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특강
청교도 특강
1. 청교도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청교도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영국에서는, 그들을 핍박한 기득권자들인 국교도들이 만들어 내었고, 미국과 유럽에서는, 마찬가지로 그들을 반대하는 기득권자들이 만들어 냈다. 제임스 패커의 말이다.
“청교도”라는 이름은 애시당초 진흙 구덩이에서 나왔다. 1560년 초에 탄생한 이 이름은 분리주의자들, ‘까탈스럽고 비판적이며 위선적인 작당‘이라는 풍자적인 단어이었다. 정치적으로는 왕정에 반대하는 ’공화주의 도당‘을 의미했다. 영국에서 반청교도 감정은 왕정복고 시대에 물꼬를 텄다가 그 이후 꽃을 피웠다. 미국에서는 조나단 에드워즈 시대 이후 서서히 꿈틀거리다가 약 100년 전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다. 그런데 지난 50년 동안 학자들은 그 진흙을 말끔히 씻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교도들의 대표적인 저작들을 읽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여전히 청교도들에게 덧씌워진 진흙 덩어리들을 씻어내지 못하고 있다. 역사를 모르고, 자기 신학에 대한 독단이 빚어내는 산물이다.
나 역시 약 5년 전만 해도 내가 붙들고 있는 보수신학이 최고이고, 전부인 줄 알았다. 청교도들의 대표적인 저작들을 읽고서는, 보수신학도 시대사상으로 접근한 것이고, 순수한 성경적인 해석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다. 청교도 성경해석을 종합했다고 할 수 있는 로이드 존스의 로마서강해와 에베소서강해를 읽어보면 그 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로마서 해석이 얼마나 비성경적인지를 알 수 있다. 로마서가 성경 전체의 복음을 가장 체계적으로 잘 정리한 책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로마서 해석이 잘못 되었다는 것은 성경 해석 전체가 잘못 된 것이 되고 만다. 보수신학에서 교과서처럼 여기는 벌코프의 조직신학도 로이드 존스의 교리강좌 세 권(청교도 해석의 진수임)을 읽어 보면, 그 책을 내려놓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를 쓴 옥성호집사는 이 교리강좌를 읽고 신앙을 되찾았고 평생의 스승으로 삼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청교도는 고약하고 고리타분하고 율법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이 아니다. 청교도는 살 수 없는 것들을 주장하는 바리새인들이 결코 아니다. 청교도는 이조 시대의 청백리나 도닦는 사람들이 결코 아니다.
적대 세력들이 청교도를 싫어하여 악한 의도로 만들어낸 이미지 일 뿐이다.
묵은 누룩들과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들이 만들어낸 이미지일 뿐이다.(고전 5:7)
그런 선입견과 편견을 씻어내지 않으면 청교도들의 진수(그 순수함과 진실)를 결코 맛볼 수 없다.
청교도들은 한 마디로 예수님처럼, 사도와 선지자들처럼 살고자 한 사람들이다.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기까지 300년간 핍박속에 기독교를 세웠던 초대교회 교인들처럼 청교도들도 종교개혁으로부터 300년간 핍박속에 가장 순수한 신앙을 산 사람들이다. 로이드 존스는 기독교 2천년 역사를 통하여 예수를 가장 잘 믿은 사람들이라고 한다. 청교도들은 오직 성경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성경대로 성령을 따라 믿는 사람들이다. 성경의 진리들을 오직 성경으로 오직 성령의 조명으로 해석하고 교리를 세우고 그 교리를 삶의 기준과 원칙으로 삼고 모든 삶의 영역에 적용하고자 한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누룩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율법화를 대표하고, 사두개인들은 세속화를 대표한다. 진정한 청교도들은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이 결코 아니다.
휫트필드는 말했다.
청교도들은 빛 가운데 불타오르는 빛의 사람들이었다. 대로와 울타리와 헛간과 들에서조차 설교할 권리를 박탈당했을 때, 청교도들은 여전히 말씀의 권위를 가진 사람들로서 특별한 방식으로 글을 쓰고 설교했다. 이 시간에도 특별한 기름부으심이 그들을 따라다니고 있다.
조엘 비키는 청교도들의 작품들이 사라졌다가 다시 등장하는 역사를 이렇게 말한다.
19세기의 마지막 즈음에 전혀 다른 사상적 흐름이 대서양의 양편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청교도들의 칼빈주의는 낡은 것으로 여겨졌으며, 청교도주의의 심장이자 핵인 성경에 최고의 권위를 두는 시각은 전혀 다른 관점으로 바뀌었다. 기독교가 보다 학문적이고 과학적이어야 한다고 외치면서, 그들은 그들의 불신앙과 배교를 합리화했다. “훌륭한 옛 청교도의 작품들”은 북미와 영국의 출판사에서 출판을 멈추었다. 청교도 작품들은 그 영향력이 쇠퇴하여 읽히지 않아 도서관 서재에 꽂혀져 방치되었고, 중고 서점과 진열대에서 헐값으로도 팔리지 않게 되었다.
그러던 때에 하나님의 손길로, 런던에서 로이드 존스 박사의 사역이 청교도 작품들에 대한 필요를 재생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는 수시로 자신의 설교에서 청교도 작품들을 언급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 내용의 출처를 궁금해 하도록 했다. 로이드 존스는 그들을 에반젤리컬 도서관(런던 소재)으로 인도했다. 그리고 청교도 작품의 재인쇄본이 발간될 때까지 1950년부터 콘퍼런스를 열어 이를 수년 간 주재했다.
