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에베소서 강해", 2권, 14장 유대인과 이방인 (김영희)
제 14 장 유대인과 이방인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엡2:11)
-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2장에서 말하는 진술의 두 번째 대목에 이르게 된다.
바울은 여기서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개념을 거론하고 있다.
에베소서의 큰 목적은 이 현세대 동안 하나님께서 가지신 장엄한 목적을 설명하고 파헤쳐 주는 것이다.
그것이 1:10에에서 요약적인 형태로 지적되어 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들어오신 것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 안에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만물을 통일하고 묶는 데 있었다. 교회는 이 놀라운 일에 대한 하나의 예증이다.
이 에베소 사람들과 이 이방 사람들이 유대인들과 함께 기독교회의 지체가 되었다는 일은 기이하고 놀라운 일이다.
그것을 가능케 한 오직 한 가지 일은 곧 이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이 일을 가능케 했다.
- 에베소 사람들이 교회의 성원이 되는 데 있어서 두 가지 주요한 장애가 있었다.
첫 번째 장애는 그들이 죄 가운데 빠져 있는 상태와 조건이었다.
사도는 2:1-10까지의 말씀에서 그것을 다루었다. 사도는 그들이 예전에 어떠한 사람들이었던가를 상기시켜 주고 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을 그런 자리에서 이런 자리로 옮긴 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 바로 그것이었다.
두 번째 장애는 이방인들인 에베소 사람들과 교회의 성원 사이에는,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 사이에 있는 장애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 속에 있는 그들의 위치와 상태였다. 특별히 하나님의 율법과의 관계에서 그러하다.
여기 11절에서 바로 그 주제를 다루고 있고 3:12까지 계속되어 나갈 것이다.
사활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첫 번째 장애와 두 번째 장애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작동 중에 있다는 사실이다.
2000년 전에 그러하였듯이 그것은 오늘날도 진리이다.
먼저 살펴본 바와 같이 첫 번째 장애에 대해서 사도는 이 에베소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되었다는 것과
그리스도 교회의 지체들이라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를 진정으로 파악하고 이해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때는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12) 그들이 그 점을 기억하고 그들에 관한 진상이 어떠한가를
깨달을 때만 하나님의 능력의 크심이 진정으로 이해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구원에 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그것을 놀라게 여기지도 않고 있다.
그들은 죄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장애들과 난제들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다.
바울은 그 목표에 도달하는 방식으로서 그들이 전에 어떠한 사람이었는가를 상기시키고 있다.
- 두 번째 장애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극복하셨는가를 그들이 알도록 하고 있다.
1. 두 번째 장애는 무엇인가?
옛 시대에 있어서 세상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라는 두 주요그룹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 구분은 절대적인 것 같았다.
유대인들은 유대인과 개들로, 헬라인은 헬라인과 야만인으로 나누어져 있던 입장이었다.
이 두 편이 그처럼 서로를 마음 깊이 무시하여, 하나가 되고 화목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더구나 그들이 같은 하나님과 같은 주님을 예배하고 경배한다는 일은 더욱 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 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다.
바로 그것이 지금 전달되는 메시지이다.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자들이라”
바울은 그들이 전에 “육체 안에 있는 이방인들”이었다는 것을 상기시킴으로써 시작한다.
그들은 이방인들로서 할례를 받지 못했으므로 “육체로는 이방인”이었다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유대인들이 고집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오해함으로써
진정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할례냐 무할례냐 하는 것 만이었다. 그들은 할례 자체의 목적마저도 오해하고 있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3:3)고
말하고 있다. 바울 서신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본문에 사도가 지적하고 있는 요점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2. 이 두 번째 장애에 있어서 두 국면이 있었다.
에베소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극복하셔야만 했던 두 국면이 있었다.
먼저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였고 두번째로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였다.
하나님의 태도는 결국 그들이 할례를 받지 못했으며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기 때문에 야기되어야만 했다.
요점은 하나님께서 이 이중적인 장애를 처리하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들 두 가지 난제들이 해결된 것이다.
