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칼빈(John Calvin)(1509-1564)
칼빈의 위대한 교리 및 경건서는 <기독교 강요>이다. 이것은 개신교의 전통적 진술이다. 그리고 그의 성경 주석들은 아직까지 주석 가운데 제일 훌륭한 것으로 꼽히고 있는 이정표적인 저술들이다.
루터와 어거스틴에게서 습득한, 절대주권적으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칼빈의 비전은 윌리암 캐리와 같은 개척 선교사들 뿐만 아니라 리처드 백스터, 존 번연, 조지 휫필드, 조나단 에드워드, 찰스 스펄전, 그리고 마틴 로이드 존스와 같은 위대한 부흥목회자들에게 불을 질렀다. 교회의 목회, 목회훈련, 정부 통제로부터의 적절한 자유에 대한 칼빈의 비전은 장로교의 설립을 낳았으며, 거기에서 생겨난 현대대표제 민주주의는 세속정치의 기초가 되었다. 그리스도인의 문화적 소명에 대한 그의 개념과, 예정된 사역과 고난의 길을 따라 안전하게 고향으로 인도받는 전투적 순례자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개념은 겸손하고 열심 있는 신앙의 영웅들을 중단없이 만들어준 세계관이 되었다.
제네바에 정착한 칼빈은 자신의 당대에 영국, 스코틀랜드, 불란서, 저개발국가들, 그리고 그밖에 지역에 있는 개혁자들을 조언하고 격려하는 국제적인 인물이 되었다. 1559년 이후 기독교 대학으로 장식된 제네바 자체는 수천 명의 학생들과 난민들에게 하나의 피난처이자 영감이었다. 칼빈주의는 초기 미국을 형성하였고, 근대 서구는 칼빈주의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 없이는 거의 이해될 수 없다.
칼빈의 생애
1509출생
1521-1526? 파리대학:문학사와 문학석사학위
1526-1531 오르린 대학: B.A.와 변호사 자격 취득
1529-1530 Bourges대학: 개신교로 개종
1535 프랑스에서 추방, 바젤에 정착
1536 <기독교 강요> 첫판 출판, 제네바에 정착
1538-1541 제네바에서 추방,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목회
1540 Idelette de Bure와 결혼
1541 제네바로 돌아옴
1542 교회의 조례제정
1549 Idelette 사망
1553 세르베투스 처형
1555 Libertine반대자들이 드디어 제네바를 떠남
1559 <기독교 강요> 마지막판 출판, 제네바 대학 개교
1564 사망(55세)
제임스 패커에 의한 칼빈의 생애와 사상
칼빈이 역사에 남긴 인상은 거대한 손에 사로잡힌 하나의 뜨거운 심장을 보여준다. 그리고 거기에는 하나님의 사역에서 최선의 준비와 최선의 신실함(Prompte et sincere in opere Dei)으로라는 표어가 새겨져 있다. 칼빈은 당대와 적어도 그후 100년 동안에 살았던 어느 누구보다도 그의 사상이 역사를 더 풍요하게 만들었다는 의미에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었다. 사실, 16세기 중엽부터 다음 세기 말엽까지 칼빈의 시대였다.
칼빈 없이는 순수한 개신교는 17세기 중엽을 넘어 생존하여 올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필요할 경우, 최후의 순간까지 로마 카톨릭의 압제자들과 국가만능론자들에 대항하여 굳건히 서서 싸울 수 있는 유일한 개신교도들은 칼빈주의자들이다는 사실이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 이성의 시대가 열리기 전의 모든 위대한 대결에서 당위성을 설정하고 지배한 것은 칼빈주의이다. 18세기 부흥운동과 함께 시작되어 19세기에 사회, 정치, 선교, 그리고 교회 구조적 표현으로 확대하여 나간 복음주의 운동이 존 칼빈이 없었다면 그처럼 일어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 지도자 모두는 자신들의 기본적인 신앙에 있어서, 칼빈주의자들이었다.
칼빈은 불꽃 튀고 뚫어지게 응시하는 커다란 갈색의 눈에다, 가냘프고, 예리한, 흑발의 멀쑥한 불란서 사람이었다. 편두통을 피하기 위하여 그는 소식(하루에 한끼)을 했다. 나이가 들고 건강이 약해지면서, 칼빈은 허리가 구부정해지고, 몹시 수척했으며, 게다가 바싹 말랐다. 칼빈은 결코 신체적으로 강건하지 않았다. 30세까지 그의 건강은 다 망가지고 말았다. 자신의 임종이 가까워 오던 몇 년 동안 칼빈은 만성천식과 폐결핵, 게다가 소화불량, 두통, 담석, 치질, 통풍, 그리고 열병이 추가되었다. 그러나 존 칼빈은 최후까지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노력을 다 동원하여 하나님과 인간들을 섬겼다.
