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 제4권 20~27장 (롬8:1-4)
로이드 존스, 『로마서 강해』 4권
제 20 장 8장의 개요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로마서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장은 5장이며 가장 감동적인 장은 8장이다. 8장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한다. 사람들이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것은 그들이 문맥에 주의를 기우리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정확하게 발견해야 한다. 저는 바울이 여기서 로마서 5장에서 말해왔던 바를 거론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로마서 5장이 가르치고 가장 강조하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은 모든 자들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구원을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것이었음을 강조한 바 있다. 바울은 5:12-21에서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에 연합교리를 통해서 같은 주제를 더욱 상세하게 다루어 나가고 있는데, 여기 8:1에서 바울은 바로 그 지점으로 돌아간 것이다.
6장과 7장은 하나의 삽입구와 같은 장으로 바울은 자기의 가르침을 향한 반론과 비난들을 해명하고 특별한 난점들을 다루기 위해서 잠깐 길을 벗어난 것이다.
6장은 우리의 성화가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에 연합이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보증된다는 점을 증명한다. 그리스도께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는 데 주안점이 있다.
7장은 동일한 요점을 다른 방법으로 증명하고 있다.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매었으며 그와 결혼하였기 때문에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데 관심이 있다.
7:14-25 율법의 영성은 알고 있으나 율법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전적인 절망을 보여준다. 율법에 의하여서는 전적으로 구원받을 소망이 없다는 것을 안 사람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자기 속에 생명을 가진 사람이다. 만일 그가 자기 속에 생명을 가지지 않았다면 율법을 신령한 것으로 알 수가 없다. 그 생명이 우리 속에 있음을 암시하는 첫 번째 징조는 회개이며 바로 영적 생활의 초기증상이다. 그것은 죄책감을 느끼긴 하지만 아직도 회심하지 않은 단계이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죄와 실패에 관해서 말할 때 먼저 율법의 차원에서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직 율법 아래 있고 정죄아래 있다는 것이다. 이제 그는 그것을 사랑의 차원에서 말하고 자기를 위하여 죽은 자를 기쁘게 하지 못하고 그의 영광을 위해서 살지 못한 차원에서 말해야 한다.
이 위대한 8장의 전체 목표는 “...정죄함이 없나니...끊을 수 없나니”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로마서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8장 처음 쓰는 “그러므로”란 말 자체가 5장에서 말해왔던 것을 다시 거론하고 있음을 입증한다. 여기 8장에서는 5장에서 광범위한 원리로 말씀드린 것을 거론하고 있으며 그것을 보다 상세하게 풀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저는 8장의 대주제가 성화가 아님을 담대히 역설한다. 5장에서와 같이 8장에서 대주제는 그리스도인의 안전성, 성도의 최종적 보전에 관한 절대적 확신성이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궁극적이고 완전하고 철저한 구원에 관한 절대적 확실성이다.
1절에서 주제를 진술하고 나머지 38절은 초두에 있는 그 역설에 관한 강해에 불과하다.
첫 번째 논증, 2-4 -“정죄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율법과 더 이상 관계가 없다고 선포하고 그는 율법이 할 수 없었던 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을 말해간다.
두 번째 논증, 5-13 -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두 가지 일을 한다. 첫째, 우리를 거룩하게 하여 죄의 모든 흔적에서 구원하는 것이며, 둘째는 그것에서 몸까지 구원한다.
세 번째 논증, 14-17 - 우리 안에 성령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아들들임을 증거 하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네 번째 논증, 18-25 -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기 때문에 영광을 물려받을 후사들임을 역설하고 있다.
다섯 번째 논증, 26-27 - 보다 실제적인 문제로 내려가서 우리가 고난과 어려움과 여러 갈등이 가득 찬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을 것을 확약하셨음을 우리에게 깨닫게 한다.
여섯 번째 논증, 28-34 -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우리들에게 자신이 구원의 위대한 기획과 계획을 가지셨음을 분명히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위대한 계획을 이행하기 위해서 자기의 독생자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서 내어 주셨다” 바울은 이것이 아직 이루어지지 아니한 계획들에 대한 절대적인 보증이라고 말하고 있다.
