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신앙

박학다식한 케임브리지의 설교자, 존 프레스턴

강대식 2012. 6. 9. 22:48

윌리엄 에임스가 케임브리지 대학을 떠난 후 케임브리지에서 청교도 운동을 계승하여 전개한 인물 가운데 하나였던 존 프레스턴(John Preston, 1587~1628)은 뛰어난 판단력과 신중한 처신, 감정을 절제할 줄 아는 이성적인 학자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논쟁가이다. 그는 교회 당국으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았지만, 청교도 신학을 옹호하고 발전시키는 데 앞장섰으며 수많은 젊은이를 말씀 가운데 양육함으로써 영국 청교도 운동을 확산시켰다.

 

영적인 좌절에 빠져 방황하고 있던 1611년 어느날, 그는 세인트 메리 교회에 가서 존 코튼의 설교를 듣고 생의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당대 최고의 설교자였던 코튼은 죄로 인한 인간의 절망적인 상태와 회개의 필요성에 대해 논함으로써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큰 은혜를 끼첬다. 거듭남을 체험한 프레스턴은 코튼과 가까이 지내면서 그를 통해 세상적인 것을 버리고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신자의 삶에 대해 배웠다. 세상의 허무함을 깨닫자 법학 공부를 포기한 후 설교자가 되기 위해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스콜라 철학자와 존 칼빈 등 종교 개혁자들의 글을 탐독하면서 신학적 기초를 다져 갔다.

 

학교 당국은 승진의 조건으로 청교도 신앙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프레스턴은 승진보다는 신앙을 택하였다. 신앙적 양심을 지키기로 한 것이다. 이러한 프레스턴의 결단은 그의 인물 됨됨이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는 코튼을 통해 은혜를 체험한 후로는 신앙이 생활을 통해 표현되어야 할 것을 역설하였다. 생활이 없는 신앙은 거짓이기 때문이다.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이나 행동, 감각이 없다면 그는 스스로 속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참된 믿음에는 행함이 따르고 그 안에야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신앙과 생활의 일치를 주장하였고, 이러한 삶은 그의 인격을 형성하였다.

 

그는 제자들에게 교회 개혁이 사회 개혁의 기초가 됨을 역설하면서, 설교 운동을 통해서 교회를 개혁하고 죄 없는 사회를 건설하여 양심대로 살아 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설교자의 사명을 하나님의 존재와 본질에 대하여 설교하는 것으로 이해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는 사자나 목자들에 의해 수행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학생들에게 성경 해석의 원리와 설교 적용 방법을 가르치고, 그들을 자신의 조언자인 보스턴의 세인트 보톨프 교회 목사인 존 코튼에게 보내어 설교 훈련을 받게 함으로써 자질을 갖춘 설교자로 만들었다.

 

프레스턴 밑에서 신학 훈련을 받은 학생들이 뛰어난 설교자로 드러나기 시작하자. 프레스턴은 영국에서 학생들을 가장 잘 양육하는 교사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실력이 있는 설교자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기울였다. 매일 아침에 성경을 일고 암송하며 묵상하였고, 시간이 나는 대로 그의 멘토였던 존 코튼을 찾아가서 설교를 듣고 그에게 자신의 설교에 대하여 평가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그는 케임브리지를 대표하는 설교자로 성장하였다.

 

프레스턴은 가능한 한 수면과 휴식 시간을 줄이고 설교 준비와 연구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는 밤 늦은 시간까지 공부하고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그는 잠자기 전에 이불이 침대 아래로 떨어질 수 있도록 해놓고 잠을 청하곤 하였다. 잠을 자다가 뒤척일 때 이불이 땅에 떨어지면 추위로 인해 쉽게 잠에서 깰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오랜 습관은 그의 건강을 해치게 되어 단명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처럼 프레스턴은 늘 시간을 황금처럼 사용하였고, 언제나 기도와 성경 연구와 설교를 준비하는 일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프레스턴의 수고는 헛되지 않았다. 그가 대학 강당에서 설교하거나 교리 문답을 강해할 때면 연구원들이 자리잡기도 전에 일반인들로 가득 찰 정도였다. 설교 운동이 확산되자 교회 당국은 뉴마켓에서 교회 법원을 열고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자 하였다. 프레스턴이 주민과 학생들의 지지를 얻고 있는 것은 비국교도 운동을 선동하기 때문이라고 비난하고, 그를 신속히 징계하지 않을 경우에는 교회의 권세가 땅에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교회 법원에 고소하였다. 프레스턴이 성경에 기초한 예배의 회복과 청교도 신앙의 사수를 주장하자. 성도들은 그의 굽힐 줄 모르는 신앙에 경의를 표하였다.

