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에베소서 강해', 2권, 15장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김영희요약)
제 15 장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2:12)
- 본문에서 어떻게 이방인들인 에베소 사람들이 할례를 받지 못하고서도 그리스도의 교회에 들어오는 것이 가능했으며
어떻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한 새 몸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루는 데 동참했는가를 살펴보게 된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구별은 매우 현실적인 것이었다. 아브라함 자신과 그 후손들에게 할례를 청하라고 명령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그러므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있는 그 차이를 결코 낮게 평가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 차이를 인식하고 있다 할지라도 분명히 해야 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또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할례의 요점과 목적과 정신을 완전히 오해했다.
바울은 이 문제를 서신들에서 다루고 있다. 예를 들어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2:28-29)
유대인들은 이 할례의 전체 목적이 하나님의 의중에 영적인 것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알거나 인식하는데
완전히 실패했던 것이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라”(롬3:1-2) 이방인과 유대인들 사이를 구별하는 데에는
매우 진정한 목적과 목표가 있었다. 그것은 엄청나게 중요한 문제였다.
본문에서 그는 거짓된 할례관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 그것은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있었고”, “그리스도와 교제를 하고 있지 않았고”,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지 않았었고”, “그리스도를 떠나 살고 있었고”라고 번역될 수 있다.
그것을 다섯 가지 항목으로 특별하게 지적해 나가고 있다.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옛 구약시대에 이방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던 위치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유대인과 이방인, 할례 받은 유대인과 할례 받지 아니하는 이방인들로 나누어져 있었다.
1. 어째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관계의 차원에서 그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가?
구약을 특징짓는 것은, 이스라엘 나라, 약속의 언약들,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주셨던 소망,
그 백성들과 하나님의 관계, 그들이 세상에서 불리운 것 등이었다.
그것이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처해 있던 조건이요 지위를 요약한 것이다.
모든 나라들은 이 축복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
또는 “그리스도 밖에” 존재하고 안 하고의 차원에서 그 모든 것을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에 유대인들에 대하여, 또 유대인들을 위해서 행한 모든 일은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이루어진 것이다. 구약에 있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바라고 있다.
하나님의 목적은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힌”(갈3:23) 것이었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 몽학선생이었다. 어느 것도 그 자체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바로 그 점에 있어서 잘못되어 있었다.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구원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 모든 것들의 목표는 아직 계시되어야 하는 믿음의 때까지 우리를 가두어 두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의 형상에 따라 만드셨고, 사람은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교제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사람이 범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그런 후에 인간은 많은 자손을 낳았다.
가인의 노선과 셋의 노선 사이에 일종의 구분이 있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겠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새로운 민족을 창조하실 계획이었다.
그들을 구별해 내시려 하셨고 그는 그 새로운 민족을 향해서 특별한 관계를 가지시려 하셨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형성된 과정이다. 그런 다음에 그 백성들과 어떤 언약들을 맺으셨다.
“너와 네 자손으로 인하여 땅의 모든 족속들이 복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아브라함에게 서약하였다. 그것이 바로 언약들의 의미이다.
하나의 위대한 언약이 여러 형태로 되풀이되었다. 이삭과 야곱과 시내산의 모세와 다윗에게 그리고
여러 선지자들에 의해서 전파되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나라”, “약속의 언약들”이라는 어구가 의미하는 바이다.
그들은 모두 메시야의 오실 것을 기대하고 내다보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제 세상과 그의 백성들을
두 가지 방식으로 내다보고 계셨던 것이다. 한 편에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다른 한 편에는 이방인들이다.
언약의 백성들은 할례의 표증에 의해서 구별되었다.
그것이 바로 사도가 이 에베소 사람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는 일이다. 그는 에베소 사람들이 그들이 받은 구원의 위대성을 인식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들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한 가지 유일한 방식은 “믿는 우리를 향하여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에 관해서 무엇인가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 능력은 우리를 죄의 사망 가운데서 일으켜 세우는 능력만이 아니다. 그것은 언약적인 관계에 있어서 밖에 있었던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이 엄청난 일을 해결하는 능력이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자기의 위치가 어떠하였던가를 인식하지 않는 한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마땅한 바대로 즐거움을 누릴 수 없다. 언제나 적극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여러분은 부정적인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붙잡기 전에 빠져 있었던 상태를 인식하지 못하면 여러분은 응당 드려야 할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드리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을 상세하게 다루어 나가고 있다.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전혀 알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기만족에 빠져있고 모든 것이 다 잘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이해의 눈을 열으사 그들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다.
여러분은 머리로만이 아니라 마음속으로도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가? 여러분이 그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묵상할 때에 감격하게 되며, 사랑과 찬양의 감정으로 넘치게 되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위해서 해놓으신 일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1) 이 세상에서 문제가 되는 한 가지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대한 관계이다.
“그리스도 밖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든지 아니면 “그리스도 밖에” 있든지 둘 중 하나이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다. 이것은 현실적인 사실이요, 체험이다. 이것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지을 문제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다섯 가지 용어를 통해서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상세하게 말하고 있다.
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나라라는 말은 최소한 어느 한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들은 구별되고 나눠져 있어서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무엇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이다. 그는 그들을 따로 분리시키시고 그들에 대해서 특별한 관계에 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2:9) 그는 그들을 자신을 위해서 구분시켜 놓고,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시려고 그것을 하신 것이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암3:2) 성경에서 “안다”는 말은 매우 특별한 인격적인 관심과 배려를 의미며, 부성애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관심을 두는 범주 밖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고통은 그가 그 범주 밖에 있으며 하나님의 백성에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저 사람이 말하고 있는 것이 무슨 소리야? 무슨 뜻이지?”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 말이 매우 실제적으로 들리지 않는다면 참으로 큰일이며, 무서운 일이다.
