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주일설교,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마 22:37-40
2023-01-22 주일예배
본문: 마 22: 37-40
제목: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1.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40)
‘강령’은 기본이 되는 큰 줄거리, 요약한 규범이다.
‘온 율법과 선지자’는 모세 오경의 율법과 모든 선지서이다.
구약성경을, 정경으로 완성될 때까지는 이렇게 표현하였다.
신약 성경까지 완성이 된 지금에는 모든 성경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신 구약 성경 전체를 두 계명의 강령으로 요약하여 주셨다.
이 두 계명을 제대로 지키면 그는 성경을 다 지킨 것이 된다.
이 두 계명을 지키지 못한다면 성경과 신학을 아무리 많이 안들 아무 소용이 없다.
주님은 부활 후 승천하시면서 말씀하셨다. 마지막 유언과 같은 명령이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분부한 모든 것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구약성경과, 후에 이루어진 신약성경, 모든 것이다.
모든 성경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이다. 주님의 명령이다. 그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가르쳐 지키게 할 때, 주님이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교회는, 목사는, 최우선적으로 성경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한다.
어떤 본문을 택하여 설교하든 두 계명, 온 강령이 중심이 되어야 하고 결론이 되어야 한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이 중심이요 결론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목사는, 그 교회는, 성경을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명목상의 교회요, 명목상의 목사일 뿐이다. 가짜이고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이다.
두 계명, 온 강령은 목사와 교회, 그리고 기독교 전체를 붇드는 기둥이요 핵심 요소이다.
두 계명이 무슨 뜻인지 이해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어떻게 얼마나 실천하느냐에 있다.
믿음과 사랑은 성경에서 항상 붙어 다니고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한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2,13)
사랑이 없으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 헛된 믿음일 뿐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라는 것은, 바로 사랑의 행함이 없는 것이다.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로 고민해야 한다.
교회의 설교와 모든 가르침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내 가족부터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무슨 전도며 종교를 강요하는가?
사랑을 실천하면 오지 마라 해도, 그 사랑이 궁금해서도 교회에 나오게 될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다가,
자기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을 만들고,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다 둘 다 구덩이에 빠지고 있다.
유대교회 로마교회 개혁교회 현대교회 다 사랑은 실천하지 않고,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며 하나님을 헛되이 섬기게 하고 있다.
사람의 지혜와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것은 많은데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실천은 그 중심이 되지 못하고 있다.
마음은 온통 세상의 것이 차지하고 있고,
입술로만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하고 있으니,
세상은 날로 어둡고 혼란스러워 갈 뿐이다.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기는커녕
자기 이익 추구와 탐심과 방탕과 악독으로 충만하고 있다.
교회는 예나 지금이나 장사하는 집이요 강도의 소굴이 되어 가고 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지 않고 세상의 영에 사로잡혀 있는 한,
그 굴레와 어둠과 저주에서 풀려나지 못할 것이다.
영적인 것은 영적으로만 분별할 수 있다.
성령의 지혜로 성경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한다.
성도들은 그 성경을 가르침 받아 지켜 행해야 한다.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나 지금이나, 교회와 내 백성들이 얼마나 분별력이 없고,
무지몽매하고, 마이동풍 우이독경하고 있는지, 돌아보고 돌이켜야 한다.
베뢰아 사람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지 않고, 성경을 매일 상고하지 않으면,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인다고 거짓 선지자들의 노예가 되고 멸망으로 인도되고 만다.
사도들에게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켜야 한다.(살후2:15)
그것이 주님의 명령,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에 순종하는 것이다.
사도들의 가르침에로 그 가르친 전통으로 돌아가야 한다.
청교도가 아닌 성경도 신앙을 연구하고 본받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것만이 사람의 지혜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 사로잡힘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길이다.
초대교회는 첫째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였다. 우리도 가르침과 배움이 첫째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호렙산에서 십계명으로 요약하여 주셨다. 두 돌판으로 주셨다.
주님은 모든 성경을 크게 두 강령으로, 두 계명으로, 요약해 주셨다.
