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4 주일설교, '먹으로 영으로', 고후 3:1-6
2023-09-24 주일설교
본문: 고후 3:1-6
제목: 먹으로 영으로
1. 너희는 먹으로 돌판에 쓴 편지가 아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고후3:3)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은 먹으로 돌판에 써서 주신 것이다.
율법 조문을 읽고 외우고 묵상해도
영의 역사가 없으면 그것 또한 머리의 돌판에 먹으로 쓰는 것이다.
사람은 마음에 있는 것을 행하지, 머리에 있는 것은 행하지 않는다.
머리에 있는 것은 그 지식으로 남을 정죄하고 비방하고 원수 삼는 데 쓴다.
또 세상은 먹으로 쓴 그 지식을 높이 사기 때문에 출세하고 성공하는 도구이자 수단이다.
교육이나 지식이 사람을 바꾸지 못한다.
그것은 먹물이고 머리의 돌판에 기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과 학문이 발달해도 인간의 심성과 행동은 변하지 않고
마음은 날로 악하고 잔인하고 독이 넘친다.
극과 극이 대립하고 싸우는 곳을 보면 먹물로 쓴 지식들이 넘쳐난다.
그 먹물로 쓴 돌판의 지식들을 가지고 상대방 또는 그 진영을 죽인다.
어느 한쪽이 죽기까지는 그 대립과 싸움은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마음에 있는 죄와 악독을 행하고, 이익과 쾌락과 평강을 얻기 위해
그 먹으로 돌판에 쓴 지식을 최대한 활용한다.
이조시대에 어릴 때부터 공자왈 맹자왈 배운 지식으로 출세하고 성공하고
그 다음에는 선한 행동은 없고, 오직 당파싸움과 당리당략을 추구하는 데 쓴 것과 같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모세로부터 받은 율법을 어릴 적부터 줄줄이 외우고 대문과 기둥에 쓰고
소매와 이마에 붙이고 다녔지만 먹으로 돌판에 쓴 것을 다시 먹으로 머리의 돌판에 쓸 뿐이었다.
행함은 없고 자기의 정욕과 탐욕과 쾌락을 추구하기에 바빴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우상숭배도 서슴치 않았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면서도 마음은 한없이 멀기만 하였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사29:13-14)
우리 인간들은 항상 이 지식자들에게 속고 끌려가는 경향이 있다.
‘사람의 계명’은 사람의 철학이요, 사람의 지혜이다.
그 가르침은 먹물로 쓰는 편지이기 때문에 행함과는 거리가 멀게 마련이다.
사람의 지혜와 세상의 초등학문은 세상에서 출세하고 지도자가 되기에 필요할 뿐
성경도 율법도 그것으로 가르침을 받으면 입술 따로 마음 따로가 되게 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이하고 또 기이한 일을 행하셔서
지혜자의 지혜, 명철자의 명철을 없앤다고 하시는 것이다.
사람의 지혜와 세상의 초등학문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라 하였다.
이것에 사로잡히면 사람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라고 하였다.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에 사로잡힐까 주의하라 하신다.
그런데 이미 사로잡혀서 입으로만 입술로만 하나님을 공경하고 가까이 하고 있다.
바리새인의 누룩과 사두개인의 누룩이 그렇다.
그들은 뱀들이고 독사의 새끼들이다.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나서 교리책들이 인쇄술의 발달로 쏟아져 나왔다.
그 교리책들이 오늘날까지 교회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면 과연 이 교리책들, 신조들이, 먹으로 쓴 것일까요? 영으로 쓴 것일까요?
우리는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루터와 칼빈, 그 후예들에게 어쩌면 맹종해 왔다.
그것이 대부분 먹으로 돌판에 쓴 것이면 어찌할까요?
우리는 그들이 초대교회의 신앙과 삶을 이어받은 것으로 믿어 왔다.
과연 그럴까요?
나도 발도인들의 역사를 알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하고 한번도 의심을 품어 본 적이 없다.
권현익 불란서 선교사가 쓴 ‘16세기 종교개혁 이전 참 교회의 역사’와 ‘기욤 파렐과 종교개혁’을
1년에 걸쳐 읽으면서 비로소 의심을 품기 시작했고, 이제 확신에 이르렀다.
초대교회로부터 16세기에 이르기까지 긴 역사의 기간 동안,
우리가 전혀 듣고 보도 못한 발도인들이, 이단으로 몰리며,
로마교회의 대학살과 고문과 화형으로 죽어가면서도 굽히지 않고
초대교회의 신앙과 삶을 지켜온 역사적 사실들을 자료들을 통해 접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경악과 함께 가슴이 저며오고 마음이 너무도 찐한 감동에 젖어
어떤 페이지들은 눈물 없이는 넘길 수가 없었다.
진도가 나갈 수가 없어서 일 년이라는 시간을 바쳐서 두 권의 책을 가슴으로 읽었다.
그리고서 16세기 종교개혁은 먹으로 머리의 돌판에 쓴 개혁, 먹물 개혁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오백년 동안 먹물 개혁의 전통을 따라가느라 세월을 허비하였구나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초대교회와는 다른 열매, 발도인들과는 다른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었구나 탄식했다.
저자 권 선교사는 안타깝게도 발도인 역사를 발굴하여 책까지 써 놓고서는
전혀 다른 영 줄기 뿌리인데도 그 처절한 발도인 역사를
루터와 칼빈에게, 16세기 종교개혁에게 그대로 바치고 있다.
그건 아니다. 정말 아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로마교회를 개혁하였을 뿐이다.
영 줄기와 뿌리는 그대로 였다. 요즘 말대로 큰 집에서 나온 작은 집이었다.
5백년 동안 먹물로 쓴 개혁이었기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열매는 없고
율법만 교리만 신조만 책들만 넘치는 것이다.
