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 주일설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눅 5:36-39
2023-02-19 주일예배
본문: 눅 5:36-39
제목: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오늘 본문에 대한 유명 기존 해석들을 보고 놀랐다.
(매튜 풀) 제자들은 이제 새롭게 회심한 사람들이기에 혹독한 경건의 훈련을 시킨다면
낙심해서 그만두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된다. 습관은 대단한 폭군이어서 사람은 자기가 이전에
습관적으로 해 왔던 것들을 갑자기 단번에 끊을 수 없고 점진적으로만 끊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조급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주님이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매튜 헨리) 오늘 본문에 대한 칼빈의 해석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칼빈은 이 말씀을 바리새인들에 대한 훈계, 즉 금식을 자랑하지 말고,
금식한다고 요란하게 떠들며 과시하지 말며,
그의 제자들이 그들처럼 표를 내지 않는다고 멸시하지 말라는 훈계로 해석한다.”
(매튜 헨리) 덧붙여 이렇게 해석한다.
“바리새인들의 신앙 고백은 거품이 잘 일고 빛깔이 좋은 새 술처럼
화려하고 떠들썩한 것이었지만, 모든 지혜로운 자들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묵은 포도주는 술잔에 담겼을 때에 빛깔이 별로 좋지 않지만
배를 더 따뜻하게 하고 건강에도 더 좋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경건의 모양은
별로 갖추고 있지 않았지만 경건의 능력은 그들보다 더 많았다.”
그러나 내가 볼 때, 이 본문들은 결코 점진적인 변화에 대한 것이 아니다.
묵은 포도주에 대한 예찬이 아니다.
같은 장 11절에 예수님이 시몬에게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그들(야고보와 요한)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점진적인 변화를 거치며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같은 장 27절에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랐다고 말씀하고 있다. 점진적으로 따르지 않았다.
1.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다”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눅5:36)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방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예수께서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하셨다.
그들이 또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예수께서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그러나 그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하셨다.
그러시면서 또 비유하여 이르신 말씀이 오늘 본문이다.
이 비유를 볼진대 새 포도주, 새 옷은 빼앗기게 될 신랑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옛 습관을 점진적으로 버리는 비유 또는 점진적인 경건의 훈련은 아닌 것이다.
점진적인 변화를 한다는 것은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것과 같다.
그것은 새 옷을 찢을 뿐이요 찢은 새 옷 조각과 낡은 옷은 어울리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낡은 옷, 곧 잘못된 전통과 가르침에 찌든 유대교회에다
새 옷 곧 그리스도의 새로운 전통과 가르침 한 조각을 붙여서
점진적인 변화를 시도한다는 것은 말은 그럴싸하고 좋은 타협 같지만
그렇게 해서 역사는 바뀐 적이 없다.
가진 자들은 항상 점짐적인 변화를 추구한다.
왜냐? 현재 가진 것은 변함 없이 유지하면서 문제점은 서서히 개선하면 된다는 것이다.
전체 사회가 썩어문드러져 가고 있는데도, 기득권을 유지하려다가
결국은 혁명이 일어나서 전체가 엎어지고 새로운 세력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반복이 역사다.
기독교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이지,
생베 조각을 기득권 헌 옷에다 덕지덕지 덧붙이는 것이 아니다.
회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옛 것은 지나가고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가 되는 것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곧 새로 태어나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회개이다.
생베 조각을 낡은 헌 옷에다 붙일려고 하는 것이
로마교회가 문제가 있을 때마다 한다는 개혁이었고,
16세기 종교개혁도 개신교가 탄생한 것처럼 호도하지만
그것은 결국 로마교회의 부패와 폭정과 횡포를 개혁하려는 문서작업이었을 뿐이다.
문서 작업만으로 역사가 바뀌고 새 역사가 탄생하는 법은 없다.
글쟁이들이 희생없이 호도하고 이익을 따먹는 것일 뿐이고, 다수가 속아 왔다.
땀과 피의 희생 없이, 교회와 사회가 새롭게 변화된 적은 인류 역사에 없다.
교회 개혁도 사회 혁명도,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피를 먹고 자라왔다.
13세기에 유럽 전역에 폭발적인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그것이 르네상스를 낳기까지,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와 희생이 있었고, 그 열매였던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13세기의 개혁의 부산물이요 도적질이었다.
13세기 종교개혁의 실체와 영광을 도적질하고 오로지 자기들의 공로로 이루어진 것처럼
5백년 동안이나 속인 것이다.
문서작업만으로, 생베 조각을 낡은 헌 옷에다 붙임으로, 종교개혁이 성공했다고 보는가?
점진적인 개혁? 좋아하지 마시라. 속지 마시라.
새 옷 조각을 낡은 옷에다 붙이는 자가 없다고 주님 말씀하신다.
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눅5:37)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세우신 새 언약 복음이 새 포도주이다.
낡은 가죽 부대에 넣었더니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된 모습이
바로 5백년 개혁교회와 현대교회의 모습이고 실상이다.
의식과 예식과 건물은 유대교회 로마교회를 그대로 닮아 화려하고 멋있는데,
내용은, 이사야서 58장의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의 행위들은 찾을 길 없고,
마태복음 25장의 양의 무리의 행위들 또한 찾아보기 어렵고,
야고보서 1장의 경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과는 멀어도 너무 멀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호6:4)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
주님은 그런 자가 없다고 하시는데, 왜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계속 넣어서
포도주도 부대도 못쓰게 할까요?