②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붙잡으셨다. 아브라함에게 어떤 특별한 선함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다른 이교도들 사이에서 이교도 노릇을 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를 주목하고 축복할 것을 맹세하심으로 그것을 확신시켰고, 그의 후손들에게도 그렇게 하셨다. 하나님의 약속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계시를 주었고 환상을 주었고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그들에게 말씀을 보내셨다. 그것이 그들을 끊이지 않고 가게 행한 일이다. 그것은 히11장에서 묘사된 사람들의 비밀이었다. 바로 약속들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염려하지 말라 다른 나라들이 너희를 시기하고 멸망시키려 애쓰도록 내버려두라. 사람들이 너희를 대적하여 일어나도록 하라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너희는 내 백성이요 너희를 결코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나의 언약의 말씀과 나의 약속들을 붙잡으라. 그것들이 이루어질 것을 고대하라”
그러나 에베소 사람들은 그것들에 대해서 외인들이었다. 이방 나라들은 외인이었고 약속들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그것들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그것들에 관심이 없었던 절대적인 외인이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관계하여 살고 있지 않다. 그들이 성경을 읽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들을 감동시키지 못한다. 그 은혜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외인들이요 마치 다른 나라로부터 온 사람들과 같다.
여러분은 그것이 깨달아지고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있는가? 아니면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서 외인인가? 그리스도 밖에 있다는 것, 그리스도에 대해서 살아 있는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서 외인이라는 것, 이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2) “그리스도 밖에” 있다는 것에서의 필연적인 귀결들
① “소망이 없고” 분명히 그것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무서운 진술들 가운데 하나이다.
소망이 가버릴 때 아무것도 없게 된다.
이 말은 첫째로 그가 이 세상에서 아무런 소망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이 알고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심오한 생각을 가졌던 사상가들은 하나같이 비관주의자들인 것을 발견한다.
기독교신앙을 떠난 모든 종교들은 근본적으로 비관적이다. 그들이 제시하는 오직 유일한 이론은
잠깐 동안 이 세상에서 도피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어떠한 소망도 제시하지 못한다.
그것들은 계시 없는 깊은 생각이 가져온 산물들이다. 그것들은 모두 절망적이다.
이러한 것들은 모든 철학과 대 문학 작품 속에서도 발견된다.
이 모든 것은 전도서에서 매우 완벽하게 요약되어 있다.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1:2),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이래에는 새것이 없나니”(1:9)
세상에는 소망이 없다. 더 나아지는 것도 없다. 이 세상과 이생에서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어떠한 소망도 없다.
사물들이 나아질 가망성이 없을 뿐 아니라 사람 자신도 더 좋아질 가망이 없다.
오늘날 사람은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타락하는 순간과 마찬가지로 부패해 있다.
더군다나 기대해 볼 만한 것도 하나도 없다. 우리는 늙어가고 죽음은 필연적으로 오게 된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인생은 바로 그러하다.
- 우리는 다 꿈 같은 것으로 이루어지고
우리의 짧은 인생은 한숨의
잠과 같은 것일세 -
- 템페스트 속에 있는 어느 대사 중에서 -
이 세상에 소망이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저 세상에서도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이 틀림없다.
그들은 죽음 너머의 것을 볼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영위하고 있는 삶이다.
그들은 우리가 이 옛 복음을 들으며 예배당에 앉아 있기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은 생명을 가지고 있고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입장은 “소망이 없다”는 것이다.
② “하나님도 없는” 하나님에 대한 주관적인 체험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존재하신다.
이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누리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오는 모든 도움과 평강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도 이 세상에서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커다란 차이가 있다.
시편 기자와 하나님이 없는 사람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니”(27:10),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3:5),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사망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23:1-4)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 그는 “하나님이 없는” 자가 아니다.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61:2)
그는 거기에서 안전할 것임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이 점을 알지 못한다.
바울은 시련에 처해 있었다.“내가 처음 변명할 때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딤후4:16-17)라고 말하는
사도 바울과 그런 사람들은 얼마나 다른가?
옥중생활 속에서 디모데를 향해서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를 인하여 내가 또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하노라”(딤후1:12)
그러나 이 다른 사람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실” 날을 기대할 수 없다.
- “소망이 없는 것”과 “하나님이 없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세상에” 속해 있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처하여 있으며 정죄 아래 있으며
멸망당할 이 지나가는 세상에 속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만일 여러분이 그것을 안다면, 그것의 의미하는 바를 안다면 여러분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리스도에게 빨리 나아가라. 에베소 사람들은 한때 그런 위치에 있었지만
“그러나 이제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를 믿고 그를 의지하고 그가 말씀하시는 데 따라서 행동하고 여러분에게 해당되는 모든 것을 고백하고
그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에 여러분을 자신을 던지라. 그러면 그가 여러분을 받으실 것이고
그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내가 독생자를 보내사 너를 위해서 죽게 하고 피 흘려 나와 화목케 했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네가 나의 자녀가 되도록 했으며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 되도록” 했다고 그렇게 일러 주실 것이다.
여러분은 새로운 생명을 가지고 있음과 새로운 소망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그런 자리에 있다면 즐거워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 그보다 더한 것이 없다.
그것은 지상에 있는 천국이다. 그것은 영원한 행복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