리가 손상시켜 드린 바로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셨다.
하나님은 고난과 수치와 갈보리의 고통과 잔인한 죽음에까지 그를 아끼지 아니하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것이 “그처럼 놀라고 신비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찬미하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