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5권16장 '영'이냐, '성령'이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4-15)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 이 구절로 우리 삶의 세부적인 항목에 이르기까지 직접적인 지시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안타깝게도 성령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인도를 받고 있다는 것을 주관적으로 인식하기는 너무 쉽다. 교회 역사상 가장 큰 비극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자기들이 성령에 의해서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인도를 받고 있음을 매우 확신했던 환상적인 사람들의 행동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전적으로 배제되었다고 말하는 데까지는 갈 수 없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직접적인 방식으로 인도하고 지시한 실례와 예증들을 사도행전에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행 13:2, 16:6-7) 성령께서 안내하는 것에 대해서는 하등의 문제될 바가 없다. 그러나 여기서 사도가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그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13절에서 성화의 문제를 몸의 행실을 죽이는 차원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에 의한 인도는 13절로부터 계속되어 나오는 주제이며 연관되어 있다.
15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요, 자녀들임을 확신하는 또 다른 시금석을 대하게 된다. 구원을 확신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 그리스도인의 가장 높은 특권이다. 15절은 구원의 확신에 대한 입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구절이다. 14절로부터 우리가 얻었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은 어떤 것을 제시한다. 주석가가 영적인 사람이면 사람일수록 그는 15-16절에 있는 부요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영’ 이라는 말이 두 번이나 사용된다. 여기에 비교와 대조가 나타나 있다.
잘못된 해석을 하는 첫 번째 학파는 첫 번째 말이 정서나 감정을 나타내는 말이고 두 번째는 성령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학파는 성령께서 ‘종의 영’이라는 말로 묘사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여기서 회심전의 사람과 회심 상태에 있는 사람 사이의 대조라는 것이다.
우리는 두 경우에 있어서 ‘영’ 이라는 말이 모두 성령을 가리키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첫째, 여기서 전체 문맥이 성령 자신을 가르킨다. 사도는 8장이 시작되면서부터 거의 성령에 관해서 다루어왔다.
둘째, 사도 자신이 그런 식으로 행한다는 어떤 암시도 주지 않고 같은 말의 의미를 바꾸어 버린다는 것이 분명히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는 점이다.
셋째, 회심하지 못한 사람이 성령이 아니고도 ‘종의 영’과 ‘두려움의 영’을 가진다고 말하는 것이 매우 비성경적이라는 것이다. 불신자는 죄와 허물로 죽어 있지만 자기는 전혀 안전하다고 느끼는 안전과 만족의 영이다.
넷째, ‘받았다’는 말을 강조하려는 것이고 특히 ‘다시’라는 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한때는 종의 영을 받았던 사람들이 지금은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임을 암시하고 있다. 병행적 진술로 너희는 전에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받았었지만 ‘다시’ 그것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산출하는 것은 성령이시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방편으로 해서 율법을 통해서, 말미암아서 그 일을 행하신다. 롬7:7-25에서 그가 “법을 깨닫지 못하여 살아있을 때”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성령께서 오셔서 그에게 율법을 적용시켰을 때 깊이 죄책감에 빠지게 되었다 그 결과 무서운 종의 상태에 있음을 발견했던 것이다. 성령만이 죄책감을 깨닫게 할 수 있다. 성령께서 우리로 죄를 깨닫게 하시는 역사를 하기 시작할 때 그는 정확히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산출하는 것이다. 율법 외에도 때로는 환경들이 우리를 위협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잠시 동안 죄짓지 못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죄를 깨닫게 하는 종의 영이 아니다. 사람들은 전쟁이나 죽음을 직면해서도 더 선해지지 않을 수 있으며 죄에 대한 깨달음을 전혀 가지지 않을 수도 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 오순절 날에 죄인들에게 설교를 하였을 때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라고 하였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존 번연은 그의 - 죄인 괴수에게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 - 라는 책 속에서 18개월 동안이나 그런 상태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자유를 주시는 성령께서는 먼저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산출 하신다. 위대한 부흥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영이 부흥을 일으키려 하실 때 그의 첫 번째 역사는 예외없이 사람들을 낮추어 죄를 깊이 깨닫게 하고 전적으로 무능하다고 절망적으로 느끼게 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종의 영이요, 두려움의 영이다. 이것이 성령을 부어주신 결과이다. 성령은 우리를 낮추시고 우리의 필요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자유를 주시는 성령께서는 먼저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산출하신다.
이 영에 대한 표증들은
첫째, 정죄 의식이다. 자기가 죄인이며 하나님께 대해 전적으로 잘못된 관계에 있으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느니라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롬 7:10-11)
둘째, 자기 속이 부패했다는 의식을 가지게 된다.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14, 17, 18)
셋째, 자기의 전적인 무능력을 깨닫게 된다.(롬 7:15-21)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는 매여 있으며 무능하며 절망적이다. 내가 묘사해 나오고 있는 ‘종의 영’은 언제나 ‘양자의 영’에 앞서는 것이다. 이 15절 두 번째 부분에서 뿐만 아니라 첫 번째 부분에서도 구원의 확신을 주는 근거들을 발견한다. 로마서 7장의 사람은 완전히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그는 ‘율법 아래’서 죄를 깨닫는 상태에 있는 사람이다. 그는 죄에 대한 책임에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과 죄의 권능에서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는 이처럼 두려워하는 종의 상태에 있게 된다. 우리는 무서워하는 종과 두려움의 영을 받는다. 우리가 그것을 ‘받을 때’ 그것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 한가족교회, 김영희사모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