- 조엘 비키, 『청교도를 만나다』에서.
이 책의 기원은 1980년대에 진리의 깃발사의 “청교도 작품을 만나 보라!”라는 제목의 연재 논문에서 시작되었다. 이 논문들은 1950년부터 1985년까지 재인쇄된 청교도 문헌을 다루었다. 그로부터 10년후 “청교도 문헌 속에 담긴 최고의 내용을 읽는 것”(현대문헌목록)에 1986년부터 1996년까지 재인쇄된 청교도 문헌들을 설명한 내용이 실렸다. 그리고 지금의 이 책은 이 자료들을 확대시켜서 1956년부터 2005년까지의 반세기에 이르는 시간 동안 재인쇄되고 출판된 청교도 작품들을 모두 다룬다. 이를 모두 합하면 75개의 출판사에서 낸 7백권에 이르는 작품과 150여명의 청교도들의 전기를 포함하게 된다. 그리고, 청교도들의 수천 권의 작품이 1950년대 이후 재인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 책에 소개되지 못했다는 점이 주목되어야 한다. 청교도개혁신학교(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학생들은 이 책을 만드는 오랜 기간의 수고를 견디게 해 줄 주요한 자극을 준 사람들이었다.
2. 청교도들의 특징/ 조엘 비키
1) 청교도들은 성경으로 삶을 형성했다.
그들은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으로 살며 호흡하면서, 말씀에 수반되는 성령의 능력을 향유했다. 그들은 성경 66권을 은혜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해진 성령의 서제로 생각했다. 그들이 영원토록 신뢰할 수 있는 진리를 주시는 보고(寶庫)로 성경을 바라보았다. 존 플라벨, “성경은 우리에게, 삶에 있어서 최선의 방식과, 고난을 대처하는 가장 고상한 길과, 죽음을 맞는 가장 평안한 방법을 가르쳐 준다.”
2) 청교도들은 지성과 실천을 완벽히 결합시켰다. 그들은 지성을 신앙이 머무는 전당으로 이해했다. 존 프레스턴은 말했다. “회심에 있어서 이성은 고양되기 마련이다.” 코튼 매더도 말했다. “무지함은 경건의 어머니가 아니라 이단의 어머니일 뿐이다.” 청교도들은 지성이 없는 기독교는 뼈가 없는 연체동물과 같다고 생각했다. 반지성적인 복음은 급한 필요나 채우는 텅 빈 혹은 형태 없는 복음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신자와 불신자간에 지성의 차이가 없다면 삶에 있어서도 차이가 없게 될 것이다.
(오늘날 교회와 교인들은 지성을 놔버리고, 믿음신학, 형통의 신학들에 매달리고 있다)
3) 청교도들은 그리스도에 집중적 관심을 두었다.
아이작 암브로스, “그리스도를 성경 전체의 본질이자 정수이며 영혼인 동시에 목적으로 여기라,” 청교도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했고 그분의 아름다움에 대해 많은 글을 남겼다.
4) 청교도들은 시련과 시험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었다. 청교도들은 시련과 시험은 우리를 겸손해지도록 만들기 위해(신8:2), 죄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습1:12),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나아오도록 이끌기 위해(호5:15)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고 가르쳤다. 로버트 레이튼, “환란과 고통은 천국이 그 보석을 닦아서 빛나도록 다듬기 위한 다이아몬드 가루다.”
5) 청교도들은 두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었다.
청교도들은 우리가 이 땅에서의 순례의 길에서 시종일관 “우리의 눈 속에” 천국을 지녀야만 한다고 믿었다. 천국을 향한 “영광의 소망”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제임스 패커는 “왜 청교도를 알아야 하는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청교도들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성숙이다. 청교도들은 성숙이 무엇인가 모범을 보여 주었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애숭이에 불과하다. 우리는 영적 난쟁이들이다. 반대로 청교도들은 장대한 거인들이었다. 그들은 위대한 하나님을 섬기는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들에게는 맑은 정신에서 나오는 치열함과 따뜻한 가슴에서 나오는 열정이 한가지로 있었다. 그들은 위대한 신자, 산 소망, 지칠 줄 모르는 실천가, 그리고 끊임없이 고난당하는 질고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겪은 고난(영국에서는 당국자들이, 미국에서는 조악한 자연 환경이 그들을 덮쳤다)은 그들을 단련시키고 원숙하게 하여 아주 훌륭한 성장을 이루게 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편안함과 호사스러움은 성숙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러나 고난과 역경은 성숙에 이르게 한다. 청교도들은 영적 전투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었다. 오래 계속되는 압박과 좌절에도 불구하고 명랑하고 평화를 사랑하며, 인내하고 순종하며, 희망을 버리지 않음으로써 그들이 거둔 도덕적이고 영적인 승리 때문에 히브리서 11장이 그 현관이랄 수 있는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는 영예를 얻었다.
3. 청교도 작품을 읽어야 하는 10가지 이유 / 돈 키슬러
1) 청교도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생각을 높이 고양시켜 준다.
