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존스

로이드 존스, '에베소서 강해', 2권, 16장 가까워짐 (김영희요약)

강대식 2022. 11. 23. 21:48

16 장 가까워짐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2:13)

 

- 사도는 여기서 이 기독교 구원의 위대성을 세우려 하고 있다.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 되게 한 그 능력은, 정확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가운데서 끌어내사 영광스런 부활로 그를 나타내시고 그를 높이 일으키사 하늘에 오르게 하셔서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게 하셨던 바로 그 능력과 같은 능력이다. 그것이 논증의 주제이다. 우리는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나무들도 영광스럽지만 숲은 더욱더 위대하고 훨씬 더 영광스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를 마음속에 함께 붙잡도록 하라.

 

사도가 쓰고 있는 편지의 주제나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기를 바라는 주제는 믿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다. 우리의 마음이 작고 연약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성령의 도움이 필요로 할 것이다. 바울이 에베소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던 바와 같이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히사우리가 이것을 진실히 알기를 위해서 기도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원의 위대성을 이해할 것이면 두 가지 요점이 진수가 되는데, 첫 번째는 구원 밖에 있는 우리의 조건이 어떠한 것인가를 인식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구원의 결과로 인해서 되어진 우리의 조건을 인식하는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이 2:12에서 묘사된 바의 구원을 떠나 있던 우리의 조건을 살펴보았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니라 그가 누구이든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이 기이한 일이다. 만일 이 위대한 능력을 측량하려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빠져 있었던 깊이를 재보아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역시 우리가 높여지고 그 올라간 높이가 어떠한 것인가를 측량해 보아야 한다. 처음에는 그리스도 밖에 있고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우리가 이 두 측면을 인식해야 하는 것은 본질적인 것이라고 역설한다.

 

사람들이 자기들의 구원에 대해서 불안해하고 확신이 부족할 때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에 기쁨이 없을 때 그것은 주로 두 가지 일 중 하나에 보통 기인하거나, 매우 흔히 두 가지 모두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들은 죄에 대해서 진정으로 깨달은 적이 없고 자기들의 무능에 대해서 진정으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또는 그리스도인들로서의 참된 지위를 안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가지 일은 반드시 함께 취급되어야 한다. 신약성경에서 그것들은 언제나 예외 없이 처음은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것이요 그 다음에 적극적인 것이다.

 

사도는 언제나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것부터 시작한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서 에베소의 장로들을 불러 작별을 고하며 그가 가르쳤던 것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20:21) 여러분은 사도 바울이 먼저 그리스도에게 오라고 한 다음에 회개하라고 말하는 것을 결코 보지 못했을 것이다.

 

여러분은 구원의 위대성을 인식하는가? 여러분의 구원을 누리고 있는가? 여러분의 삶에 있어서 다른 어떠한 것보다도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그 사실을 더 자랑하고 있는가? 사람이 이것을 진정으로 알게 될 때 그가 말할 것은 한 가지뿐이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노라 그것에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우리가 이것을 진정으로 이해했는지 그렇지 못한지를 테스트하는 좋은 시금석은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여기 13절 한 구절 속에 있다. 바울은 먼저 하나의 문장을 통해서 그가 다루는 전체적인 주제를 진술한다.

 

-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이것이 전체 복음이다. 이것은 기독교 메시지의 진수 그것이다. 여기에 세 가지 요점이 있다. 첫째, 우리가 어떠하였으며 지금은 어떠한가에 대한 대조적인 차이이다. 둘째, 우리가 지금 어떠한가 하는 것이다. 셋째, 우리가 현재 이렇게 된 것이 어떻게 된 것인가 하는 것이다.

 

1. 첫째,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었으며, 지금은 어떠한 사람인가에 대한 대조

사도는 죄와 허물로 죽어 있던 자신에 대한 비참한 진상을 보여 준 다음 갑자기 4절에서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라고 한다. “그러나”, “이제는이러한 말들은 바울의 위대한 말이요, 대조 방식을 나나내는 말이다. 모든 복음은 여기에 응축되어 있다. 여러분은 인간의 말 가운데 가장 위대한 말이 그러나라는 느낌이 드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이 기독교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에 무엇인가 결점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은 소망의 그러나이다. 절망과 어둠과 음침함에 대한 종말이 왔음을 말해 주는 그러나이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그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이 말들은 절대적인 본질적인 차이를 보여 주는 것으로써 신약성경 어느 곳에서나 강조되어 있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사이의 절대적인 차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아닌지 그리스도인인지에서 말하는 것에는 하등의 어려움이 없어야 된다. 그것은 검정색에서 흰색으로 나아가는 동안 여러 단계의 회색지대를 거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흑이 아니면 백이다. 사도는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대조는 분명하고 뚜렷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로서의 자기들의 전체 지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현재 어떠한 상태에 있느냐가 아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우리가 어떠한 관계에 있느냐가 바로 그것이다. 바울은 가까워졌느니라고 말한다. 그는 지금 개선되었다라든지 보다 선한 생활을 살고 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문제는 하나님께 대하여 가까이 왔는가? 하나님을 아는가? “지성소에 들어 왔는가? 그것이 오직 한 가지 관심이며 의문이다. 성경에 의하면 가장 비열하고 어리석은 죄인과 가장 훌륭한 죄인 사이에 차이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문 밖에 있다. 왕 앞에 알현하여 있지 않다. 오직 유일한 관심은 그들이 문 밖에 있느냐 문 안에 있느냐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을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인 관계의 차원에서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이 그것을 선행과 착함의 차원에서 생각하기를 고집하는 것이다. 시금석은 적극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 “전에는, 지나간 때에는 이러한 대조는 극단적인 것이며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 없다.