이방인들을 향한 유대인의 태도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면 바로 잡아졌으며,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향하여 가지고 계신 그 태도 역시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됨으로써 바뀌어졌다.
그러므로 율법의 모든 문제는 우리 구주 예수님에 의해서 해결 받은 것이다.
오늘날 그 모든 것이 어떠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가? 세상은 분쟁과 쟁투로 가득 차 있다.
나라들과 족속들, 계층들, 부류들, 분파들, 여러 다양한 분쟁들이 존재한다.
고대세계가 우리가 보아 온 방식으로 나누어졌듯이 현대세계 역시 이러한 방식으로 갈라져 있다.
안타깝게도 그리스도의 교회에도 그러한 일이 해당된다는 것이다. 교파, 단체 또한 분열 분쟁 등이 그것이다.
이 모든 것이 오늘 현세대에 큰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그것에 대해 누구나 할 것 없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데도 그것은 어떠한 해결책도 이르지 못하는 것 같다.
그 대답이 여기 사도 바울의 가르침 속에 들어 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초대 교회는 참된 연합의 표증이었다.
그들은 함께 모여서 성령에 의해서 같은 아버지께 기도하였고 같은 교회 안에 있었으며
그들은 동일한 시민이요 한 가정의 권속들이었다. 그것만이 오직 유일한 길이다.
현재의 가장 중요한 비극들 가운데 하나, 특히 교회의 차원에서 볼 때 그것은 오늘날 거의 모든 교회의 지도자들이
복음을 설교하지 않고, 하나 됨에 대한 설교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복음만이 하나 됨을 산출할 수 있다.
복음에 대해서 서로 의견이 일치되지 못하는 한, 하나 됨에 대해서 어떤 다른 방식을 이야기하는 것은
괜스레 헛김만 내뿜는 것이요 정력낭비이다. 그것이 바로 이 본문의 메시지이다.
그것은 교회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세상에도 역시 적용된다.
- 여기서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1. 첫째로 우리는 고통의 근원을 인식해야 한다.
오늘날 그 모든 것들이 헛되게 돌아가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곧 그들이 고통의 근원을 직면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처방이 있기 전에 진단이 있어야 한다. 근본원인을 생각하지 않고 증상만을 처리하는 것은 순전히 바보와 같은 짓이다.
여기서 사도는 우리에게 병의 근원과 질병의 원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11절에서 말하는 바 유대인들의 경우를 살펴보면, 그것은 차이점들이 하나의 장벽으로 바뀌어졌다는 점이다.
차이점들이 “가운데 막힌 담”이 되었다. 참되게 하나 된다 할지라도 차이점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비극은 사람들이 그 차이점들을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것들을 장벽으로 만들고, 장애로 만들고,
중간에 막힌 담으로 만든다는 데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과 하등의 관계를 하지 않기 위해서
유대민족을 지은 것이 아니었다. 유대민족을 창조한 것은 그들을 통해서 온 세계에 말씀하시기 위해서였다.
유대인들은 그 차이점을 하나의 장벽으로 돌려버렸다.
2. 어떻게 이것이 그렇게 되었는가?
1) 첫째로 그것이 자랑을 하게 만든다. 궁극적으로 자랑이 모든 분쟁의 원인이요, 모든 장벽과 장애물의 근본원인이다.
자랑은 사람을 어둡게 하고, 우리를 조롱하고 지배하고 장악하는 강력한 정신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교만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분별력을 잃게 하는 힘이다.
그것의 작동기전은,
① 먼저 우리가 어떤 문제에 대해서 양편 견해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볼 수 없게 만든다.
② 다음에 우리들 자신에 대한 거짓된 관점을 갖게 해 준다. 이렇게 해서 선입관은 그에게 해당되는 진리를 과장시킨다.
유대인들이 할례를 받아야 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그것을 과장시켜서
이 땅 위에 유대인밖에 없다고 말하는 대로 나아갔다. 유대인은 단순히 자기가 유대인이라는 것 때문에
자연적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래서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이다.