여러분이 청교도를 읽기 시작하면 ‘영적인 의미에서’ 다소 고독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의 마음은 읽고 느끼면서 흥분하기 시작하겠지만, 여러분이 말하는 것을 알아 들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여러분은 참으로 고립될 수 있다. 우리의 생각이 이처럼 빈약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책을 거의 읽지 않게 때문이다. 독서는 우리가 생각하도록 만들어 준다. 우리는 지금 글자문화 대신에 시각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포스트맨은 독서와 사고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 준다. 청교도는 무엇보다 위대한 사상가들이었다. 또한 청교도는 위대한 독서가들이었다.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2) 청교도는 그리스도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다. 새뮤얼 러더포드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리스도의 달콤함은 내게 우주만큼 크다네. 그리스도는 생명의 샘이시네. 저 아름답고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그리스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네.”
3) 청교도는 그리스도의 충족성을 이해하도록 도와 준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필요하지만 인생을 헤쳐 나가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심리학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듣는다. 제레미아 버로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데에는 충분하지만 당신을 만족시키기는 데에는 불충분하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큰 신성모독인가!”라고 말한다.
4) 청교도는 삶과 경건에 있어 성경의 충족성을 보여준다.
청교도는 성경에 기초한 참된 상담자였다. 그들은 최고의 상담은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열리고 해석되고 적용될 때 일어난다는 것을 이해했다. 300여년전 아이작 엠브로즈는 <그리스도인 군사>에서 성경으로 충만하지 않은 사람에게 조언을 받는 것이 위험하다는 사실에 대해 이렇게 썼다. “상처 때문에 위로를 얻고자 하는 영혼은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면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 의사도 아닌 불신자에게 당신의 질병을 보여준단 말인가? 모든 질병을 고치는 하나님께로 가시라. 하나님은 진정으로 당신을 인도하신다. 바울이 성령에 의해 회심했을 때, 바울은 혈육과 의논하지 않고 즉시로 하나님께 순종했다. 혈육과 의논하지 마시라.” 하나님과 가장 친숙한 사람들이야말로 영혼을 치료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람들이다. 사실상 청교도는 ‘영혼의 의사’로 불린다.
5) 청교도는 죄의 본성이 얼마나 가증스러운지를 가르쳐 준다.
죄 교리는 신학이라는 전체 스웨터를 풀어줄 실마리이다. 죄 교리에서 벗어나면 다른 모든 교리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죄가 고통보다 더 나쁘지만 사람들은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는 반면 죄를 피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버로스는 죄가 지옥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죄가 지옥보다 더 나쁘다고 주장한다. 조나단 에드워즈, “하나님은 무한히 거룩하시므로 죄는 무한히 악하다.”
6) 청교도는 실제적인 삶에서 우리를 도와준다.
팀 켈러는 리처드 백스터의 <성도의 생활 지침서>를 ‘이제껏 만들어진 성경적인 상담안내서 중에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패커는 이 책을 기독교 서적 중에서 성경 다음으로 훌륭한 책이라고 평했다. 이 책은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시켰던 사람의 천재성을 보여 준다. 죄악된 영혼을 치료하는 데 사용되던 심리학이라는 용어가 차츰 병든 마음을 고치는데 사용되기 시작했다. 심리학은 영혼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목사들의 손에서 불신자가 대부분인 상담가들의 손으로 옮겨졌다. 루이스 베일리의 <경건의 연습>은 청교도의 경건생활의 안내서의 모델로 생각할 수 있다. 이 책의 기본 생각은 한 사람의 하루와 인생을 성경을 기준으로 규정해 보자는 것이다. 존 거스트너 박사는 이 책이 청교도 운동을 낳았다고 했다. 나다나엘 래뉴의 <고독, 경건한 묵상으로 향상시키기>는 영적인 묵상에 관한 청교도 작품 중에서 고전으로 손꼽힌다. “여러분이 홀로 있는 시간조차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품에 관해 묵상하면서 여러분의 마음을 선하게 사용함으로써 그 시간을 향상시킬 수 있다.” 청교도에게 제11계명이 있다면, 그것은 ‘시간을 낭비하지 말지니라“일 것이다.
7) 청교도는 성경적인 복음전도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오늘날의 복음 전도는 대체로 인간중심적이다. 그러나 청교도의 복음전도는 하나님 중심적이었다.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면 나는 누군가가 그리스도에 관한 정통교리를 설교하는 것을 들어야만 한다. 만일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고자 하신다면 하나님의 정상적인 수단은 그 복음 설교일 것이다.
8) 청교도는 올바른 삶의 우선순위를 가지도록 도와준다. 고후5:9,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어떤 청교도는 이 말씀을 “하나님의 미소는 나의 가장 큰 상급이요, 하나님의 찡그리심은 나의 가장 큰 두려움이다”라고 설명했다. 우리가 함께 보내는 사람들과 비슷해진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청교도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영원에 대한 투자가 될 것이다.
9) 청교도는 하나님과 올바르게 관계 맺는 법을 가르쳐 준다.
10) 청교도는 성경 말씀의 권위를 높여 준다.
신실한 사역자가 바로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신 이유는 순종하라고 주신 것이다. 토마스 테일러, “하나님의 말씀은 그 위엄과 권위가 영원히 보존되도록 전달되어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대사들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할 때는 마치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듯이 말해야 한다. 말씀의 권위에 저항하거나 그 권위를 떨어뜨리는 것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무서운 죄다. 하나님은 자기의 일꾼들이 거절 당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실 것이다.”