 

프레스턴의 신앙과 설교자로서의 명성이 영국 전역에 퍼지자, 제임스 1세는 그를 초청하여 설교하게 하였다. 그의 설교는 영적인 권세가 있었다. 이는 그가 철저하게 설교를 준비한 결과였다. 제임스 1세는 프레스턴의 설교를 통하여 큰 감동을 받았고 크게 만족해 하였다.

그의 설교를 통해 다수의 의회 의원과 지성인들이 각성하였고, 런던 안에 “쉽게 무너질 수 없는” 청교도 운동의 기지가 세워졌다.

 

그는 세상의 영광스런 직분보다는 학생들을 교육하는 일에 남은 인생을 바치고자 하였다. 여러 가지 유혹에도 프레스턴의 입장이 변하지 않자 학교 당국은 결국 높은 학문과 고귀한 인품을 가진 프레스턴을 리처드 십스의 후임 교수로 선발하였다. 더구나 연봉을 50파운드에서 80파운드로 올려 줌으로써 프레스턴이 어려움 없이 교수 업무를 담당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프레스턴은 케임브리지 대학에 부임하자마자 설교 운동을 전개하였다. 설교 운동은 교회 개혁의 중요한 수단이며, 존 다드가 그를 설득할 때 한 말처럼 “설교는 일하는 것과 같아서 일하면 일할수록 많은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프레스턴은 런던과 케임브리지를 오가면서 설교하는 일에 그의 삶을 바쳤다. 최대한의 에너지를 쏟아 설교하는 일과 강의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프레스턴과 십스가 손을 잡고 성경적인 개혁 운동을 전개하자. 학생들은 물론 귀족들까지 강좌에 참석하여 청교도 운동에 심취하였다. 찰스 1세는 두 사람을 떼어 놓아야 케임브리지에서의 청교도 운동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프레스턴의 친구였던 버킹검 공작의 제안을 받아들여 프레스턴을 공석이 된 글루스터의 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프레스턴은 왕의 임명을 정중히 거절하고 케임브리지에 남기를 원하였다. 수 차례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프레스턴이 흔들리지 않자, 버킹검 공작은 마침내 그에게 결별을 선언하였다. 든든하 후견인을 잃은 프레스턴은 다가올 폭풍을 예견하고 대학으로 돌아갔다. 그는 침묵 정진하면서 학문연구에 전념하였고, 설교하는 일을 계속하였다. 몸을 돌보지 않은 채 교수 사역과 설교 운동을 계속하다가 건강이 약해졌지만 “우리의 생명은 열심히 사용하지 않으면 철과 같이 녹이 슬어 소멸된다. --어떤 사람의 7년 생애가 다른 사람의 70년 만큼의 공을 쌓기도 한다”고 말하면서, 그는 쉬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 확장만을 위해서 일하였다. 항상 기도하며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함으로써 굶주린 영혼들의 필요를 채워주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일에만 몰두하던 프레스턴은 결국 폐병을 얻었다. 프레스턴은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함으로 남은 여생을 마무리하고자 하였지만, 1628년 7월 결국 그는 기력이 약해져서 입원하였다. 그의 원대로 교향인 노샘턴샤로 옮겨진 뒤에 임종을 맞았는데 그는 죽음 앞에서도 여전히 거룩하고 경건한 자세를 유지하였다. 임종하던 날은 주일이었다. 그는 죽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임종하기 몇 시간 전 그는 “나는 하나님과 성도들과 여전히 대화할 것이므로 내 벗들을 바꾸지 않을 것이요”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성화하기에 합당한 날이로다. 나는 지상에서 성도들과 동행하였다. 이제 하늘에서 천사들과 동행할 것이다. 내가 떠날 때가 가까이 왔다. 내 집에 갈 수 있게 해 주시오. 그리고 보배로운 피로 나를 사신 예수 그리스도께 갈 수 있게 허락하시오”라고 말한 후 “죽음이 다가옴을 심장으로 느낀다. 나의 고통이 이제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라고 마지막 말을 하였다. 그리고 환한 얼굴을 하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41세의 나이였다.

 

프레스턴은 뛰어난 설교자일 뿐만 아니라 학자로서 다양한 저서를 남겼다. 유고로 나온 그의 저서에는 은혜 언약에 대하여 다룬 『새 언약』, 설교집 『믿음과 사랑의 방패』, 『영원한 생명』, 『황금 홀』등이 있다. 그의 설교는 직유법에 능통하였고, 예증을 즐겨 사용하였으며, 성경에서 얻은 교훈을 삶의 현장에 적용하는 설교를 하였다. 그의 설교들은 마른 땅에 내리는 단비와 같았고, 그의 강의는 아침 이슬과 같았다.

 

존 프레스턴의 생애

 

1587출생

1604케임브리지 대학 입학

1609퀸즈 대학 연구원

1611회심

1615제임스 1세와의 만남

1622신학 박사 학위 받음

1624마가렛 석좌 교수에 임명

1628소천

 

- 오덕교, 『청교도 이야기』, pp 10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