일곱 번째 논증, 35-39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그 모든 것을 요약한다. 결론적으로 최종적인 논증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바울은 5장의 위대한 주제를 다시 거론하고 있는 것이다. 소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은 누구든지 궁극적인 영화를 절대적으로 보증 받으며 온전하고 완벽한 구원과 해방과 건져냄을 받는다는 것이다. 칭의 만으로 멈추고 그 다음에야 성화를 거론하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로마서의 중심 주제를 부인하는 사람이다. 만일 의롭다함을 받았으면 최종적 ‘영화’는 보증된 것이다.
제 21 장 더 이상 정죄 받지 아니함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이것은 세상이 타락한 이래에 인간을 위한 가장 위대한 가능성을 제시해 주는 진술이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정신과 진수와 핵심이다. 이것은 로마서 8장 전체의 주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새로운 차원에서의 이신칭의의 위대한 교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정죄의 반대는 언제나 ‘칭의“이지 성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로마서 8장의 처음 네 구절을 성화의 차원에서 해석하는 자들은 바울이 전제해 나온 모든 것을 거스릴 뿐만 아니라 로마 카토릭적 이단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결코 없다’ - 그 말은 완전하고 절대적이며 완벽하다는 뜻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완전히 어떤 정죄의 영역에서도 벗어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제는‘ 그리스도인에게 정죄가 없다.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것이 사실인 까닭에 그는 정죄함을 느껴서는 안된다. 그러나 마귀는 그렇게 느끼게 하려고 무진 애를 쓸 것이다. 성경을 가지고 대적하라. 그러면 마귀는 ’여러분을 피할 것이다‘ 우리들의 고통의 대부분은 이 구절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데 있다. 어떠한 것도 그리스도인을 정죄 받는 위치로 끌러갈 수 없다. 우리는 그 말씀의 가치를 격하시켜서는 안 된다. 이것이 ’성도의 최종적인 견인‘의 교리를 가르치는 바울의 방식이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가 하나님에 의해서 완전히 청산되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죄를 지어도 무방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바울에게 퍼부은 비난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6:1). 바울은 이미 6장과 7장에서 결코 그렇지 않으며 오히려 정반대라고 답변을 한 바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다. 그리스도인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보다 더한 것은 없다.
5장에서 보았듯이 하나님께서는 ‘경건치 않은 자들을 의롭다’하신다. 또한 의롭다 하실 뿐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넣는다. 하나님께서는 일단 하나의 일을 착수하시면 그 일을 완성시켜 나간다.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는 우리가 다시는 정죄 받을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심으로 ‘점이나 티 혹은 그러한 것들이 없는’ 완벽한 영화의 지점에 이르기까지 일해 나가실 것이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근거가 되고 또한 우리의 최종적인 확신에 대한 기초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구절은 많은 경우에서 신약의 위대한 주제요, 특별히 사도 바울의 서신의 위대한 주제이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고전1:30)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27)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말은 우리가 아담에게 연합되었던 것과 같이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정죄함을 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있기 때문이다.
6장에서 그 증거를 상세하게 밝혀 주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나도 죽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을 때 나도 부활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승천 하셨을 때 나도 그리스도와 함께 지금 이 순간에 하는 보좌에 앉힌 바 된 것이다.
7:1-4에서 동일한 진리를 결혼 관계의 차원에서 남편이 죽으면 여자는 자유케 되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서 결합될 수 있다. 그처럼 우리도 매었던 율법에 대해서 죽었으므로 우리는 주었다가 다시 사신 이에게 시집갈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신랑에 속한 모든 것은 신부에게 속해 있다.
말씀들은 우리들이 그리스도와 너무나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나머지 그리스도의 것은 무엇이든지 다 우리의 것일 뿐 아니라 아무것도 그것에서 우리를 떨어지게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정죄함이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여러분이 죄짓게 될 때 정죄 아래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또한 그리스도 밖으로 내던져지지도 않는다. 여러분이 죄지었을 때 여러분은 율법에 대하여 죄지은 것이 아니라 사랑에 대해서 범죄한 것이다. 여러분은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지만 정죄함을 느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정죄함을 느끼는 것은 스스로 율법아래 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죄를 짓는 불신자와 죄를 짓는 그리스도인 사이의 차이는 전자는 사람이 국가에 대하여 죄를 지어 하나의 법을 어긴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자기 아내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인 인격적인 문제요, 사랑의 관계이다. 어느 의미에서는 법적인 정죄보다 더 나쁜 것이다.