좋은 나무가 되지 못하였기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아야 한다. 주님 말씀이다.
2. 너희는 영으로 육의 마음판에 쓴 그리스도의 편지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3절)
개혁교회 오백년이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그리스도의 편지였으면
열매가 초대교회 열매와 발도인교회 열매와 같았어야 한다.
초대교회 열매와 발도인교회 열매는 똑 같았다.
오직 먹으로 머리 돌판에 쓴 편지였기에
입으로는 하나님과 가깝고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면서도
마음은 하나님과 멀리 떠나가 있는 것이다.
유대교회가 율법 조문으로 하나님을 공경한 것처럼
개혁교회도 교리 신조 신학책들로 하나님을 공경할 뿐이었다.
사도들로 말미암아 영으로 쓴 그리스도의 편지들은 가는 곳마다 세상을 변화시켰다.
거기엔 반드시 반대와 박해와 예수님을 본받는 피흘림이 따랐다.
초대교회 이후 유럽 각 지역에서 이 피흘림이 계속 되면서 참 교회는 살아왔다.
산더미 같은 교리 책들이, 긴긴 신조들이, 화려한 교회들이, 사람과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개혁교회들이 오백년 동안 먹으로 돌판에 쓴 글들이, 로마교회와 조금 다를지 몰라도,
그 행태들은 그대로 닮아서, 화려한 교회, 의식, 다수와 권력, 많은 신학지식을 추구하고 있다.
음부의 권세가 지배하고, 장사하는 집, 강도의 소굴을 만들고 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으로 초대교회와 발도인교회는
빛과 소금이 되어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켰다.
그들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그리스도의 편지였기에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겼고,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지혜로 혼잡하지 않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였다.
교회는 이제 초대교회와 발도인교회를 본받아서 단순하고 순수한 신앙과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
교리책들, 신조들의 늪에서 빠져 나와서, 성경을, 영으로, 단순하고 순수하게 가르침 받고
생명으로 삶으로 지켜 행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천국에 들어간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
여기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주께 행한 것이다(마태복음 25장).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고
헐벗었을 때 돌보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는 것이다.
그리했으면,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고, 안했으면, 영원한 불에 들어간다고 하셨다.
정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면
그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여야 한다.
마음을 다해 뜻을 다해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 같이 이웃을 내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이사야58장)도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행위들이다.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고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는 것이다.
주린 자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입히는 것이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행위들이 없다면, 그것은 바리새인의 의와 사랑일 뿐이다.
먹물 개혁, 먹물 교회는 아무리 큰 세력을 이루고 세상을 지배할지라도
그것은 영 부터가 다르고, 사도들이 가르친 전통과 뿌리와 줄기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3.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6절)
예수님이 피로 세우신 새 언약의 일꾼은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한다.
‘율법 조문’은 먹으로 돌판에 쓴 모든 지식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개혁주의의 교리도 신조도 율법 조문과 다를 것이 없다.
같은 유이고 같은 종이다. 우리는 다른 것으로 속아 왔다.
율법 조문은 영혼과 사람을 죽인다.
율법과 교리는 정죄의 역할만 하고 그것이 사람을 살리지 못한다.
율법과 교리 많이 안다고 사람이 변화되거나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
먹물로 쓴 못된 나무요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 찍혀 불에 던져질 뿐이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지만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 먹물로 쓴 것들은 항상 이중적이다.
가르치는 자와 받는 자가 같은 동류이기에 잘도 속아 넘어가고 있다.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인데도 잘도 받아 들이고 있다.
개혁주의 5백년이 과연 아름다운 열매를 맺었다고 보는가?
만일 그랬다면 개혁교회가 세워지는 곳마다 사람과 세상이 변했어야 할 것이다.
오직 영으로 쓰지 않으면 사람과 세상은 결코 변화되거나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한다.
초대교회의 역사가 그것을 증거하고 있고,
발도인교회의 역사가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으로 쓴 새로운 피조물들이었고,
그 변화와 열매가 세상을 변화시켰다.
교리와 신학 지식들은 먹으로 돌판에 쓴 것임을 이제 확실히 알아야 한다.
오직 영으로 마음판에 쓰는, 사람으로, 교회로, 변화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개신교 오백년처럼 소망이 없다. 천국도 없다.
영으로 살고 영으로 살리는 역사를 회복해야 한다.
성경도, 단순하고 순전하게 영으로 가르치고 배우고, 생명으로 살고, 변화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고 회심하고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는 역사가
내 자신에서 시작하여 이웃으로 사회로 세상 전체로 번져나가도록 해야 한다.
발도인 역사를 공부하고 그들의 신앙과 삶을 본받아야 한다.
개혁주의 교리책들, 신조들, 그 먹물들, 그 율법 조문들은, 죽이는 것임을 알고,
오직 영으로 사는 길을 찾아가야 한다.
성경도, 믿음도, 삶도, 오직 영으로 할 때, 사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혈통으로 육정으로 사람의 뜻으로 난 믿음들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들이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오직 영으로 난, 믿음이어야 한다.
그들의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야 한다.
로마교회도 개혁교회도 현대교회도, 세상은 가졌고, 그 먹물과 권력으로 세상을 지배했지만,
초대교회와 발도인교회의 뿌리와 영 줄기와는 다른 것임을 열매를 보고 분별해야 한다.
참 교회는 초대교회 이래 없어진 적이 없다.
지금도 그 교회는 살아 있고 여기 저기 조금씩 조금씩 흩어져 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토에 모아 들이듯이 불러 모으실 것이다.
‘남은 자’들을 예루살렘에, 시온산에, 불러 모아 들일 것이다.
그 사명과 사역에 부름 받고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