청교도들이 갖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성경에 대한 경외심에서 왔다. 만일 우리가 청교도들이 하나님을 알던 것처럼 하나님을 알려면, 우리도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이 사랑을 키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부지런하고도 열심히 하나님 말씀을 연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청교도를 읽는 것이 그 다음으로 좋다. 사실상 청교도를 읽는 것은 교회 역사상 가장 훌륭한 지성인들이 있는 학교에 입학하는 것과 같다. ‘여러분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과 비슷해질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청교도를 읽는 것은 시간을 가장 잘 활용하는 것이다. 오, 우리가 청교도와 같이 가장 높이 경배하고 찬양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4. 청교도들에게서 배울 교훈/ 제임스 패커
1) “주님 앞에서 거룩”의 태도로, 개인의 능력과 활동의 계발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한 가지 목적으로 살았다. 그들에게는 성속의 분리가 없었다. 만물은 선하고 모든 활동은 성결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한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하늘에 소망을 두고 질서를 존중하며, 실제적이며 현실적이고, 기도하고 큰 뜻을 품으며, 실천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들은 인생을 나눌 수 없는 한 덩어리로 보았기 때문에 철저하게 양심적이고 사려깊게 행동과 묵상, 노동와 예배, 하나님 사랑과 이웃 및 자기 사랑, 사회적 정체성과 개인적 정체성, 그리고 관계가 부과하는 넓은 책임과 개개인을 통일시킬 수 있었다.
성경이 규정한 그리스도인의 광범위한 전체 의무를 고루 이행하는 균형 잡힌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방법”과 계획에 따라 세심한 시간 안배를 하며 살았다.
2) 뼈를 깍는 듯한 그들의 영적 경험에서 교훈을 배워야 한다. 청교도들은 하나님과 교통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삼은 것 만큼 성경을 지극히 높였다. 청교도들은 그들에게 적용된다고 본 전체 성경 진리에 관해 논증적이고 조직적으로 묵상했다. 청교도들은 성경이 성결에 이르는 불변적 잣대임을 알고, 결코 이 점을 잊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타락한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정직하지 못하고 기만적인가 알았으므로, 겸손과 자기 의심을 버릇처럼 몸에 지니려고 했고, 영적인 등하 불명이 없는지, 혹 내면에 잠복하고 있는 악은 없는지 자기 점검에 게으르지 않았다.
3) 그들의 실효를 거두는 행동에서 교훈을 배워야 한다. 그들은 순수한 실천가요 행동가요, 그들 안에서, 그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어떤 옳은 행위가 있었다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리는 그분의 종들이었다. 그들은 결코 교회나 국가를 전복하는 혁명가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변화가 요청되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비밀 요원이 되어 효과적인 변화를 일으키기를 소원했다. 오늘날 서구 그리스도인들은 열심이라고는 싸늘히 식었고 수동적이며 두려워할 줄만 알뿐이다. 개인 경건주의라는 고치 속에 꼭꼭 숨어 지낼 뿐, 대부분의 공공사는 나 몰라라 내버려 둔다.
4) 가정의 견고함을 위하는 그들의 조처들에게서 교훈을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인 가정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청교도의 결혼 윤리는 일생을 함께 할 좋은 친구로서 오래 동안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이를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다. 그들의 자녀 교육은 정도를 행하고 몸과 마음을 함께 돌아보며, 건실하고 경건하며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생활을 꾸려갈 성인으로 키우는 데 그 목표를 두었다. 선의, 인내, 일관성, 그리고 불요불굴의 태도를 으뜸되는 가정의 덕목으로 여겼다. 30세를 밑도는 평균 수명, 아이 가운데 최소한 몇 명은 잃던 시절, 경제적으로 곤핍을 당하던 시절에 가정 생활은 인격의 바탕을 닦는 학교였다.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가정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고 최선을 다한 청교도들의 강인함은 칭송받아 마땅하다. 청교도 평신도들이 복음 전도와 사역을 실천한 곳은 다른 곳이 아닌 가정이었다.
5) 인간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그들의 자세에서 교훈을 배워야 한다. 그들은 위대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도덕적인 문제, 영원, 그리고 인간 영혼의 위대함에 관한 분명한 의식을 갖고 있었다.
6) 교회 개혁에 관한 청교도적 이상에서 교훈을 배워야 한다.
백스터에게 “개신교” 목사는 칼빈주의를 유포하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설교자, 교사, 요리 문답가, 그리고 삶의 모범으로서, 말하자면 “부흥의 열기가 있는”, 또는 “개혁된” 사역을 펼치는 사람이었다. “개혁”의 본질은 하나님의 진리를 풍부하게 이해하고 그분을 향한 열심을 불태우며, 헌신과 사랑 그리고 기쁨의 불꽃을 돋우고 그의 부르심과 개인 생활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뜻을 뚜렷하게 펼치는 것이었다.
- 리랜드 라이큰, 「청교도- 이 세상의 성자들에서」
5. 로이드 존스의 청교도론
청교도와 국교도의 차이는 교회의 본질에 대한 관심의 문제였다. 그것은 완전하고 철저한 개혁에 대한 열망이었다. 그것은 의식들과 예복들을 반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으나 교회의 교리 전체로 발전되어 나갔다. 청교도는 부분적으로 개혁된 교회에 만족하지 않고 완전하게 개혁된 교회를 원했다.