내가 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런 지위와 관계에 있기 때문에 나는 더 높은 기준을 가지게 된 것이고 죄를 지으면 더 많은 범죄를 나에게 한 것이며 또한 더 밉고 가증스러운 것이 되게 한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 그리고 그것을 아는 사람은 ‘율법 아래’ 있는 사람보다도 더욱더 죄와 싸우고 죄를 미워하고 죄를 피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으로 하여금 스스로 ‘정죄 아래로’ 들어가지 말라. 그렇게 하여 죄짓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여러분은 이 위대한 진술을 꽉 붙잡고 있어야 한다.
제 22 장 성령의 법과 은혜의 왕노릇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바울은 1절의 그 주제를 2,3,4,절에서 강해해 나가기 시작한다. ‘이는’이라는 말로 시작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2절은 1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임을 알려 주고 있다.
이 2절 말씀은 성화 문제에 관한 한 가장 중요한 구절이다. 그들의 주장은
“우리를 해방하였음이라”, “죄와 사망의법” - 구절이 7:23에서 사용된 표현과 같은 의미를 전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 안에서 성령의 역사는 ‘우리 지체 속에 역사하고 있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구원한다고 역설한다. 그래서 7장의 곤고한 사람은 8장의 단계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성령이 이제 임하고 그 사람은 두 번째 또는 제2의 축복, 즉 제2의 체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전에 자기를 괴롭게 짓이김으로써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고 울부짖게 했던 것으로부터 온전히 해방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이 구절이 성화만을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해석을 고집하는 학파를 두 부류로 분류할 수 있다.
‘완전 성화’를 가르치는 사람들과 ‘완전 성화’는 아니지만 ‘두 번째 체험’이 그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 승리할 수 있게 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한’ 성령께서는 매순간 승리를 줄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즉 8:2절은 우리가 “해방되는 것은 우리가 성화된 결과이며 사실상 정죄 받지 않는 것은 우리의 거룩하게 됨에 달려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들의 가르침이 잘못되었음을 밝혀내려 한다.
첫째, 로마서 초두에서부터 끊임없이 강조하였듯이 그리스도인이 정죄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거룩하게 됨’의 결과가 아니라 그가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결과에 기인하는 것이다. 정죄에 대한 반대는 ‘성화’가 아니라 오직 ‘칭의’일 따름이다.
둘째,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인에게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날지도 모르는 어떤 것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제2의 축복을 추구하며 받는 그리스도인에게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 것은 더욱더 아니다. 바울은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미 과거에 일어난 어떤 일이라고 말한다.
셋째, 여기서 처음으로 성령이 소개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5:5, 7:6에서 성령의 사역을 이미 언급하고 있다.
넷째, 이 구절을 그릇되게 해석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완전 성화’의 교리를 믿게끔 한다. 바울은 8:12-13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말해 나가고 있다. 결국 바울은 자기모순을 범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죄와 사망의법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율법이나 하나님의 도덕법을 의미한다. 특히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십계명 가운데 있는 법이다.
그 이유는 첫째 바울이 여기서 정죄를 다루고 있는데 정죄를 내리는 율법은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법’이 아닌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이다.(3:31) 우리에게 정죄를 가져오고 우리의 정죄됨을 선언하는 것은 율법이다.(3:18-20) 율법은 언제나 정죄의 큰 요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가 더 이상 정죄 아래 있지 않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우리는 우리에게 사망의 선고를 내린 율법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죄와 사망의 법’이 ‘하나님의 율법’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 이유는 7:7-25에서 바울은 율법이 죄와 사망을 낳는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여기 8:2에서 그 율법을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부르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는 율법은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세 번째 이유는 8:2의 해석은 8:1로부터 나와야 하고 결론적으로 3절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3절에서 바울은 율법이 할 수 없는 일을 말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면 율법에서 나를 해방시킨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다. 바울은 내 안에 있는 성령의 역사 때문에 하나님의 법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성령의 역사가 우리를 의롭게 하며 또 하나님의 율법에서 구원한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다.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기 때문에 정죄를 받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카도릭의 교훈이다. 그들의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완전히 거룩하게 되기까지는 구원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의롭다함을 받았기“ 때문에 정죄 아래 더 이상 있지 않다.
