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7 주일설교, '거듭나지 아니하면', 요 3:1-8
2023-12-17 주일설교
본문: 요한복음 3:1-8
제목: 거듭나지 아니하면
1. 바리새인 니고데모도 거듭남의 필수성을 아지 못한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요3:1)
‘지도자’에 대한 난하주에는 “또는 산헤드린 공회원”이라 돼 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면서 현재로 치면 국회의원이며 유대인의 지도자이었다.
바리새인이니 율법 박사요, 경건한 자요, 유대인의 지도자로서 국회 의원이었다.
종교적으로도 탁월하고 정치적으로도 유대인의 지도자였다.
그런데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 왔다.
당시 예수를 그리스도로 메시야로 믿는 사람은 유대인들에게 출교의 대상이었다.
출교를 당하면 유대인 사회에서 인권도 재산권도 전혀 보장 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죽여도 재산을 다 빼앗아가도 전혀 보호를 받지 못하는 처지가 된다.
그런 출교의 위험을 피해 예수님을 밤에 찾아 온 것이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이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2)
니고데모는 예수님 행하신 표적과 이적들을 보고 분명히 깨달은 것이 있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 아니면,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이런 표적은 아무도 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리새인은 성경을 율법으로 믿고 영의 세계를 다 믿는 지도자들이었다.
사두개인은 영의 세계도 부활도 믿지 않는 세속적인 지식 계급이었다.
예수님은 이들 두 부류의 누룩(교훈)들을 조심하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마16:6)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마16:12)
바리새인은 율법주의의 대표요, 사두개인은 세속주의의 대표였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기 위하여
지성을 동원하여 율법조문들과 엄격한 계율들을 만들었다.
사두개인들은 율법을 편하게 지키기 위하여 세상 철학과 교육으로 세속화하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바리새인은 개혁교회요, 사두개인은 현대교회이다.
우리는 내내 개혁주의와 청교도주의는 바리새인이 아니고 참 그리스도인으로 알았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참다운 후예들인 발도인들의 역사를 접하고 사실들을 알고 나면,
16세기 종교개혁자들과 5백년 개혁교회 또한 지성주의 율법주의 바리새인들인 것이 분명해진다.
또한 현대교회를 크게 성공시키고 있는 사람들은 사두개인들이다.
신정통주의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을 만들어 무장하고,
현대심리학과 경영학과 철학과 과학과 기타 학문으로 성경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며
급속히 대형교회를 이루는 사람들이다.
빌리 그래함의 전도집회, 로버트 슐러의 수정교회, 릭 워렌의 새들백교회,
빌 하이벨스의 윌로우클릭교회, 오스틴의 레이크우드교회가 그 대표다.
“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요일4:5)
바리새인도 사두개인도 지성주의가 만든 서로 다른 유의 교훈, 누룩일 뿐이다.
사람의 지혜와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다만 율법조문들을 만드느냐, 세속조문들을 만드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밤에 예수님을 찾아오는 니고데모들이기는 마찬가지다.
예수님 당시나 현대나, 니고데모들은 밤에 와서 예수님을 만나기는 한다.
하늘로부터 온 선생인 줄도 알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줄도 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지만,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있다.
마음 속은 탐욕과 방탕,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차 있다.
니고데모들은 예나 지금이나 교리책들과 신조들을 많이 만들어서 성경 박사들이고
교회 지도자들이며 세상 유력자들이며 대교단을 이루며 제도권 종교를 장악하고 있다.
그러나 먹으로 돌판에 쓴 율법조문들이요 교리들이요 신조들이요 철학들이다.
영으로 마음판에 쓴 하나님의 말씀들이 아니다.
율법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니고데모들은 믿음의 행함은 없고, 입술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나
마음은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니고데모들은 하나님과 성경과 교리책들 팔아,
교회를 장사하는 집,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서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지배하게 만드는 자들이다.
발도인들의 참 교회 역사를 발굴하여 초대교회 신앙과 삶을 계승하지 않는 교회는,
세상은 알아주고 세상에서 빛나는 교회일지 모르지만,
니고데모들의 교회요 유대교회 로마교회의 재판이요 재현일 뿐이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3:3)
먹으로 돌판에 쓴 개혁교회 현대교회에서 벗어나라.
영으로 마음판에 쓴 그리스도의 편지로, 발도인들의 참 교회로 돌아가라.
그것만이 초대교회의 가르침과 전통을 지키고 돌아가는 길이다.
2.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3:3)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하시며 니고데모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이다.