청교도는 언제나 신약으로 돌아가기 원했다. 국교도는 역시 전통과 관습과 계속성에 관심이 있었다. 언제나 계속성을 강조했다. 영국 국교회는 “중간 교회”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기들은 개혁교회일 뿐만 아니라 카톨릭 교회라고 언제나 주장해 왔다. 계속성과 전통! 청교도는 모든 것을 오로지 성경의 가르침에 기초한 반면, 국교도는 이성을 끌어들였다. 청교도들은 복음적인 관점만이 유일한 관점이라고 하는 반면에, 국교도는 복음주의는 하나의 관점이요 하나의 강조점이요 하나의 태도라고 말한다. 청교도는 이렇게 하지 않으려 했다. 이것이 바로 근본적인 차이이다.
청교도는 예배의 신령성을 강조한다. 국교도는 예배의 형식적인 면을 강조한다. 예배의 구성에 더 관심이 있다. 모인 교회라는 개념은 청교도 사상에 있어서 핵심과도 같다. 그러나 국교도는 보다 더 개인주의적이다. 청교도는 죄를 색출해 내어버리는 것이나 엄격한 교회 훈육을 믿었다. 국교도는 외면적 일치에 만족하는 경향을 보인다. 1662년 이후 300년의 역사는 로마 카톨릭의 잔재로 여겨졌던 것에 복종하는 일보다 차라리 추방당하는 것을 택했던 사람들이 옳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 준다. 청교도주의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정신 구조요 하나의 정신이다.
참된 청교도주의는 궁극적으로 장로회주의 안에서 발견된다고 저는 주장한다. 특히 존 녹스에게서 말이다. 토머스 카트라이트에게서도 발견된다. 분리주의적인 관점을 취했던 사람들에게서도 발견되며, 뉴잉글랜드 교회들에서도 발견된다. 또 비국교도와 독립파, 침례교도들 중에서도 발견된다. 그리고 토머스 굿윈이나 존 오웬에게서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바로 본질적인 청교도 정신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교회와 교회론을 중심적 위치에 두었기 때문이다. 스펄전에게서도 같은 방법의 본질적 청교도 정신을 보게 된다. 그는 청교도적 사고 방식의 완벽한 실례이다. 청교도주의는 철저한 개혁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여 교회의 교리 전체로 나아간다. 만일 우리가 교회의 교리를 중심에 놓지 못하면 참된 청교도의 자세, 청교도의 사고방식, 청교도의 정신, 청교도의 이해를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청교도들의 실패 원인
로드의 분명한 패배가 승리로 바뀌어 버린 이 엄청난 변화의 원인은 무엇인가? 로드는 고소당하여 사형 판결을 받았고 그 편에 속한 모든 것들이 패배한 것처럼 보였다. 찰스 1세가 처형되었을 때는 특히 그랬다. 완전히 패퇴할 것같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62년에 그 사람들이 승리했다.
1) 종교와 정치의 혼합이다. 이것이야말로 청교도 역사에서 가장 마귀적인 것이다. 공동의 적을 이기기 위해 서로 타협하게 되었다. 교회 내의 종교를 정치와 혼합시키는 것은 언제나 위험하다. 1640년부터 1662년까지의 기간이 주는 교훈을 배워 그처럼 세상에 휘말리는 일에서 벗어나기 바란다. 우리는 영적 무기를 가지고 주님의 싸움을 싸워야 한다.
2) 훨씬 더 비극적인데, 그것은 청교도들 사이에 일어난 불행하고 후회스러운 분쟁이다.
청교도들 사이에 분열이 생겼다. 끊임없이 분쟁이 일어났다. 장로교파, 독립교회파, 제5왕정파, 퀘이커파, 개간파, 평등주의파, --.
3) 장로교도들도 국교회 사람들만큼 의회의 법령과 국가의 권세를 이용해 자기들의 특별한 교회관에 복종하도록 대중들을 억눌러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1644년에 그들은 국가의 권력과 의회의 입법 조치를 통해 자기들의 관점을 강요했다. 그 결과 크롬웰을 내세웠던 런던의 대중들이 1660년에는 찰스 2세가 돌아오는 것을 환영했다. 법을 제정하는 권세와 교리를 강요하는 권세를 국가에게 주면 언제나 이러한 결과가 따라온다.
그들은 “엄격한 종교적 행동”을 의회의 법률 조항에 의해서 강요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스포츠나 오락 및 기타의 것들에 대해서 법 조항을 통과시켰던 것이다. 그들은 매우 지치고 진력이 나게 되었다. 이것이 주요 원인의 하나가 되어, 왕정제로 다시 바뀌어 왕을 데려와야 한다고 하며, 삶을 망치는 청교도들을 제거해야겠다고 말하게 되었다. 도덕적, 영적 설득을 통해서가 아니라, 의회의 법률 조항을 통하는 식으로 도덕을 “강요하는” 것은 그 자체에 대한 반작용을 낳게 되는 것 같다.
결어. 만일 우리가 진리가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면, 그것을 붙잡고 그것을 위해서 싸우며 모든 타협을 거절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어떠한 대가를 요구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모든 유혹, 모든 제안, 모든 아첨, 명예를 주겠다는 속임수를 모두 거절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대적하여 사용되는 간계들을 간파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어떤 직책을 주겠다든지, 어떤 명예로운 지위를 주겠다든지, 승진을 시켜 주겠다든지, 우리 교단의 어떤 자리를 주겠다든지, 그 밖의 다른 어떤 것을 준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래야 믿음과 교회의 순결성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싸울 수 있다. 그들의 입장을 알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입장에 입각하여 행동했던 이 사람들을 기념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우리에게 이들의 자취를 따라갈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소서!