우리는 본문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원리나 직분이나 언약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번역할 수 있다. 바울은 우리가 이제 새 언약, 새로운 약속 아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복음은 우리를 해방시켰다. 우리는 ‘자유케 하는 법’ 아래 있다. 그것을, ‘믿음의 법’(3:27), ‘은혜의 왕노릇’(5:20-21), 여기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 안에는 새로운 생명이 있다. 그 생명은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온다. 우리는 새로운 체제 안에 있다. 우리는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 결코 정죄함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구원의 입장에서 율법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메인 바 되었던’ 것은 제거되었으며 죽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역과 왕노릇 안에 있다. 또한 성령의 왕노릇과 체제 안에 있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우리의 구원이 절대적으로 확실하다는 사실을 알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가 우리를 정죄하였고 우리에게 대해서 ‘죄와 사망의 법’이 되었던 율법으로부터 영원토록 해방되었음을 확신 시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은혜의 직분’, ‘성령의 직분’, ‘영광의 직분’ 이라 불리우는 이 새로운 직분에 의해서 그것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그 모든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이다.
제 23 장 율법이 할 수 없는 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은 죄 있는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롬8:3-4)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복되신 성령의 영역아래 있다. 이것을 이해할 때만이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한 확신과 확실성을 마땅히 즐거워할 것이다. 우리가 율법에서 구원받아 지금은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야 하는 삶을 영위하고 있음을 깨달음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그런 위치에 이르게 된다. 이제 바울은 더 나아가 왜 우리들이 율법에서 해방될 필요가 있었는가를, 그 결과 우리에게 어떤 체험이 올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잘못된 해석으로 그들은 바울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셨을 때 그가 완전한 삶을 사심으로 말미암아 육신 안에 죄를 정죄하셨다는 식으로 진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에게 속한 자들과 그 안에 있는 자들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일한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왜 우리는 그러한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는가?
첫째, ‘죄를 정하다’란 말을 ‘...로부터 건져내다’ ‘멸하다’라는 말로 취급하는데 그 말은 1절의‘정죄함이 없다’라는 말과 같이 ‘판결하다’라는 의미이다.
둘째, 율법이 육신 안에 죄를 정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일을 하라고 율법을 보내신 것이다. 율법이 할 수 있는 일은 육신 안에서 죄를 정하는 일밖에 없다.
셋째, “죄를 인하여“라는 의미는 단순히 ‘죄에 관하여’라는 의미가 아니고 ‘죄를 위한 희생으로’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중추적인 가르침이다.
바울은 율법이 할 수가 없었던 것은 육신이 약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모든 일을 통해서 그것을 이루신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이 할 수 없었던 것은 율법이 요구하는 의가 우리 속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이었다.
율법의 목적은 첫째,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는 의가 어떠한 것인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둘째, 심판하고 정죄하는 것이다. 율법 자체는 선하고 생명의 길을 지시한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생명을 가져다 주는데 완전히 실패한다. 사실 우리의 정죄는 우리가 율법대로 살지 못하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똑같은 방법으로 구원에 이르는 두 방면이 있다.
첫째 국면은 정죄와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하고 둘째 요소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는 것이다. 바울은 여기 ‘그리스도 안에서’ 두 가지 일이 일어남을 강조하고 있다. 율법은 그 두 가지 일 가운데 어느 한 가지도 못한다. 율법은 죄책에서 나를 건져낼 수없으며 의롭게 할 수도 없다.
“안에” - 라는 말의 의미를 그 뒤에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라는 말로 덧붙여 설명하고 있다. 그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장래를 다루어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상 8:29에서 명확하고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바로 그것이 ‘의 이며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은 죄책에서의 구원만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의에게 종’이 되는 것이고 율법의 의를 규정한 방식대로 의롭고 거룩한 삶을 의미한다.
어느 곳에서나 바울의 주장은 그러하다.
고전1: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고전3:13-14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그것은 여기 로마서 8:3에서 “곧 죄를 인하여 육신에 죄를 정하사”라는 말과 같다는 것이다.
갈3: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적극적인 국면으로 우리는 더 이상 저주 아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후사요 기업을 물려받을 자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갈3:21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즉 율법은 죄책과 나에게 내려진 문제로부터 나를 구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더욱더 중요한 것은 적극적인 ‘의’와 ‘생명’을 나에게 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나에게 그것을 주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 때문에 나는 육체를 따라 행하지 아니하고 성령을 좇아 행한다. 나는 은혜 아래 있다.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서 가능케 한 모든 것을 보여 준다.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확신과 기쁨을 주려 하는 것이다.