또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든,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든 간에 그것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에게 기인된 것이라는 점을 깨달을 수 없게 만든다. 유대인들은 할례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었음을
아주 잊어버렸다. 불쌍하고 무모한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자기들 된 것이 자기들 때문인 줄 생각했던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같은 경우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능력이나 자기의 외모를 자랑한다.
사람이 자랑할 권리가 있는가? 태어날 때 그것을 가지고 나왔으며 이 모든 은사들은 하나님의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것을 자기가 만든 것인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바이며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겸손하게 인식하지 못한다.
이러한 것들이 서로 분열이 되고 전쟁을 일으키고 피를 흘리는 것들의 씨앗들이다.
④ 더 나아가서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에 대한 잘못된 관점을 가지게 한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과장되게 생각하게 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낮게 평가 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편에다가 더 많은 것들을 갖다 붙이고
다른 사람의 편에서는 떼어 내버리는 일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모른다. 우리는 그렇게 다른 사람 속에 있는 좋은 점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실로 우리는 거기에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기까지 그것을 말살시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멸시까지 한다.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이 “개들” 이었다. 바로 자랑은 그런 방식으로 일을 해나간다.
바울이 그 일을 비꼬아주며 풍자적이었던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2) 둘째로 분쟁의 큰 원인은 그릇된 가치의식이다.
그 당시에 있어서 유대인들의 전체 비극은 참된 가치의식을 결하고 있었다.
그들은 문제가 되는 것은 육체에 있는 할례라고 생각했다. 바울과 다른 사람들이 유대인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하는
교훈은 진정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 영으로 할례를 받는 것이었다. 육체로 할례를 받으면서도
동시에 저주를 받으며 버려질 수 있다는 점을 말해야 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은
그의 영에 할례를 받은 사람임을 알려 주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것은 유대인들에게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대인은 할례를 잘못 해석했다.
할례는 단순히 영적이고 내적인 상태에 대한 외적 표징에 불과했다.
- 바울이 강조하는 두 가지 요점은, “육체”또한 “손으로”,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은 자들이라”
여기서 “육체”는 외적인 것, 육신적인 것에 강조점을 둔다. 민족성! 그것은 순전히 육체에 속한 것이다.
우리는 유대인들이 행했던 것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내가 어떤 나라에 태어나게 되었기 때문에 그 나라만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이것은 엄청난 과장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위해 싸우며, 목숨을 버릴 것이며 다른 사람들을 죽일 것이다.
민족성! 가문! 혈통!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얼마나 과장을 잘 하는가?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어마나 뽐내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것은 얼마나 잘 멸시하는지 모른다. 이러한 것들이 얼마나 장벽을 잘 만드는가?
그러한 것들이 삶에 있어서 문자 그대로 장벽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서로 다투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의 피부 색! 순전히 그것은 육체의 문제이다. 영혼, 마음, 영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는다.
순전히 육신적인 차원에서만 평가를 한다. 수완, 돈, 학벌, 지위, 이러한 것들은 분쟁을 조장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며
논쟁과 비참과 곤고함을 만드는 원인이 된다 그것들은 모두 육체에 속한 것이다.
불행히도 신앙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 일을 발견하게 된다. 단순한 신앙의 외적인 면에다 관심을 기울이는 것처럼
많은 분쟁을 가져오는 것은 없다. 주님의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었다.
그들은 단지 외적인 것, 형식 의식에만 관심을 두었지 영적인 것은 놓쳐버린 것이다. 오늘날도 여전하다.
형식이나 의식이나 예배드리는 일들이 사람들을 갈라놓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유대인들이 옛날 행했던 일을
현대적인 형태로 바꾸어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육체에 속한 것을 하나의 장벽이 되기까지 고집을 세우고 과장하는 것이다.
“손으로 행한” 그것은 순전히 인간적이라는 말이다. 오늘날 교회에 있어서 분쟁을 조장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사람이 거듭났는가? 하나님의 성령이 그 속에 있는가? 그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가?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도자들 자체가 지금까지 말한 그러한 장벽의 차원에서 행동을 한 것이면
통일이나 연합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큰 집회를 열고 모으는 것이 무슨 요점이 있는가?