- 그의 에드워즈에 대한 평가,
“청교도들을 알프스에 비유하고, 루터나 칼빈을 히말라야에 비유한다면, 조나단 에드워즈는 에베레스트산에 비유하고 싶은 유혹을 받곤 합니다. 제게 있어서 그는 언제나 사도 바울을 가장 닮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제가 볼 때 조나단 에드워즈야말로 사람들 중에서 아주 빼어납니다. 당시의 영적인 산소는 매우 희박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거룩이 더욱 찬란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에 대한 그의 강조도 두드러졌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늘로 치솟은 이 큰 봉우리를 바라볼 때 우리는 너무도 왜소한 등산가에 지나지 않음을 느끼게 됩니다. 누구나 그의 전집을 사서 읽도록 설득하는 것이 나의 목표일 뿐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충고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책을 읽어보십시오. 이제 그 많은 집회에 다니는 것을 중단하시고, 오늘날 복음주의 집단에서 유행하는 여러 형태의 오락 즐기기를 멈추십시오. 집에 머무는 법을 배우십시오. 다시 읽는 법을 배우십시오. 현대인들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만 읽지 마십시오. 견고하고, 사실적인 것들로 돌아가십시오.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 두 권과 같은 책을 읽은 결과로 부흥이 시작된 적이 자주 있었습니다”
- 교리와 체험의 완전한 조화, 칼빈주의 메소디즘
칼빈주의 메소디즘은 메소디즘이 신비주의로 변질되는 것을 막아주었다. 그들은 교리에 강조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감정에 강조점을 두어 “느껴진” 측면을 강조하면 신비주의로 빠질 위험이 있으며, 잘못된 환각주의나 일종의 “몽환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역사의 무대에 나타났다. 칼빈주의 메소디즘은 교리와 “느껴진” 요소 두 가지가 완전히 조화된 형태이다. 그것은 교리적으로 바른 자리를 지키게 보증해 줄 뿐 아니라 체험의 영역 자체 속에서도 많은 오류를 막아주어 일종의 신령주의로 빠지는 것을 막아준다. 그러므로 칼빈주의 메소디즘이야말로 진정한 메소디즘이다.
칼빈주의 메소디즘은 참된 칼빈주의라고 나는 주장한다. 메소디스트가 아닌 칼빈주의는 세심히 시험해 볼 필요가 있다. 메소디즘이 아닌 칼빈주의는 지적이고 스콜라적인 데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우리를 붙잡아 주는 진리”에 대해서보다 “우리가 주장하는 진리”에 대해서 더 많은 말을 하게 된다. 메소디즘이 아닌 칼빈주의가 빠지기 쉬운 또 다른 위험은 신앙고백을 “부수적인 표준”으로 삼지 않고 최상 최고의 표준으로 삼아 신앙고백을 성경의 위치에 놓은 위험이다. 칼빈주의자들은 이 순서를 거꾸로 할 위험이 항상 존재한다.
칼빈주의가 메소디즘으로 교정되지 않으면 생길 수 있는 경향의 위험은 기도할 마음을 막는 성향이다.
칼빈주의 메소디스트들은 위대한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교회들은 기도가 특징이었다. 그 기도회는 뜨겁고 감동적인 기도 모임으로 때로는 몇 시간씩 계속되었고 그곳에서 큰 체험을 하게 되었다. 결국 메소디즘이 없는 칼빈주의는, 거칠고 냉랭한 신앙은 말할 것도 없고 기쁨이 없고 딱딱한 신앙이 되는 경향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주지주의에서 나오는 것이다.
옛 칼빈주의자들은 부단히 “하나님의 찾아오심”에 대해 말했다. 어떻게 주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셨는지, 주께서 어떻게 그들에게 말씀하셨는지를 언제나 말하였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물러가심”에 대해서도 말했다. 필연적으로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와 활동을 강조하게 된다. 모든 강조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시는 일에 주어진다. 우리가 하나님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강한 손이 우리를 붙잡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칼빈주의는 체험으로 유도되고 체험을 크게 강조하게 된다. 그런데 현대 칼빈주의자들에게는 이런 것들이 사라지고 말았다. 성령이 찾아오심과 물러가심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칼빈주의는 칼빈주의의 모조품에 불과하다. 이런 것을 칼빈주의라 하는 것을 나는 반대한다. 참된 칼빈주의 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가까이 가도록 자극하는 것은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반전되어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참된 칼빈주의는 부흥과 하나님의 역사가 “주어진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찾아오심을 강조하게 되어 있다. 칼빈주의가 강력해질수록 영적인 부흥과 재각성의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이것은 교리로부터 필연적으로 나오는 결과이다. 그리고 칼빈주의처럼 기도하게 하는 것은 없다. 기도하지 않는 칼빈주의는 칼빈주의가 아니다. 진정한 칼빈주의는 부흥에 관심이 있다.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최고의 관심거리이다. 세상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하나님이 계신데 세상이 어째서 이처럼 행동하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다.