제 24 장 구원의 보증이신 예수 그리스도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롬8:3-4)
은혜는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을 이루는 것이다. 왜 율법이 그런 일을 할 수 없는가? 바울은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율법이 약해서가 아니고 율법의 실패는 그 율법이 우리 육신을 통해서 일해야 된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다.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이룰 수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우리의 문제를 더욱더 심각하게 만들 뿐이다.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죄로부터 구원받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율법에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우리도 율법도 할 수 없는 것을 행하신 것이다.(롬1:16-17) 바울이 기뻐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복음의 핵심 때문이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은 이미 창세전에 계획된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구원을 자기 자신들의 차원에서 생각한다는 데 있다.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깨닫기 전에는 구원을 확신할 수
없으며 최종적인 영화를 확신할 수 없다.
“자기 아들을 ...보내어” - 기독교는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 안에서 또한 그로 말미암아 이루신 것에 관한 것이다. 바울는 단순히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보내어”라고 하는가? 그리스도는 ‘자기 아들’이다. 창조된 것이 아니라 낳았다고 말하고 있다. 아버지의 독생자요 하나님의 아들은 영원토록 아들이셨고 영원한 아들이시며 또한 사람이 되셨다. 그는 여러분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의 오직 유일하신 독생자를 여러분을 위해서 보내신 것이다.
그는 단순한 사람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지 않는다. 하나님 스스로 우리의 구원에 개입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첫 사람 아담의 경우와 같은 일들이 결코 있지 않을 것이며 그런 실패도 없을 것임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이 보증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기 아들’이 계신 것과 하나님의 성품과 영광에 의해서 보증이 되는 것이다. 보증은 이중적이다.
우리 자신들과 인간들과 ‘세상과 육체와 마귀’ 그리고 지옥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구원은 확실하다. 스스로 인성을 취하시고 지금도 그 인성을 가지고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 면전에서 중재하고 있는 육체 안에 계신 하나님. 신인이신 ‘자기 아들’로 말미암아 구원이 확실하며 그것은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증거된다.
제 25 장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3-4)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 성육신은 하나의 사실이요, 실제 하였던 일이다. 성육신의 실제를 부인한다면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아니라 적그리스도들이다.(요일4:1-3)
바울은 “죄 있는 육신으로”가 아닌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분명히 바울은 우리들이 우리 주님의 인성에 죄가 없음을 깨닫기를 바라고 있다. 그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은 가지고 있으나 죄는 없다는 의미이다. 성경의 동정녀 탄생의 교리가 이 점을 말하고 있고, 고후 5:21에서“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그 사실을 확증하고 있다. 구약에서 제물로 바치는 어린 양은 흠이 없어야 된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셨다. 성육신하실 때 우리 주님은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던 인성을 ‘취하셨다’는 것이다. 카톨릭 교도들은 과장하여 동정녀 마리아의 인성도 죄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나 성경은 조금도 없다.
왜 그들은 주님의 인성에 죄가 있다고 주장하는가?
주님의 인성에 죄가 없다면 어떻게 그가 시험을 받을 수 있는가? 이것이 그들의 대답이다. 아담과 하와는 완전한 상태에서 시험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확실한 것은 시험받는 자의 본성이 악하지 않다 할지라도 시험은 강력하게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아담 안에서 지은 바 되는 첫 번째 인성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는 새로운 인성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전15:)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머리이시며 두 번째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에 죄가 있다고 말한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스도를 첫 사람보다 못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고 덜 완벽하고 덜 완전한 인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아담은 죄와 타락의 결과로 인해서 본성이 죄가 있게 되었고 어떤 연약한 것이 생명 안에 들어 왔다. 연약한 것들은 그의 자손들에게도 전승되었다. 신약성경은 우리 주님께서 피곤과 고통과 지침과 눈물을 흘리는 주님의 지상 생활을 보여 준다. 주님께서 진정한 인간이 되지 않으셨다면 시험을 당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기 때문에 시험을 당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아들을 인간으로 보내셔야 했다.(히2:9-18)
왜 그리스도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셔야만 했는가?
첫째, 율법을 지키고 높여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화해하려면 율법을 지켜야 한다. 율법의 심판을 받고 순종해야 하므로 그러한 일들을 하기 위해서 우리의 대표자로서 세상에 오신 것이다.