그는 하루에 4시간 이상을 자지 않았다. 심지어 아플 때에도 자신의 불어와 라틴어를 받아적도록 4명의 비서들을 유지하였다. 방대한 그의 저술은 그런 그의 노력에 의해서 산출된 것이며, 결코 기적과는 거리가 멀다. 매일의 설교와 강연, 성경주석의 집필, 끊임없이 쏟아지는 신학논문들, 방대한 서신, 장로법원에서의 업무, 그리고 끝없는 방문객의 환대---.
칼빈은 악의적이지도 병적이지도 않았다. 책과 아름다움을 사랑하듯이, 칼빈은 사람들을 사랑하였다. 쉽게 성내고 흥분하는 예민한 성격 때문에, 칼빈은 신학논쟁과 설교에서 만큼이나 우정에서도 확끈하고 강인했다. 그의 언사는 열정적이며 동시에 이성적이었다. 칼빈은 냉철한 두뇌와 따뜻한 가슴을 동시에 보유하였다.
칼빈은 임종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다.
“내게 자비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깊은 우상숭배의 암흑에서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복음의 밝은 빛으로 옮겨 주셨습니다 --- 하나님께서 나를 양자 삼으신 그것 외에 구원에 대한 어떤 다른 변호와 피난처는 없습니다. 나의 구원은 오직 그것에 의존할 뿐입니다. 나는, 나의 모든 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게 베풀어주신 그 자비를 가슴에 고이 간직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죽으심과 사랑의 공로로 나의 죄를 속량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속량하사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죄를 기억에서 말살하셨습니다. 나는 또한, 절대주권의 구주께서, 인류의 죄를 위해 흘리신 그의 보혈로 나를 씻으시고 정케 하사, 그 은혜로 심판의 보좌 앞에 담대히 설 수 있도록 하나님께 진심으로 간구하였음을 고백합니다. ---”
“복음의 적들과의 모든 전투와 논쟁에서 거짓되고, 악의적이며, 괴변적인 책략들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진리를 변호하는 데 솔직하고 신실하게 행동하여 왔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나의 열정과 열성이 너무 느슨하고 쇠하여, 나의 직분을 적절히 수행하는 데, 헤아릴 수 없이 여러 번, 실패하였음을 나는 고백합니다. 내가 주의 심판대 앞에 서는 날, 나의 이런 정신적 자책감은 내게 지금보다 더 많은 게으름과 죄책을 입증할 것입니다”
당대의 제네바의 장로들에게 그는 말했다. “나는 너무도 많은 약점을 갖고 있습니다. 때문에 당신들은 인내하셔야 합니다. 내가 행한 모든 것은 무가치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가련한 피조물일 뿐입니다. 나는 항상 나의 실수로 슬퍼하였습니다. 때문에 나는 마음 속 깊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음을 고백합니다.” 오만하고, 경멸적이며, 무자비하고, 자의적이며, 권력을 사랑하는 독재자라는, 판에 박힌 칼빈에 대한 고정관념은 확실히 어느 정도 수정을 요한다.
제네바에서의 칼빈의 목표는 정통주의 신앙과 성결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치 단체와의 밀접한 연계성 속에서 교인을 가르치고 양육하는 것이었다. 시편을 찬양하고, 주해설교를 듣고, 그리고 매월 시행되는 성찬(칼빈은 성찬을 매주일 시행하기를 원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에 참여하고, 그리고 견책과, 만약 필요하다면, 범죄한 사람들의 파문을 위한 자치적인 교회법원을 열기 위하여 매일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칼빈은 행건관이 아니었다(그는 1559년까지 심지어 시민도 아니었다). 그는 교회를 통제하려는 반대자들의 열망을 봉쇄하기 위해 싸웠다. 이것은 제네바 상류사회의 영향력있는 몇몇 가정들의 반칼빈주의 자세로 말미암아 강화되었다. 이들은 불쾌하게도 스스로를 리버틴들이라고 불렀던 이들로서 개혁자 칼빈을 지나치게 우쭐해하는 벼락출세한 건방진 불란서 놈으로 보았다. 1583년 칼빈이 성찬예식을 관장하는 정부에 대해 도전장을 내자 전쟁은 시작되었다. 결국 그 행동으로 말미암아 칼빈은 3년동안 제네바에서 추방당했다.
현대 작가들은 제네바의 신정정치를 무시무시한 소련국가안보위원회(KGB)의 임무를 수행하는 장로법원의 수뇌들이 있는, 일종의 소련의 수용소 군도, 혹은 강제수용소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당대에 이단을 다루는 원리, 신성모독과 시민범죄와 같은 부도덕이 허용되었다는 사실은, 단지 현대 세속정부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보다 국민의 자유를 좀더 제한 하였음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성경적 정통주의를 존중하는 이들은 대중 예절의 기독교적 표준을 준수하였고, 교회를 정규적으로 출석하였으며, 그리고 칼빈의 통치가 예찬할 만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칼빈시대에 영국, 스코틀랜드, 불란서에서 모여든 6000명의 개신교 난민들은 제네바를 이상적인 본보기- 존 낙스는 “사도시대 이래 가장 완벽한 그리스도의 학교”라고 말했다-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 개혁을 추진할 때 제네바를 개혁의 모델로 삼았다.