하나님의 영광! 칼빈주의자들의 모든 사고 체계를 지배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을 기다리고 갈망하며 영광을 “보여달라”고 하나님께 졸라대고, 하나님의 능력을 베풀어주시고 일어나셔서 주님의 원수들을 흩으시고, 원수들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며, 주님의 전능하신 팔의 힘을 보여 달라고 간청한다. 이것이 바로 칼빈주의이다. pp299-303
- 로이드 존스, 『청교도신앙 그 기원과 계승자들』, 에서
부록1. 왜 오늘 청교도 신앙을 재발견해야 하는가?/ 김응국
로이드 존스는 “이삭처럼 옛 우물을 다시 파야 부흥이 온다”라고 늘 역설했다. 그런데 그가 염두에 둔 ‘옛 우물’이란 바로 청교도 신앙이었다. 그는 평생 청교도 신앙 강좌를 인도했으며, 청교도 글들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청교도’라는 평판을 얻었다.
‘설교의 황제’라고 칭송을 받는 찰스 스펄전도 청교도 설교의 전통에 굳게 선 인물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존 번연과 리처드 백스터의 책들을 끼고 살았다. 그는 청교도 지도자들의 글에 달통한 자였다.
이렇게 복음 제시에 능통하고 뜨거운 부흥의 영을 간직한 인물들은 청교도 신앙의 감화를 흠뻑 받은 자들이었다. 그렇다면 왜 청교도 신앙이 복음에 강하고 심령 부흥에 강한 것인가? 왜 오늘 우리는 청교도 신앙을 재발견해야 하는가?
오늘 한국의 기독교는 제도의 종교로 고착되어 가고 있다. 심령의 변화 없이 습관과 문화와 조직과 프로그램으로 대체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청교도들이 반대하고 타협을 거부한 영국국교회 체제를 떠올리게 한다. 영국국교회는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고 교회 의식에 참여하는 자들은 자동적으로 거듭난 자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청교도는 형식적인 성례가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할 것을 역설했다. 또한 구원 얻는 믿음에 따르는 회개를 강조했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교회의 형식과 프로그램에 잘 따르면 거듭난 자라고 쉽게 생각하지는 않는가? 거듭냐야 할 필요성조차도 언급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거듭남과 (교회라는) 조직에 충성을 맞바꾸지는 않았는가? 성령 없이 조직과 프로그램으로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은 아닌가? 회개 없는 값싼 영접주의만이 도처에서 활개치고 잊지 않은가? 그 결과, 교회는 나오되 심령의 변화가 없고 인격과 삶의 변화가 없는 ‘죽은 신앙’을 가지게 되고 말았다.
나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신앙을 누구에게 전하려고 하는가? 그런 무기력한 신앙을 ‘선교’라는 이름으로 해외로 수출하려고 하는가? 아서라. 불량식품 수출하면 안 되듯이 ‘불량복음’ 수출하면 안 된다. 지금 누구에게 독초를 먹이려고 하는가?
청교도들이 특별히 강조한 것은 ‘칭의’는 반드시 ‘성화’를 동반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들에게는 거룩하고 정결한 생활의 열매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거룩한 생활을 강조하면 ‘율법주의자’로 여기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청교도를 율법주의자로 매도한다면, 우리는 교회 역사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반법주의’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참된 칭의에서 나오는 참된 성화를 회복해야 한다. 프란시스 쉐퍼가 말년에 암에 시달리면서도 미국의 기독교 대학에서 강연하면서 피를 토하듯이 외친 말은 “미국의 크리스천들은 행복은 추구하나 거룩함은 추구하지 않는다”라는 것이었다.
오늘 이 외침을 한국의 물화(物化)된 크리스천들도 들어야 한다. 한국 기독교를 향해 안티가 많은 것은 우리에게 세상과 다른, ‘구별된 거룩한 생활’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회개의 열매, 거룩한 생활의 열매 없이 기독교는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다.
한국의 초기 선교사들은 청교도 신앙의 후예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신앙은 그 청교도 신앙을 다 잃어버리고 세속화된 신앙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규장 퓨리탄 북스’가 우리의 냉랭해진 신앙에 하늘의 거룩한 불을 붙여줄 것이다.
첫 번째로 선택한 책이 토마스 왓슨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다. 토마스 왓슨은 영국국교회의 가톨릭적 신앙에 타협하기를 거부해 목사직에서 쫓겨나 숲속, 헛간, 외양간을 전전하며 설교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피와 눈물로 복음을 사수한 사람이었다. 그의 설교에는 피와 살이 튀는 메시지에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었다. 찰스 스펄전은 토마스 왓슨을 설교의 스승으로 삼았다. 17세기 청교도 신앙의 사자후라고 할 수 있는 토마스 왓슨이 오늘 우리가 잃어버린 ‘하나님 경외함’에 대해 새롭게 일깨워주고 있다. 오늘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듬뿍 바른 모습으로 한국에 수입된 최신 유행의 미국제 복음주의가 하나님을 말랑말랑하게 만들고 말았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잠9:10)
- 토마스 왓슨,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pp 4-9, 규장 편집국장 김응국목사의 글
부록2. 교리와 삶의 분리는 비성경적이다/ 로이드 존스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는 우리가 믿는 것의 결과이다. 교리와 삶을 분리하는 것처럼 비성경적이고 영혼에게 있어서 더 위험한 것은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교리적이다. 그것은 불가피하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과 행위, 믿음과 실제로 구성되어 있다. 두 요점은 전혀 분리될 수 없다.
