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주일설교,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롬 8:38-39
2023-02-05 주일설교
본문: 롬 8:38-39
제목: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1.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해야 한다.
“내가 확신하노니”(롬8:38)
우리에게 항상 부족한 것이 믿음이고 확신이다.
확신은 믿음의 윗 단계이다.
사도들은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복음을 전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살전1:5)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을 위해 우리도 기도하고 구해야 한다.
사도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오순절 성령을 받은 후에야 이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전 단계로, 성령이 쓰신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도 확신을 가져야 한다.
바울은 확신하면서 하나님 사랑에 대해 팡파레를 크게 울리고 있다.
이 8장의 마지막 두 절을 팡파레라고 한다.
로마서 1장에서부터 논증해 온 죄로부터의 구원,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결론지으며
그 확신 속에서 울리는 승리의 찬가요 큰 나팔 소리이기 때문이다.
이 믿음의 확신이 있다면, 우리는 두려울 것이 없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확신한다면, 낙심하거나 불안해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의 믿음은 고난을 통해 연단 받으며 확신의 단계로 올라가야 한다.
그래야 시온 산처럼 흔들림이 없는 확신의 믿음으로 성장한다.
고난에 자꾸만 흔들리고 요동하는 것은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의 찬가를 부르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단계적으로 설명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끊을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잘 알 수 있다.
2.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5,37)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고 했다(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은 이기기 위함이고 영생을 얻기 위함이다.
고난에 대한 싸움이 믿음의 선한 싸움이다.
고난은 왜 주시는가?
믿음을 시험키 위함이요, 단련시키기 위함이요, 성화성숙을 만들기 위함이다.
약속의 땅, 가나안은 광야를 통과하여 간다. 광야의 연단을 거쳐야 한다.
왜? 자연인의 모습, 옛 사람의 모습으로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갈 수 없고,
거룩하신 그분이 약속하신 기업과 축복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미신은 빌기만 하면 축복한다 하고, 굿하고 축복성회하며 정성을 보이면 된다고 한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먼저 우리의 죄부터 해결하고 의롭다 함을 받고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어야만 그 앞에 갈 수 있다.
그 앞에 갈 수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분의 복을 받을 수 있겠는가?
우리의 죄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사역을 믿음으로써만 해결할 수 있다.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다.
믿음은 성령으로 거듭난 자에게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비로소 그리스도인으로 출생하고 그리스도와 사랑의 관계를 맺는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한번 영으로 맺어지면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영원한 사랑이다.
그 그리스도의 사랑을 끊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환난. 우리를 압박하며 짓누르는 고난이다.
곤고. 마음의 괴로움과 번민이다.
박해. 추방 당하며 쫓겨가는 것이다.
적신. 벌거벗은 몸. 다 빼앗긴 몸이다.
위험. 생명의 위험이 되는 모든 것이다.
칼. 폭력적인 죽음을 상징한다.
환난으로 시작해서 사망에 이르는 칼의 위험까지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심지어 종일 죽임을 당해도 그 사랑에서 끊어지는 것이 아니다.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다 함과 같으니라”(롬8:36)
사탄과 악인들은 어떻게든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려고 한다.
낙심하고 불안하고 불신하고 포기하기에 이르게 만들려고 한다.
믿음과 인내가 없으면 감당할 수 없고, 약속의 소망을 붙들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
보이는 것의 소망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소망은 영원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으로 붙들었다면, 하나님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려야 한다.
고난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요, 그 고난을 통해 소망을 이루어 주실 분도 하나님이시다.
이루시는 그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환난은 인내를 이루고, 인내는 연단을 이루고, 그 연단이 약속의 소망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 이치와 과정과 결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면, 낙심하고 포기하기에 이른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게 하신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하신다.
우리가 장차 받을 영광과 축복은 우리가 현재 받는 고난과 비교할 수 없다.
고난 끝에 위로와 축복 받는 것이 좋은가?
위로와 쉬운 길만 좋아하다 멸망으로 끝나는 것이 좋은가?
사울 왕의 길이 좋은가? 다윗 왕의 길이 좋은가?
하나님이 사람 만들고 쓰시는 방법, 훈련을 통해 세우시는 방법은,
하나님께 쓰임 받은 대표적인 사람들의 생애를 보면 알 수 있게 하셨다.
아브라함의 생애, 요셉의 생애, 다윗의 생애, 모세의 생애를 보면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은 흉년 들어 애굽으로 가야 했고, 25년이나 기다려 이삭을 얻었으며,
그 말년에 얻은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요셉은 어린 나이에 노예로 팔리고, 억울한 감옥살이를 통과해야 했다.
