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부흥운동은 거룩보다 행복이 우선이다 / 행크 헤네그라프
조나단 에드워즈는 말한다. “종교에서 미지근함은 혐오스러운 것이지만 열정은 놀라운 은총이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의 덕목 주에서 열정이야말로 가장 주의 깊게 관창하고 살펴야 할 요소이다. 왜냐하면 이 열정을 통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패와 교만, 과도한 인간적 열심이 혼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짜 부흥운동 지도자들은 곧 큰 전쟁이 일어나 자신들을 반대하는 모든 사람이 제거될 것이라고 예언한 데 비해, 에드워즈는 이런 ‘거룩한 전쟁’을 경계하라고 경고한다. 에드워즈는 심지어 종교개혁같은 중요한 경우일지라도 살인보다는 친절함이 온전한 질서라고 분명히 말한다. 에드워즈는 애통해하며 이렇게 회상했다. “종교개혁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영광스럽게 새로워지긴 했지만, 많은 경우 아주 부적절한 방법으로 열정을 표현했다. 심지어 박해라는 모습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에드워즈는 자신들의 새로운 계시를 받아들이기 거부하는 자들에게, 피의 전쟁을 예언하는 과도한 열심 대신, 이렇게 외친다. “본질적인 문제에는 일관성을, 비본질적인 문제에는 자유를, 모든 문제에는 자비를!”
에드워즈는 말한다. “성령이 강하게 임하여 종교 부흥이 일어날 때면 꼭 일어나는 현상들이 있다. 부흥 운동에 참여했던 몇몇 사람들이 시간이 조금 지나면 아주 변덕스럽고 도를 넘어서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또한 얄팍한 열광주의가 나타나고, 영성이 높다고 자랑하거나 자신의 완벽성을 자랑하는 자들이 나타난다. 또한 다른 사람들을 육의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잘못을 저지른다.”
또한 그는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가짜 부흥운동의 지도자 클락은,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과는 반대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패커는 이런 개념을 행복주의라는 단어로 요약했다. 이것은 “욕탕 종교(Hot Tub Religeon)의 기본 원리”다. 사전에서는 행복주의를 행복에 대한 교리 또는 행복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도덕성의 평가 기준으로 삼는 윤리 체계라고 정의한다. 클락과는 대조적으로, 패커는 이 풍조는 “거짓 신조이며, 하나님이 자녀를 거룩하게 훈련하시는 성화의 과정에서 따라오는 고통(히12:5-11)을 간과해 버렸다”고 안타까워한다.
가짜 부흥운동 지도자들은 “최근의 이런 성령의 움직임은 하나님이 교회를 사랑하시는 증거”라고 믿는다. 반면 대각성 운동 지도자들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이 자신의 교회를 개혁하시려 한다고 믿었다. 오늘날처럼 18세기 기독교는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고귀한 목적이라고 믿었다. 마크 놀은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이라는 책에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지적인 업적은 행복 추구가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사고를 거부한 데 있다”고 지적한다. 에드워즈는 “행복 추구가 인간의 가장 고귀한 목적이라는 생각을 거부했다”.
에드워즈는 말한다. “당신이 타락했고 죄에 빠졌다는 사실이 정말 애통한가? 당신은 욥처럼 자신을 혐오하며 먼지와 재 가운데 회개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리고 바울처럼 자신의 죄악을 슬퍼하며 사망의 몸에서 건짐받기를, 죄에서 건짐받기를 기도하는가?” 이 질문에 “예”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당신은 분명 거룩한 행위와 성장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이라고 한다. 가짜 부흥운동 지도자들이 자신들을 대각성 운동 지도자들과 연결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지 이 부분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대각성 운동 주창자들은 거룩한 웃음에 취하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열심을 다해 붙들었던 자들”이었다.
에드워즈는 지옥에 대한 경고는 복음 선포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분명히 말했다. 우리가 절망적으로 “실망”하지 않으면 결코 구원의 위대함을 온전히 알지 못할 것이다. 에드워즈는 열정적으로 선포한다. “만일 우리가 늘 들어왔듯이 그렇게 무시무시하고 고통이 끝없는 지옥이 절말 있다면, 대다수의 회중은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다 --- 그러니 어찌 영혼을 보살피는 자로서 모든 수고를 다하여 사람들에게 그것을 알리지 않겠는가?”
에드워즈의 사상과 오늘날 가짜 부흥운동 지도자들의 메시지를 비교해 보면, 오늘날 기독교와 우리 문화 안에 근본적인 사고의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 사상의 특징은 역동적인 복음 선포다. 반면 가짜 부흥운동 지도자들의 메시지의 특징은 기만적인 경험과의 영합이다. 대각성 운동이 선포의 영역이라면, 가짜 부흥운동은 신비적 경험의 영역이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이 깨달음이라는 개인적인 경험의 영역이 마치 실재인 것처럼 속임을 당한다. 속는 사람들은 깨달음이 자신들을 진정한 영성으로 이끈다고 믿는다. 에드워즈가 사람들을 끌어내고자 했던 바로 그곳으로 가짜 부흥운동 지도자들은 사람들을 몰아간다.
- 행크 헤네그라프, 『빈야드와 가짜 신사도의 부흥운동』, pp 19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