“아, 나는 교리에는 진저리가 났어요. 나는 시간이 없어요, 나는 바쁜 사람입니다. 책을 읽을 시간도 없고 그러한 면에 취미도 없어요, 나는 실제적인 사람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하는 것’은 믿습니다. 교리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라고 하시지요, 난 상관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피상적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모든 신약의 서신들로부터 바로 그러한 태도보다 더 정죄받는 것이 없다.
신약의 어느 서신을 분해하더라도 그렇게 나눌 수 있는가? 일차적으로 인사를 한 뒤에 즉각 교리가 나타나지 않는가? 그런 다음에 위대한 교리를 개요적으로 말하고 나서 그 교리를 적용시키느라고 “그러므로”라는 말을 도입한다. 신약은, “오, 교리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되는 것은 삶 뿐이다”라고 말하는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만일 여러분의 삶과 삶의 양태가 교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닌 다른 것이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니고서도 선하고 도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고서도 상당한 선을 행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더라도 매우 이상주의적인 사람일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고유한 특징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동이 직접적으로 그의 교리, 그의 믿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의 모든 행동은 언제나 우리가 믿는 바의 차원에서 행해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승인하고 가장 진지하고 심오하게 믿는 믿음의 조항들의 차원을 떠나서 어떠한 것도 생각할 수 없어야 한다. - 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 7권13장, pp 209-210.
부록 3. 성경은 신적 권위를 갖고 있는가? / 토마스 왓슨
우리가 정경이라고 칭하는 책들은 그렇다.
1) 왜 성경이 정경이라고 호칭되는가? 말씀은 진리의 규범이며 우리 삶을 지도하기 위한 표준이 되기 때문이다. 말씀은 논쟁의 판관(判官)이요 무오한 반석이다. 우리는 원본과 일치되는 복사본만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처럼 성경과 일치하는 것만을 진리로 용인해야 한다. 모든 자들은 표준자에 가져와 정확도를 대조해야 하듯이 신학상의 모든 격언은 성경이라는 시금석에 가져가야 하는 것이다.
2) 성경은 완전한 규범인가? 성경은 온전하고 완벽한 규범으로서, 구원에 요긴한 모든 것들을 그 안에 포함하고 있다. 딤후3: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성경은 우리가 믿어야 할 바(Credenda)와 실천해야 할 바(Agenda)를 보여준다. 그것은 우리에게 신앙의 정확한 모범을 보여주고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완전하게 가르쳐준다. 따라서 전승을 성경과 동일시하고 성경을 그들의 전승으로 보완하고 있는 교황주의자들은 죄를 범하는 것이다.
3) 성경의 주된 범위와 목적은 어디까지인가? 구원의 길을 계시하려는 것. 성경은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발견하게 해준다.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말씀의 의도는 우리의 은혜를 시험하는 시금석이 되고 또한 피해야 할 암초들을 보여주는 항로 표지구실을 하려는데 있다. 말씀은 우리의 감정을 순화하고 일깨우며 우리의 지침과 위로가 되고 우리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4) 성경을 해석할 권한을 누가 가져야 하는가? 교황주의자들은 그것이 교회의 권능에 속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같은 주장은 허위인데, 왜냐하면 교황들 중 상당수가 무식하고 사악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성경 그 자체 내지는 그 안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성령이 그 해석자가 되어야 한다. 금강석을 깎을 수 있는 것은 금강석뿐이듯이 성경은 성경으로만 해석할 수 있다. 태양은 그 자신의 빛에 의해 가장 잘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성경이 스스로를 해석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이 지나쳐버리기 쉬운 난제 부분들이다. 이 부분을 누가 해석할 것인가?
하나님의 교회는 성경을 설명하고 해석하도록 몇몇 사람들을 임명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사를 부여하신 것이다. 교회의 몇몇 목사들은 마치 빛나는 성좌처럼 캄캄한 성경에 빛을 던져주고 있다. 말2:7. “대저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5) 그러나 이는 우리의 믿음을 인간들에게 의탁하는 것이다. 우리는 말씀과 일치하는 것 외에는 진리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당신의 목사들에게 모호한 부분들을 해석할 은사를 주셨듯이 그 백성들에게는 그만큼의 분별의 영을 주셔서(최소한 구원에 요긴한 일들에 있어서) 무엇이 성경에 일치하고 무엇이 일치하지 않는지 말할 수 있도록 하셨다. 고전12:10.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주시나니.”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진리와 오류를 분간하고 진짜와 가짜를 판단할 수 있는 지혜와 분별의 영을 허락하셨다(행17:11). “베뢰아 사람은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거늘.” 그들은 바울과 실라가 자신들의 선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들은 교설이 성경에 일치되는지 따져 보았던 것이다. 딤후3:16.
성경이 신적인 영감을 받은 책이라면 다음과 같이 권면해야 할 것이다.
1) 성경을 연구하라 2) 기록된 말씀을 수종히 여기도록 하라 3) 기록된 말씀을 믿으라
4) 기록된 말씀을 사랑하라 5) 성경과 일치하는 삶을 살라 6) 성경을 위해 싸우라
7) 성경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8)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경배하라
- 토마스 왓슨, 『신학의 체계』, PP 60-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