둘째, 우리의 죄가 처리되어야만 한다.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모양이 아니고서 그 죄를 담당하실 수 있겠는가? 그는 우리의 죄와 우리의 죄책을 담당하시고 또 우리들의 죄에 대한 심판을 받으시기 위해서는 인성을 취해야만 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 아들의 육신 안에서 정죄한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전에 우리에게 새로운 본성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그것이 가능하게 되는 유일한 방법은 그가 스스로 인성을 취하고 그것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다. 만일 그가 성육신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벧후1:4)가 될 수 없었으며 “하나님의 아들들”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넷째, 그가 “긍휼이 풍성한 대제사장”(히4: 5:)이 되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만일 그가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기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누군데 “소멸하는 불이신” 그분의 면전에 나갈 수 있겠는가? 그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오셨기 때문에 지치고 목마르고 배고픈 것이 무엇인지, 슬픔과 애통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는 것이 무엇인지 아신다. 그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라. 왜냐하면 그것으로 인하여 그가 우리의 “긍휼이 풍성하신 대제사장”이 되기 때문이다.
다섯째, 이 교리가 마귀를 영원토록 침묵시키는 유일한 길임을 주장한다. 마귀 앞에 오직 인간으로만 간주되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러나 마귀는 그에게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마귀는 완전히 실패했다. 마귀는 영원히 침묵하게 되었다.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변호되고, 하나님의 영예와 공의와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고, 확증되고, 영원토록 영화롭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아들이 사람으로서, 사람을 위해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는 역사를 행하셨고, 완벽히 이루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게 된 것이다. 할렐루야!
제 26 장 그리스도의 죽음과 분여된 의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3-4)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하기를 바랄 수 있는 것은 이러한 교리들을 이해할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에 교리와 생활 사이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거룩하게 되는 데는 지름길이 없다. 거룩은 주로 이 위대한 진리들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결과로서 우리 안에서 발전되어 나가는 것이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는가?
’죄를 인하여’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 의미는 ”곧 죄를 위하여 속하는 제물로“(개정역) ‘속죄제물’(70인역)로 라는 것이다. 신약은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오신 주요 목적은 속제제물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정죄에서 구원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바울의 주요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죄로 인하여’라는 간단한 두 마디의 말은 우리로 하여금 그가 이제까지 말해 왔던 구원의 방식에 관한 모든 것을 요약해 주며 상기시켜 준다. 율법은 할 수 없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죄 있는 모양으로 죄를 위하여 보내사 육신에 죄를 정하심으로써 하셨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은 이 세상에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계셨던 자기 아들 안에서 우리의 죄를 정죄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이었다.
왜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고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삼으셨는가? 그것은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하심이니라”라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순종으로 율법의 요구를 완벽하게 이행했고, 심판을 당하셨으므로 율법의 의로운 요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진 것이다.
첫째, 이것은 우리의 칭의를 의미하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단순히 칭의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열매를 맺어야 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속죄제물’이 되셔야만 하셨던 것은 우리가 율법에서 구원받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이러한 새로운 방식으로 살 수 있게 되며 ‘하나님께 대하여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죄에게 권능을 주는 율법을 제거하는 방법은 죄를 위하여 ‘자기 아들’이 죽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것이 하나님이 채용하신 방법이다. 또한 율법이 죄의 권능이기 때문에 율법이 힘을 상실할 때 죄도 그 권능을 상실한다. 그래서 바울은 서슴없이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6:2)라고 말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죄의 영역과 통치와 지배와 권능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내 지체 속에서 죄의 충동’을 심화시키고 자극하도록 내 안에서 역사하고 있었던 그것이 제거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하여’ 보내어지지 않았다면 율법이 아직 존재할 것이고, 율법이 존재하는 동안에는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없다. 그의 능력은 구원이 되고 또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할’ 수 있는 능력이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는 길은 오직 한길,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의 보좌를 떠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태어나 이 세상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의 영혼은 ‘속제제물’이 되셔야만 하셨다. 그는 우리 모두를 구원하라는 아버지의 명에 복종하셔야만 하셨다. 그것은 죄가 ‘그 안에서’ 정죄받기 위해서이다. 주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와 그의 생명의 능력에 연합될 수 있다. 그래서 그 안에 있던 성령이 우리 안에 있으며, 그래서 율법의 의가 우리 안에서 충족되는 것이다.