다윗은 사울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해야 했다.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처가살이하며 양떼를 기르는 목동생활을 통과해야 했다.
그들의 생애 방정식에다 현재 나의 상황을 대입하면, 내가 현재 어디쯤 와 있는지,
그 결말은 어찌될 것인지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다.
믿음이 없으면, 남과 비교나 하며 낙심하고, 결말을 기대도 못하고 절망하게 된다.
낙심이 오고 불안과 포기의 마음이 몰려올 때, 방법은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것이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42:5)
하나님은 목적과 뜻이 있어서 고난을 주셨는데, 그 고난 해결하기에만 급급하여
사람을 의지하고 가진 것의 힘을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인내하며 회개하며 축복의 그릇을 만들어 가며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사람을 권력으로 의지하면 사막의 떨기나무 신세로 끝난다고 하였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렘17:5-6)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니라”(7-8)
하나님은, 사람이 늙어도, 겉 사람은 고난으로 낡아져도 속 사람은 새롭게 하셔서,
여전히 결실하고,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게 하신다.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고, 레바논의 백양목 같이 성장하게 하신다. 그것을 믿으라.
이 모든 일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일어나는 일, 과정임을 믿어야 한다.
사탄도 악인들도 잠시 고난을 줄 수 있겠지만, 그것도 그리스도의 허락하에,
그것들이 주는 환난, 적신, 위험, 칼의 사망도 그리스도의 사랑은 결코 끊을 수 없다.
그 그리스도의 사랑은 끊을 수 없음을 믿는 믿음은 어디서 오는가?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듣는 데서 온다.
말씀을 듣지 않으면, 예배를 빼먹으면, 있던 믿음도 사탄이 뺏어가고 그 노예가 되게 한다.
세상 지혜로 혼합하지 않은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성령님은 능력으로 역사하고, 주님은 사랑을 쏟아부어 주시고, 하나님은 은혜와 복을 주신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나는 것을 믿으라.
3.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하나님 외에 모든 만물 모든 사건 모든 역사 다 피조물이다.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온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면, 그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우상일 뿐이다.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아무리 많이 불러봐야 성경의 하나님과는 관계 없다.
아쉬울 때, 위기의 때에, ‘하나님’ 소리를 아무리 외쳐 보아도 그것은 우상일 뿐이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죽음일 것이다.
그러나 사는 것도 그렇게 쉽지가 않은 문제이다.
사활이 걸린 문제와 위기 앞에서는 인간의 무능이 가장 실감이 된다.
사망을 이기면 생명은 활성화 되고 두려울 것이 없어진다.
화형의 불 앞에서도 순교자들이 가장 믿고 의지한 말씀이 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10:28)
사망이나 생명이나. 죽는 문제나 사는 문제나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다 이루어지고 있는 문제이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다.
인간은 아무리 업적을 이루어도 그 영광은 썩어질 것이고,
아무리 강한 권세라도 화무십일홍 권불십년이다.
하늘 나라도 땅의 나라도 어떤 인생도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금의 위기와 문제 가운데 너무 힘들어서 낙심 천만일지라도,
우리가 사로잡힐 것은 염려와 걱정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손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다 이루어지고 있는 생과 사의 문제일 뿐이다.
극심한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믿고, 그리스도의 끊을 수 없는 사랑을 믿고,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내주신 이가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심을 믿어야 한다.
그분은 살아 계시며 통치하심을 믿고 반드시 상 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한다.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능력이나.
그 어떤 영적 세력들이나, 박해하는 정치 권력자이나 그 능력일지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현재 어떤 상황, 어떤 처지에 있든, 장래 일어날 어떤 고난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세상의 영광과 출세의 높음이나, 세상의 수치나 모욕의 깊음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우리는 약대 지하 2년 개척 2년, 멱우리 빈집 15년, 화서 빈손 4년, 향남 2년의
지극히 낮아짐의 깊이를 경험했다.
하나님은 낮아진 자를 높이시고 높아진 자를 낮추시는 분이시다.
고난으로 깊이 낮아진 자를 진토와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영광의 자리에 앉게 하신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는 것은,
우리 생애의 모든 일과 과정이 하나님의 손 안에서 통치 가운데 일어난다는 것이요,
그 결말도 하나님의 능력과 계획과 목적 가운데 마침내 축복의 열매로 맺어짐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6)
그 모든 과정에서 우리는 그 사랑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넉넉히 이기고 극복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승리의 찬가, 팡파레가 울려퍼질 날이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