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7:24) / 루터의 로마서 주석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여기서 사도는 육체적인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죽음이라면 사도는 얼마든지 원한다. 어거스틴,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진다는 것은 지금은 사망의 몸인 이 육신이 현세적인 죽음을 통해서 이 영적인 죽음을 그치게 됨으로써 생명의 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이 싸움도 끝이 난다.”
따라서 여기서 사도는 자연적이고 현세적인 죽음을 말하고 있지 않다. 이 기도는 분명하게 사도가 여기서 영적인 사람으로서 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는 궁극적인 구속을 위해 기도하고 애쓰고 갈망하기 때문이다. 영적이지 않은 자는 그 누구도 스스로를 곤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25절에서 사도는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고 쓴다. 한 사람의 동일한 믿는 자가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을 동시에 섬기고 있음을 알게 된다. “내 자신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동일한 사람이 이러한 이중적인 섬김의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육적인(변화 받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섬긴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성도들은 의인임과 동시에 죄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그의 의가 그들을 덮고 그들에게 전가되어서 의롭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이루지 못하고 여전히 죄악된 정욕들을 지니고 있는 한에 있어서 죄인들이다. 그들은 의사의 치료를 받고 있는 병든 자들과 같다. 그들은 정말 병들어 있지만, 나을 소망이 있고 나아지기 시작하고 있다. 그들은 건강을 다시 회복하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한 환자들이 자기는 다 나았다고 교만하게 주장하면 아주 심한 해를 겪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병이 재발되어 처음의 병보다 더 악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 전체에서 루터는 바울의 말들에 토대를 둔 열두 가지의 서로 다른 증거들을 통해서 사도가 여기서 자기 자신을 여전히 육적이고 변화 받지 못한 자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영적이고 변화 받았지만 자기 자신 속에서 벌어지는 새 사람에 대한 옛 사람의 전투를 애통해하는 자로 이야기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갈라디아서 5:17이하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사도는 완전주의의 오류에 맞서 논증을 펼쳐나간다.)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7:17). 아리스토텔레스의 거짓된 철학에 속은 중세의 스콜라 신학자들은 세례나 회개를 통하여 죄는 완전히 멸해진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사도가 여기서 “내 속에 거하는 죄”라고 고백하는 것을 이치에 맞지 않는 것으로 여긴다. 변화 받은 또는 영적인 사람으로서 사도 안에는 더 이상 그 어떤 죄도 있을 수 없다고 그들은 말한다: 따라서 사도는 여기서 육적인(또는 변화 받지 못한) 사람으로서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 속에도 죄는 여전히 있는데, 이는 그가 은혜 안에서 행하고, 교만을 버리며, 오만을 견제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 마틴 루터, 『로마서 주석』, pp 146-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