그들은 심지어 세례를 받는 방식, 세례를 받는 물의 양 때문에 함께 모이질 않는다.
그것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이나 사두개인들이나 율법사들의 사고방식을 재현하는 것이다.
그것들이 중심이 되어 중간에 막힌 담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졌던 충성보다 자기들의 특별한 교단의 전통에 많은 충성을 드리는 자들이 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그들이 그 교단에 속해 있다는 사실, 그 교단에서 양육을 받았다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그것을 위해서 싸우고 그것이 중요한 것이 된다. 그리스도와 그의 진리는 완전히 망각되고 언급되지를 않는다.
“손으로 행한” 인간적인 전통, 형식에 치중하고 전통주의를 신봉하는 것들,
이러한 것들은 분쟁과 분리와 분열을 가져오는 것들이다.
3. 치료책은 무엇인가?
그리스도만이 치료할 수 있다. 필요한 것은 마음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한 의지나 친절이나 온정이나 형제애에 호소해 봤자 그것은 충분하지 못하다. 그저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적용시키려고 애를 써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오늘날 그것이 대중적인 호소이다.
오늘날 그것이 대중적인 호소이다. 그들은 말한다. 오라, 우리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자. 그것을 적용시키자.
그렇게 한다면 전쟁은 사라지고 더 이상 고통은 없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거기에 대한 답변은
그것은 진리가 아니고 단순히 사실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그것은 이미 역사적으로 실증이 된 사실이다.
그것은 학교에서, 감옥에서 시험해 보았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비성경적인 것이고 하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의 본성은 잘못되어 있고
그것은 언제나 드러나기 마련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통제하고 붙잡아야 한다.
오직 한 가지 길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방식이다. 그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에 관한 진리를 말해 준다.
그리스도는 우리 자신을 대면시켜 준다. 그리스도와 함께 대면하여서 나는 나의 전적인 무가치함과 곤고함과
나의 비참을 알게 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님과 나는 가난뱅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들이 자기들의 진상을 알기까지 사람들 속에는 결코 하나 됨이란 있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것은 내가 싫어하는 다른 사람에게도 진리이고 또 다른 민족이나 나라에게도 해당되는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또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다 함께 들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우리가 과장했던 그것들이 아주 미세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또한 알게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 함께 먼지의 수준까지 내린다. 그는 이미 모든 차이점들을 부셔 버리셨다.
그가 우리에게 우리 모두는 같은 은혜와 같은 긍휼과 같은 사랑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
이 모든 것을 깨닫게 될 때 그 이후의 나의 충성은 내 자신에게가 아니라 그분에게 이다.
우리는 서로를 망각하게 되고 더 이상 질투와 시기와 분쟁을 하지 않게 된다.
우리는 다 함께 그에게 가고 함께 그를 찬송하는 노래를 부르게 된다.
그것이 바로 그 일을 해내는 그리스도의 방식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정신을 사람에 의해서 적용시키는 방식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사람 속에 넣어 주시는 것이다. 중생치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원리와 정신을 적용시킬 수 없다.
오직 한 가지 소망밖에 없다. 사람들이 거듭나게 되고 그리스도의 피로써 화목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새로운 본성과 마음을 주시고 그 속에 새로운 성령을 부어주시는 그 길밖에는 없다.
그들이 함께 이 성령을 누리게 될 때 그들은 그리스도를 경배하고 그리스도를 찬미하고 그리스도를 자랑하게 된 것이다.
이제 그들은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연합의 오직 유일한 초석이다. 어떤 조직이나 어떤 다른 일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사람의 겸손, 그리스도께서 지배하고 그리스도께서 중심적인 그러한 새사람의 겸손이
바로 그 연합의 초석이다. 모든 중간에 막힌 담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둘이
한 새사람을 만듦으로써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개인적인 관계들 속에서 이 점을 적용시킬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여시기를 바란다.
참된 평화에 대한 오직 유일한 소망은 평화의 왕이요 의의 왕이신 그분의 발 앞에 함께 모이는 것이라는 점을
세상으로 알게 하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