그들 보기에는 잘하고 있다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 유대교회 로마교회들 개혁교회들 현대교회들은,
엘엘로헤 이스라엘의 제사로 명맥만 유지할 뿐이었다.
새 포도주의 생명과 능력은 벌써 상실하고 허상과 우상으로 그 믿음을 채울 뿐이었다.
사람의 지혜에 의존하고 영적 분별력을 잃은 믿음은 멸망당할 자기 의일 뿐이다.
나의 옛 사람의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 복음 넣고 안심하는 일을 그만 두어야 한다.
나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기고 버리는 회심을 반드시 해야 한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아 진정한 회심에 이르러야 한다.
그 변화된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어야 한다.
3.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라”(눅5:39)
묵은 포도주에 익숙하여 묵은 것이 좋다 하는 사람은
결코 새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유대교회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하였고, 개혁교회와 현대교회도 그리하고 있다.
말이 개혁이고, 말이 현대이지,
그들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은 항상 세상의 그것들과 차이가 없다.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경건은 찾아볼 수가 없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찾는 자 없고,
오로지 자기의 나라와 자기의 의를 찾을 뿐이다.
내가 왕이 되어 내 소견에 옳을 대로만 살 뿐이다.
그러다 보니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고 그 양극화의 분쟁과 아귀다툼 속에서
교회와 세상은 더욱더 혼란스러워지고, 어둠과 공허를 양산하고 있다.
하나님이 없을 때 지배하는 흑암과 혼돈과 공허가 더욱더 많아지고 멸망으로 치닫고 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라.’
진정으로 새 것, 새 포도주를 원하는 자는 드물고 찾아 보기 어렵다.
하나님의 남겨두신 칠천 명,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하고 입맞추지 아니한 자를 찾기 어렵다.
여러분, 구원의 문이 크고 길이 넓은 줄로 알았다가는 무섭고 놀라운 일을 겪게 될 것이다.
종교적인 행위들 만으로 안심하고 있다가는 크게 경칠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노략질하는 이리들인 거짓 선지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일만 스승들이,
한 없이 넓혀 놓은 천국 문은 사실은 영원한 불의 지옥 문인 것을 알아차려야만 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생 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여놓고 안심하다가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고 안심하다가는,
나라의 본 자손들이었지만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이를 갈고 슬퍼하는 이스라엘의 운명에 처하고 말 것이다.
점진적인 변화의 노래에 홀려, 같이 춤추다가는,
하루 동안에, 한 시간에 멸망하는 바벨론의 신세가 되고 말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적인 변화의 회심만이 살 길이고 구원의 길이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주장이다.
“기독교 세계의 모든 것을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사람이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자격과 권한은 어떤 위대한 신적 감화를, 단번에 엄청난 변화를 받음으로써 얻는 것이지,
사람들이 자신의 노력을 행사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점진적 변화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성령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영향력과, 갑작스럽고 극적인 회심을 믿었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는 것은 이러한 극적인 변화와 회심으로 출발하는 것이다.
장로교는 칼빈의 관용을 쫓아 점진적인 교육에 의한 변화를 말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말씀은 무섭고 놀라운 말씀이다.
장사하는 집이요 강도의 소굴이 된 유대교회와 이스라엘을 무섭게 사망선고 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세우는 주님의 교회를 새로 세우실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일을 주님이 세운 열 두 제자 곧 사도가 비로소 할 것이고
주님이 보내 주시는 오순절 성령을 받아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이루실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낡은 옷이나 낡은 부대로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인 교회를 세울 수 없다는 말씀이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는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을 때에만 세울 수 있음을 명확히 하는 말씀이다.
우리는 하루 속히, 복음서와 사도행전 바울서신 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는
초대교회의 새 포도주 새 부대의 모습과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한다.
발도인들 바울인들 위그노들의 성경적 삶의 변화와 모범을 본받아야 한다.
존 폭스의 ‘기독교 순교사화’를 필히 읽으며 참된 기독교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배워야 한다.
권현익 선교사가 발로 쓴 ‘16세기 이전 참 교회의 역사’를 꼭 읽고 배우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들도 초대교회의 역사는 되찾았으면서도, 16세기 종교개혁에다 찍어 붙이기는
마찬가지다. 결별을 못하고 영 줄기가 다른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말만 많고 책들만 많고 행함은 없는, 개신교 5백년 역사가 낳은, 개혁교회 현대교회의,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해야 한다.
어떠한 견고한 진도 무너뜨릴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일을 행해야 한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지 않으면 이 세대를 그대로 본받아 살게 되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은 영영 분별할 수 없게 된다.
베뢰아 사람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해야 한다.
청교도가 아닌 진정한 성경도가 되어야 한다.
성경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며 그 안에 기록된 대로 지켜 행해야 한다.
그 믿음과 행함만이 복과 형통한 인생, 천국과 영생을 살게 해준다.
떡으로만 살고 바벨탑만 쌓다가는 사망과 멸망에 이르고 만다.
소프트 파워가 하드 파워를 낳는다는 것을 명심하자.
말씀으로 사는 소프트 파워는 어떻게 정립이 되는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과정을 통과해야만 한다.
보지 못하는 것을 소망으로 바라면 하나님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주를 위해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는 역설을 살아내야 한다.
아브라함 요셉 모세 다윗의 생애에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비결을 배워야 한다.
이리로, 이 환경으로, 이 고난으로 보낸 자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면, 모든 것을 더해 받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