반-삼위일체의 선봉자 세르베투스가 1553년 제네바에서 화형당했다. 이것은 종종 칼빈의 명성에 있어서 하나의 오점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몇 가지 사실들을 주의 깊게 숙고해야 한다. 칼빈 당대에 반-삼위일체 이단들이 제네바 외에 다른 장소에서도 화형에 처해졌으며 그 실례로 얼마후 1612년에 영국에서 두 명이 화형당했다는 것. 로마 카톨릭 종교재판소가 이미 세르베투스를 사형시키기로 결정했다는 점, 화형의 결정은 칼빈이 개인적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25인으로 구성되 제네바 소위원회에서 결정한 것이라는 점, 이 위원회는 자문을 받고 있는 개혁파교회의 목사들로부터 만장일치의 자문을 얻어 실행하였다는 점, 칼빈은 세르베투스를 사형에 처하기를 원치 않았고,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과 재판 후에도 그의 견해를 바꾸기 위해 그와 여러 시간을 보냈다는 점, 그를 화형에 처한다는 선고가 내려졌을 때, 칼빈은 덜 고통스런 다른 방법으로 그를 참수형에 처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는 점, 부처와 신사 멜랑톤을 포함한 제네바 밖의 주요 종교개혁자들이 전적으로 세르베투스의 형 집행을 승인하였다는 점이 그것이다.
칼빈은 가장 섬세한 주석가, 가장 위대한 조직신학자, 그리고 종교개혁이 산출한 가장 심오한 기독교사상가였다. 그의 가르침은 성경 중심이었고, 그의 삶은 하나님 중심이었으며, 그리고 그의 신앙은 그리스도 중심이었다. 그는 종교개혁의 고백주의적 강조점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경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그리스도로,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을 상당히 명료하고 힘있게 통합시켰다. 거듭난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표현되었고, 모든 참된 기도와 예배의 행위에 표현된 두 가지 확신이 칼빈을 지배하였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며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선함을 예찬한다. 두 가지 확신은 그의 삶에 반영되었고 자신의 최후까지 흔들림이 없었다.
칼빈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자신이 영광을 받기를 거부하였다. 칼빈의 무덤에는 전혀 표시가 없다. 장례식에 조사(弔辭)도 없었다. 두 가지 확신은 또한 그의 신학에 깊이 반영되었다.
칼빈은 쓸데없는 사변가가 아니라 성경신학자, 하나님의 말씀의 신봉자였다. 66권의 성경 말씀이 주제별로 일관성 있게 펼쳐져 있는 그의 <기독교 강요>는, 2판 서문에서 명백히 박힌 것처럼, 독자들을 하나님의 지혜로 인도할 수 있도록, 총체적인 성경공부 준비를 위하여 기술되었다. 또한 칼빈은 조직신학자였다. 이전의 사상들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통합시킨 사람이었다. 그보다 앞선 이들- 루터, 쯔빙글리, 멜랑톤, 부처, 그리고 그들의 동료들-이 설정한 것들을 확증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노력을 기울인 종교개혁 2세였다.
칼빈이 자신의 자료들을 총체적으로 묶기 위해 발전시킨 주제는 성경 주제, 소위 신지식(cognitio Dei)이다. 이것은 기독교 교리, 경험, 그리고 행동들을 연합시켰다. 신지식에 관한 논문으로서, 기독교 강요는 하나님을 아는 것(종교)과 하나님에 관하여 알려진 것(신학) 모두를 다룬다. 신학과 종교 모두는 습득되어져야 하고, 그것들은 하나님 자신의 가르침(교리) 즉 성경으로부터 교육되어져야 한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셨음을 인정하는 것, 그를 예배하고 그에게 감사드리며, 그 앞에 인간은 우둔한 자임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그의 말씀을 연구하고, 양자 삼으시고 구속하신 그들(성부와 성자)의 사랑으로 인하여 성부와 성자를 사랑하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주신 용서와 영광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가운데 살아가며, 그리고 모든 인간 관계와 피조물과의 모든 교제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지식이 어디서 와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칼빈은 성령으로부터라고 답한다. 성령은 기록된 말씀 안에서,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시며, 새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시키 주신다.
주제별로는 칼빈은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라 <기독교 강요>를 저술하였다. “(1)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내가 믿사오며 (2)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며 (3) 성령을 믿사오며 (4)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 이 탁월한 구성에 대한 예찬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계속 되었다. 스칼리거는 말한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야말로 얼마나 훌륭한 책인가!”, “오, 그는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가?” <기독교 강요>를 읽는다면 왜 멜랑톤이 칼빈을 종교개혁의 “유일한 신학자”로 언급하고 했는가 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지난 4세기 동안의 칼빈주의자들의 집단들은 무덤 속에서 한줌의 흙이 되어가고 있지만, 칼빈주의 운동은 역사 속에서 오늘날도 힘찬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 존 우드브리지(엮음), <인물로 본 기독교회사> 하권, pp 44-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