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1 주일설교, '새 언약의 일꾼', 고후 3:1-6
2025-05-11 주일설교
본문: 고후 3:1-6
제목: 새 언약의 일꾼
1. 새 언약의 일꾼은 오직 영으로 하고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한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6절)
새 언약의 일꾼들은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은 사람들이다.
유대교회의 대표격인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은 묵은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은 사람들이다.
새 언약은 주님이 당신의 피로 세우셨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22:20)
새 언약은 주의 법을 영으로 마음에 기록하여 행하게 한다.
“주께서 이르시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은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히8:10)
우리 교회 이름이 한가족에서 새 언약으로 바뀐 것은 이 말씀으로 인해서였다.
하나님의 한가족이 되기 전에 새 언약의 백성이 되어야 함을 깨닫게 하셨다.
결과적으로 25년 한가족교회의 여정이 새언약교회를 낳았다.
주의 법을 영으로 마음에 기록하여 행하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머리 돌판에 아무리 많은 율법 지식을 먹으로 써서 갖고 있어도 행하지 않으니까
그들은 입술로만 하나님을 가까이 할 뿐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사29:13-14)
‘사람의 계명’은 사람의 철학이요, 사람의 지혜이다. 온갖 교훈의 풍조이다.
루터와 칼빈으로부터 시작한 개혁주의 신학, 교리조문, 신조들도
사람의 지혜와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쓴 율법 조문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 가르침은 먹물로 머리 돌판에만 쓰는 편지이기 때문에 행함과는 거리가 멀다.
사람의 지혜와 세상의 초등학문은 세상에서 출세하고 지도자가 되기에 필요할 뿐
성경도 율법도 그것으로 가르침을 받으면 입술 따로 마음 따로가 되게 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이하고 또 기이한 일을 행하셔서
지혜자의 지혜, 명철자의 총명을 없앤다고 하시는 것이다.
사람의 지혜와 세상의 초등학문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라 하였다.
이것에 사로잡히면 사람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라고 하였다.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에 사로잡힐까 주의하라 하신다.
그 대표격인 바리새인의 누룩과 사두개인의 누룩에 사로잡힐까 주의해야 한다.
그들은 ‘뱀들이고 독사의 새끼들’이다.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나서 교리책들이 인쇄술의 발달로 쏟아져 나왔다.
우리는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루터와 칼빈, 그 후예들에게 어쩌면 맹종해 왔다.
나도 발도인들의 역사를 알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하고 한번도 의심을 품어 본 적이 없다.
권현익 선교사가 쓴 ‘16세기 종교개혁 이전 참 교회의 역사’와 ‘기욤 파렐과 종교개혁’을
1년에 걸쳐 읽으면서 비로소 의심을 품기 시작했고, 확신에 이르렀다.
그후 알렌 크라이더의 ‘초기교회와 인내의 발효’, ‘회심의 변질’을 읽으며
초기 교회의 실상을 알고서 더욱더 분명하고 확실한 확신에 도달했다.
그리고서는, 16년 동안 묻혀 살아온 청교도신학을 과감히 내려 놓았다.
사도행전 교회로부터 16세기에 이르기까지 긴 역사의 기간 동안,
그 참 교회의 신앙과 삶을 지켜온 공동체들의 역사를 현장 자료들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우리가 전혀 듣거나 보지도 못한 발도인들이, 이단으로 몰리며,
로마교회의 대학살과 고문과 화형으로 죽어가면서도 굽히지 않고 지켜온 산 역사였다.
그야말로 경악과 함께 가슴이 너무도 찐한 감동에 젖으며
어떤 페이지들은 눈물 없이는 넘길 수가 없었다.
진도가 나갈 수가 없어서 권선교사의 두 권의 책을 가슴으로 읽는 데 1년이 걸렸다.
그리고서 16세기 종교개혁은 먹으로 머리의 돌판에 쓴 개혁, 먹물 개혁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권 선교사는 안타깝게도 발도인 역사를 루터와 칼빈에게, 그대로 바치고 있다.
그건 아니다. 정말 아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로마교회를 개혁하였을 뿐이다.
영 줄기와 뿌리는 그대로 였다. 요즘 말대로 큰 집에서 나온 작은 집이었다.
먹물로 쓴 개혁이었기에 5백년 동안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열매는 없고
율법만 교리만 신조만 책들만 넘쳤다.
좋은 나무가 되지 못했기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그 개혁교회들 현대교회들 모양이 유대교회와 로마교회와 그대로 닮은 꼴이 아닌가?
율법 조문은 믿음을 사람의 지혜에 있게 하고, 영은 믿음을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한다.
