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 운동은 교리적 기독교를 손상시키는 강력한 주범이었다 / 로이드 존스
은사 운동은 회심의 의미를 회복시키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전혀 강조하지 않았다. 은사 운동은 회심은 매우 사소한 것으로 가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교회의 중대한 필요는 다른 능력들- 방언, 예언, 신유에서 춤과 드라마까지-을 취함으로써 획기적인 변화를 경험하는 데 두어졌다. 가르침은 주변적인 배경으로 전락했고, 교리적 무관심을 지향하는 전반적인 풍조가 불가피하게 강조되었다.
“이 운동의 가르침은 ‘성령 세례’ 외에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방언을 말하는 것에 비중을 두기도 한다. 교리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자기들만의 집회와 대회를 개최하고, 거기서 함께 모여 사실상 교리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하고 있다.”
로이드 존스는 확실히 예언은 현대에도 주어지는 은사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오류 없는 계시를 교회에 제공하는 선지자 직분에 대해 말한 것은 아니었다. 로이드 존스는 말하는 자가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이 정하신 지침으로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고함으로써 “마음의 숨은 일들”(고전14:25)을 드러나게 하는 것과 관련된 포괄적인 어떤 역사를 가리킨 것이었다. 이런 개념의 예언은 설교와 중첩될 수 있고, 그래서 설교자는 실제로 사전에 준비한 것보다 더 많은 사실을 전할 수 있다. 로이드 존스는 하웰 해리스와 같은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특별한 권면의 은사를 이 예언의 은사의 하나로 보았다.
로이드 존스는 은사 운동의 “예언”를 이렇게 이해함으로써 은사 운동의 잘못을 확신하는 핵심 요인으로 삼았다. “예언”은 항상 성경에 때라 판단 받아야 또는 “믿음의 분수대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엄밀히 이 현대의 은사 운동이 실패하고 있는 부분이다. 바울은 모든 예언은 “하나님이 사도와 선지자들을 통해 주신 가르침과 교리의 본체”로 시험할 것을 요구했다. “예언을 성경에 반하는 위치에 두는 것은 매우 잘못되고 매우 위험스러운 가르침이다. 나아가 예언을 성경을 넘어서는 위치에 두는 것은 훨씬 더 잘못된 일이다.”
“때를 가리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말하지 않고 “오늘날 성령이 말씀하는 것을 들으라”고 주저 없이 말하고, 성경의 진리를 믿는 신앙을 기독교적 경험으로 대체시키는 경향이 있는 은사 운동은 불가피하게 교리적 기독교를 손상시키는 강력한 주범이었다.
역사상 모든 부흥은 죄와 구속과 거듭남에 대한 중대한 진리가 회복되는 것을 특징으로 보여 주었다. 은사 운동이 제공한 것은 근본적인 성경적 진리의 회복이 아니었다. 은사 운동의 강조점은 복음 메시지의 내용에 두어져 있지 않았고, 오히려 외적 “표적”과 “은사”와 경험에 두어져 있었다. 신앙의 연합을 갈망해 온 전통적인 복음주의의 “배타성”과 “교리주의” 대신, 은사 운동은 참여자들의 다양한 종교적 전통에 따라 “성령에 대한 경험”을 해석할 자유를 충분히 허용하는 경험 지향적 운동이었다.
- 이안 머리, 『로이드 존스 평전 3』, pp 402-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