그리고 두 큰 계명의 관계를 ‘그와 같은 것으로’ 첫째와 둘째로 연관시켜 주셨다.
2.. 크고 첫째 되는 계명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22:37-38)
‘네 마음을 다하고’
하나님은 내 마음 전부를 달라 하신다. 부분이나 재물과 겸하여서가 아니다.
마음을 다하는 사람이 목숨도 다하고 뜻도 다한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29:23)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15:8)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아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입으로만 가까이 하고 입술로만 공경할 뿐이다.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
네 보물 있는 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고 하셨다.
네가 하나님을 보물로 여긴다면 네 마음도 거기 있다.
네가 돈과 재물을 보물로 여긴다면 네 마음도 거기 있는 것이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면,
마음이 육체와 하나가 되면,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요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것이다.
이 세상 풍조를 그대로 따르고 허물과 죄로 죽은 영혼이다.
마음은 육체와 하나가 아니라 성령과 말씀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마음을 다하는 것이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은 서로 대적하고 거스른다.
육체의 욕심을 따르는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익을 따른다.
“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름이라”(겔33:31)
네가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며 음악을 잘하는 자 같이 여길 뿐이다.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를 유행가 가수 쯤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에 있었음을 알리라”
마음을 다하는 하나님 사랑은 한결 같고 두 마음을 품지 않고 심지가 견고한 사랑이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26:3)
심지(心志)는 마음 속에 품은 뜻이다.
하나님을 향한 심지가 견고해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켜 주신다.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은 어떠한 것인지
다니엘과 세 친구가 보여 주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3:17-18)
“다니엘이 이 조서에(어기면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한)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6:10)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들의 열전이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전당에 나와 있다.
아벨, 노아, 에녹, 아브라함, 모세, 기생 라합,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11:38)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과,
반드시 상 주시는 분임을 확실히 믿는다.
바라는 것들을 실상으로 믿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증거로 믿는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믿고 바라고 믿는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면 모든 것을 더해 주심을 믿는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안다.
지금 우리가 잠시 받는 고난이 앞으로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이룰 것을 믿는다.
마음을 다해 목숨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능히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과 같다.
자기의 부모 처자식 형제 자매,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지 아니하면,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주님의 제자가 능히 되지 못한다고 하셨다.
사울은 마음을 다해 재물을 사랑하다가, 솔로몬은 이방여인들을 사랑하다가 버림을 당하였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만을 육신의 정욕으로 안목의 정욕으로 이생의 자랑으로 사랑하면,
그가 받을 것은 축복이 아니고 저주요, 천국이 아니고 지옥일 것이다.
한나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게 되었기에,
아들을 서원대로 드렸고, 하나님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즐겁게 되었으며, 뿔이 높아졌으며, 원수들을 향해 입이 크게 열리게 되었다.
하나님을 경외함은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뜻을 다해 사랑함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드림으로 인하여 경외함을 인정 받았다.
“네 아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
3. 크고 둘째 되는 계명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둘째도 첫째와 같다고 하신다.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다. 첫째 없이 둘째 없다.
첫째 계명을 지키지 않고서는 둘째 계명을 지킬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 사랑 없이 이웃을 사랑하고 만인을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허황되고
실제로는 불가능한 것임을 첫째와 둘째의 연관에서 알 수 있다.
이웃 사랑 만인 사랑이 안 되는 근본 이유는 첫째 사랑, 곧 하나님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는 그의 기도와 구제가 상달되었다고 했다.
기도는 하나님 사랑의 표현이요 구제는 이웃 사랑의 표현이다.
우리도 두 가지가 상달 되도록 힘써야 한다.
요한일서 4장은 사랑 안에 거하는 자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한다고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엡5:21)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관계와 순서를 말해 준다.
그리스도를 경외함, 마음을 다한 그리스도 사랑이 없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다.
모든 중요한 인간 관계가 어그러지고 원수지간이 되고 회복 불능 상태에 빠진다.
먼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경외와 복종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순서이다.
성령으로 거듭나고 회심하고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경외할 수 있다.
야고보 사도는 하나님 사랑의 경건(첫째)도 이웃 사랑(둘째)과 같다고 하였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