‘율법 조문’은 먹으로 돌판에 쓴 인간들의 모든 지식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요즘 말로 하면 바리새인은 보수주의자요, 사두개인은 진보주의자이다.
소위 정통 보수신학은 바리새인의 누룩이요,
자유주의 신정통주의는 사두개인의 누룩이다.
이들은 다 새 언약의 일꾼들이 아니다.
2.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6)
율법과 교리는 정죄의 역할만 하고 그것이 사람을 살리지 못한다.
율법과 교리 많이 안다고, 사람이 변화되거나, 선한 열매를 맺는 것 보았는가?
먹물로 쓴 못된 나무요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 찍혀 불에 던져질 뿐이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고후3:3)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은 처음에 영으로 돌판에 써 주셨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 구절들을 외우고 묵상해도
영의 역사가 없으면 그것 또한 머리의 돌판에 먹으로 쓰는 것이다.
사람은 마음에 있는 것을 행하지, 머리에 있는 것은 행하지 않는다.
교육이나 지식이 사람을 바꾸지 못한다.
그것은 먹물이고 머리의 돌판에 기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과 학문이 발달해도 인간의 심성과 행동은 변하지 않고 마음은 날로 악해진다.
이조시대에 어릴 때부터 공자왈 맹자왈 배운 지식으로 출세하고 성공하고
그 다음에는 선한 행동은 없고, 오직 당파싸움과 당리당략을 추구하는 데 쓴 것과 같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모세로부터 받은 율법을 어릴 적부터 줄줄이 외우고 대문과 기둥에 쓰고
소매와 이마에 붙이고 다녔지만 먹으로 머리의 돌판에 쓸 뿐이었다.
행함은 없고 자기의 마음속 정욕과 탐욕과 쾌락을 추구하기에 바빴다.
3.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6)
오직 영으로 쓰지 않으면 사람과 세상은 결코 변화되거나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한다.
초기교회의 역사가 그것을 증거하고 있고, 발도인교회의 역사가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으로 쓴 새로운 피조물들이었고,
그 변화와 열매가 세상을 변화시켰다.
영으로 살고 영으로 살리는 역사를 회복해야 한다.
성경도, 단순하고 순전하게 영으로 가르치고 배우고, 생명으로 살고, 변화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무엇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고 회심하고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는 역사가
내 자신에서 시작하여 이웃으로 사회로 세상 전체로 번져나가도록 해야 한다.
발도인 역사를 공부하고 그들의 신앙과 삶을 본받아야 한다.
성경도, 믿음도, 삶도, 오직 영으로 할 때, 사는 역사가 일어난다.
혈통으로 육정으로 사람의 뜻으로 난 믿음들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들이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오직 영으로 난, 믿음이어야 한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3절)
개혁교회 오백년이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그리스도의 편지였으면
열매가 초기교회 열매와 발도인교회 열매와 같았어야 한다.
초기교회 열매와 발도인교회 열매는 똑 같았다.
유대교회가 율법 조문으로 하나님을 공경한 것처럼
개혁교회도 교리 신조 신학책들로 하나님을 공경할 뿐이었다.
새 언약의 일꾼들이 영으로 쓴 그리스도의 편지들은 가는 곳마다 세상을 변화시켰다.
거기엔 반드시 반대와 박해와 예수님을 본받는 피흘림이 따랐다.
초기교회 이후 유럽 각 지역에서 이 피흘림이 계속 되면서 참 교회는 살아왔다.
산더미 같은 교리 책들이, 긴긴 신조들이, 화려한 교회들이, 사람과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개혁교회들이 오백년 동안 먹으로 돌판에 쓴 글들이, 로마교회와 조금 다를지 몰라도,
그 행태들은 그대로 닮아서, 화려한 교회, 의식, 다수와 권력, 많은 신학지식을 추구하고 있다.
그 결과, 음부의 권세가 지배하는 교회, 장사하는 집, 강도의 소굴을 만들고 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으로 초기교회와 발도인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켰다.
그들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그리스도의 편지였기에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겼고,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지혜로 혼잡하지 않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였다.
교회는 이제 초기교회와 발도인교회를 본받아서 단순하고 순수한 신앙과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
교리책들, 신조들의 늪에서 빠져 나와서, 성경을, 영으로, 단순하고 순수하게 가르침 받고
생명으로 삶으로 지켜 행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천국에 들어간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
참 교회는 초기교회 이래 없어진 적이 없다.
지금도 그 교회는 살아 있고 여기 저기 조금씩 조금씩 흩어져 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토에 모아 들이듯이 불러 모으실 것이다.
‘남은 자’들을 새로운 예루살렘에, 시온산에, 불러 모아 들일 것이다.
그 사명과 사역에 부름 받고 쓰임 받는, 우리가 되자. 새 언약의 일꾼들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