제 27 장 거룩과 확신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3-4)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셨다. 그 모든 일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는’ 데 있다. 이런 일이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행하는’ - 이 말은 그리스도인의 보편적인 삶의 방식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어떤 실제 행동만을 의미하지 않고 그것은 그의 사상과 욕망과 그 밖의 모든 것을 묘사하는 말이다. 그 사람의 그의 삶, 생각, 판단, 느낌들, 그가 관심을 두는 목적, 목표와 모든 것을 통제하는 어떤 원리들이 있음을 의미한다.
‘육신’ - 일반적으로 ‘인류’를 가르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고, ‘몸’을 가르키기도 하며, 또한 ‘새로워지지 않은 인간 본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이 말은 타락의 결과로 온 인간 본성을 대표하는 말이다. 여기서 바울은 일반적으로 ‘새롭게 되지 않은 인간본성’을 묘사 하고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선한 도덕적인 사람이든 매우 비열하고 야비한 쓸모 없는 죄인이든 간에 중생하지 못한 사람의 전형적인 사고 방식이요 태도이다.
‘영’ - 성령의 영역 안에 있는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삶과 삶의 방식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인도되고 안내된다.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않으며 의문의 묵은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려 하지 않고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려 하는 사람들이다.
다른 견해가 있는데 그들은 ‘육적인’ 그리스도인들과 ‘영적인’ 그리스도인들로 구분한다. 확실히 구원을 받았으나 아직도 육신을 따라 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 사람은 더 이상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입장으로 그를 인도해 줄 또 다른 체험을 가질 수 있다. ‘또 다른 두 번째 체험’, ‘제2의 축복’을 가지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여러분의 결정과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 해석은 바울이 8:1-4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1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말하고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사람들이다. 성령을 소유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9) 그들의 실제적인 행동과 행실이 어떠하든, 아무리 무가치한 삶을 살고 있다 할지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가 그리스도인이면 전적으로 다른 영역, 즉 성령의 영역 속에 있는 것이다.
오직 의롭다함만을 받고, 단순히 사죄와 지옥으로 부터의 구원을 위해서 주님을 믿기만 하며, 계속해서 ‘육신 안에“서 삶을 영위해 나가는 일이란 그리스도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여러분은 중생한 사람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 성령이 여러분 안에 있는 것이다. 단순히 거룩함을 아직 입지 않고 거저 의롭다함만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있을 수 없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1:30).
요한일서 3:9-10에서 요한은”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 속하나니“이런 자들은 죄 가운데 살며 계속 행하며 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으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라고 말하며 이들은 ‘죄 안에서 살아가지 않으며 그 안에서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죄 안에서 자기의 삶을 허비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죄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안에 거주하지는 않는다. 그는 다시 그 죄의 영역으로 되돌아가지는 않으며 다시 마귀의 자녀가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죄의 지배도 받지 않으며 죄와 육신을 따라 행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은혜의 영역과 통치 아래 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들에게 해당되는 진리이다.
“율법의 요구가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하려 함이라” - 우리들에게 ‘율법의 요구’가 우리 안에서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또한 그것의 확신과 확실성을 보여주려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여러분은 “점이나 티나 그러한 것이 없는” 완벽한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먼저 거룩해져야 한다.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 할 것이다. 성령께서 그것을 확실케 하실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어떤 사람도 이 교훈을 지적인 방면에서만 파악해서는 안됨을 확실히 하고 싶어 한다. 만일 여러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었다면 여러분은 성령의 영역 안에 있으며 ‘성령 안에서’ 행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여러분의 전체 마음과 사고방식과 욕망과 행실이 달라지게 된다. 바울은 끊임없이 그 점을 반복하고 있다. 이러한 교리들을 지적으로 믿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다. 우리가 진실로 믿는 다면 우리 자신 속에 가질 것이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타나 보일 것이다.
우리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 안에 역사하고 있고, 우리가 ‘그 영을 따라’ 행하고 있으며, ‘육신을 따라’ 행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가 전혀 없는 하나의 신념으로 만족해서는 않된다. 거룩하게 하는 역사가 동시에 시작됨이 없이 여러분은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영’은 거룩하게 하는 영이다.
“자기 아들을 육신의 모양으로 죄를 위해서” 보내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과 육신의 죄를 정하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의가 “육신을 좇지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육신을 따라 행하고’ 있다면 율법의 요구는 여러분 속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여전히 여러분은 죄 속에 있으며 정죄 아래 있는 것이다.
- 한가족교회 김영희사모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