오늘날의 니고데모들에게, 그 교회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이 말씀에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되 묻는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주님은 다시 말씀하신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육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개혁교회 현대교회는 유대교회 로마교회와 같이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고 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지 않고 있다.
육은 거듭날 수도 없지만 무익한 것이다.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물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고 죄를 씻어주시는 역사로 이해해야 한다.
또한 물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을 인쳐주는 물 세례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니 두 가지가 아니고 성령의 한 역사인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역사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고후5:17-18)
거듭남은 오직 성령으로 거듭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된 것이 보이는 그리스도 안의 새 피조물이다.
하나님께 대한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변화이다.
영접기도 한 번 따라하면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이다.
회개는 코페르니쿠스 적인 변화를 말한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바뀌듯, 세상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는 것이다.
내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해로 배설물로 여기고 버리고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고 모든 소유를 버리고 능히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완전한 변화는 아닐지라도 변화의 전환점은 분명한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성령으로 거듭났는데 아무 변화가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성경은 여러 표현으로 거듭남을 말씀하고 강조하고 있다.
거듭남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못 들어가고의 판가름이 나는 결정이다.
오늘날 교회가 거듭남을 회개의 변화 없이 교회 출석과 세례로 당연시하고
구렁이 담넘어 가듯 슬그머니 넘어가는 것은 성경에 대한 반역이다.
미혹의 영의 포로가 되었다는 증거이다.
성령론의 최고의 책, ‘성령의 사역, 회심과 부흥’의 저자 제임스 뷰캐넌은 말한다.
“엄청나고 위대하고, 영적이며 완전히 전인적인 변화가 거듭남이요 회심이다”
“죄인이 하나님 나라를 보기 전에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이 변화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영혼 내부에서 발생되는 영적 변화’이다.
이것은 단순한 외면적인 변화가 아니라 내적이며 영적인 혁명을 뜻한다.”
“지성을 비춰주고 양심을 각성시키며 그 의지를 복종케 하고
그 감정을 정련하고 정화하며,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새롭게 지으심’을 받게 하는
지성과 마음의 온전한 변화를 뜻한다.”
거듭남은 우리가 꼭 마음에 새기고 체험하고 최우선시해야 할 회개이며 회심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출발 시점이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탄생 시점이다.
이 거듭남의 변화가 나를 변화시키고 가정을 변화시키고 교회를 변화시키며
나아가서 사회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참된 부흥은 항상 이 변화의 연속이었고,
나와 가정으로부터 시작된 변화가 교회와 마을과 도시와 나라를 변화시키는 혁명적 변화였다.
그러나 부흥주의는 사람만 끌어모으고 교회만 많이 세우고 세력은 키우고 요란한데
변화와 열매는 찾을 길이 없는 것이 대조적이다.
3. 성령으로 난 사람은 근원을 알지 못하는 바람과 같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7-8)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사람은 사람 속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로 나기 때문에
정확한 출생 시간을 알 수가 없고 그 변화가 어디로 향해 가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바람의 소리는 들을 수 있는 것처럼 그 변화의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거짓 선지자도 그 원래의 열매로 알 수 있듯이,
거듭난 사람도 그 변화된 열매로 알 수 있다.
뷰캐넌의 말대로, ‘엄청나고 위대하고, 영적이며 완전히 전인적인 변화’가 없다면,
그 사람은 회심한 적도 없고 거듭난 적도 없는 것이다.
교회 다니는 구도자일 뿐이다.
그 상태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다.
성령의 나타나심과 성령의 내적 역사는 사도시대와 오늘날에도 동일하다.
밤에 예수를 찾는 니고데모의 처지와 신세에서 이제 깨어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기를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13)
거듭난 사람, 천국 백성은 이제 세상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버리고,
말씀과 성령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으로 변화 성숙의 길을 가야 한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과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사는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함으로 모든 것을 더해 받는 삶을 증거해야 한다.
가정의 행복과 세상에서의 축복을 앵무새처럼 읊어대는
거짓 목사들의 바알 신앙을 본받고 안심하다가는
멸망으로 끝나는 ‘나라의 본 자손들’, 곧 이스라엘 백성들의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정말로 축복을 원한다면, 출세와 성공이 먼저가 아니라, 거듭남 곧 변화가 먼저이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이 땅에서도 천국을 살 수 없고 천국의 은혜와 평강을 누릴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기 때문이다.
돌판에 먹물로 쓰는 교리와 신조들의 미혹에서 벗어나 영으로 마음판에 쓰는 말씀으로 돌아가자.
다른 교훈,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하신다.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관계 중심으로 살다가 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