 

2. 둘째, 우리는 그리스도인들로서 어떠한 사람들인가?

가까워졌느니라라는 말은 멀리 있던”, “외인이던”, “하나님이 없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살아 있는 관계가 없는이라는 말에 대한 대조이다.

그러나 이제 가까워졌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 관한 완전한 진상이다. 사도는 성전을 생각하고 있다. 예루살렘 성전은 여러 장소로 나누어져 있었다. 가장 중요한 곳은 지성소로 하나님의 임재가 시현의 영광 속에서 나타났던 가장 은밀한 성소였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1년에 한 번씩 그 지성소와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수 있었다. 그 다음에 여러 뜰들이 있었다. 가장 밖에 있는 뜰은 이방인의 뜰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들은 백성의 뜰에조차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가장 멀리 있던 자들이 가까워졌고 매우 놀랍게도 지성소에 들어감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지위이다.

 

1) 그리스도인은 그가 어떤 것을 체험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이제 가까워졌으며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수 있고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에 유대인들은 구별된 사람들로써 그들의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갔지만, 이방인들은 나아갈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수 있는 것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된 유대인들과 함께 들어간다.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었느니라

그것은 인생 중에서 가장 놀라운 일이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죄 지었을 때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였으며 에덴의 동편 그 문에 하나님께서는 화염검과 그룹들을세워 놓으셨다. 사람들이 낙원으로 곧 에덴동산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존전에 대해서 닫혀져 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문이 열려져 있고, 인간은 타락과 죄와 수치와 그에게 해당하는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다시 하나님께 되돌아가고 나아감을 얻게 되었다. 속죄가 있었던 것이다. 가까워지고 영광의 왕 앞에 알현되었다.

 

바울은 앞에 있는 구절에서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은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서 외인이라고 말해왔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이방인들이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이제 그 언약에 들어오게 되었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그로 말미암아 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새 언약에 충만한 복락을 누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8:10-12에 새 언약에 대한 완벽한 묘사가 있다. 그것은 예레미야 31장에 있는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31-34)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가까워지는 것이고 그 언약 안에 들어오는 것이고 이 모든 것이 내 것이다라고 하는 말을 듣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기독교이다. 여러분은 종교적일 수도 있고, 하나님에 관한 어떤 것들을 알고 믿을 수도 있다. 또 하나님에 관해서 관심을 가질 수도 있고 하나님에 관한 책을 읽을 수도 있으며 하나님에 관한 강좌와 논증을 들을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 아는 것!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그것이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이 의미하는 바이다.

 

2) 이제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4:16) 여러분이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기도하는가? 여러분은 긍휼을 얻은 자라는 것을 아는가? 그것이 가까워진 사람의 지위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10:19-22)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다. 그를 막을 자가 하나도 없다.

 

3) 우리는 충만한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그의 존전에 나아간다. 여러분이 의심과 불안으로 가득차서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은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 그것은 기도가 아니다. 기도하는 방식은 충만한 확신을 가지고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며 하나님과 여러분의 관계를 알며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태도를 확신하고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감을 얻는 사람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사람이다. 비록 그가 거룩하시고 영원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있지만 그는 자녀의 신뢰심을 가지고 나아간다. 그는 손에 자기의 친자 확인서를 가지고 있다.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아는 것만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8:15)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입장이다. 그는 말의 형식이나 외모나 아름다움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그는 좀 하나님을 멀리 떨어져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자기 아버지에게 나아간다. 그의 모든 마음을 아버지에게 향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이 자기에게 열려져 있음을 안다. 그것이 참된 기독교이다. 이 사람들의 전 상태와 지금의 위치 사이에 있는 차이는 놀라운 일이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 그는 자기 머리칼 하나도 세신 바 됨을알고 어떠한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자기를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4:8) 그러나

내가 그 길을 알지 못하는 한 어떻게 하나님께 가까이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유일한 길은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서이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그리스도의 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모든 사람에게 있는 표적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의 표적이다. 그것이 여러분에게 있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성소로 나아갈 수 있는 자유로운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존전에 있는가? 확신과 신뢰감을 가지고 기도하는가? 하나님을 아는가? 하나님과 교제를 즐기고 있는가? 하나님께 가까이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언약의 모든 복락들을 체험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