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티오 디비나'와 청교도 묵상의 차이 / 이태복
그리스도인의 묵상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했다는 점에서는 신비주의나 청교도나 동일하였다. 그러나 묵상의 본질과 내용과 방법과 관련하여 청교도와 신비주의는 하늘과 땅처럼 멀리 떨어져 있었고,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을 수 없었다. 오늘날 묵상에 대한 관심이 고조 되면서 신비주의 영성의 묵상 기술이 마치 개신교의 전통적인 묵상 방법인 양 소개되고 가르쳐지고 있다.
신비주의 묵상을 이해하려면, 그들이 만들어 낸 소위 ‘렉티오 디비나(Lectio Divina)’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거룩한 독서’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이다. 쉽게 풀어 쓰면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일기, 묵상, 기도, 관상 등의 순서를 따라 네 가지 단계로 진행된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읽기(lectio)
성경 구절을 천천히 읽으라. 마치 오랫동안 애타게 기다리던 연애편지를 읽는 것처럼 기대하는 마음으로, 또는 경외하는 심정으로 성경을 대하여 모든 단어와 구절을 음미하라. 어떤 단어나 구절이 마음에 와 닿아 감동이 되고 관심을 끌고 혹은 당신을 괴롭게 할 때까지 본문을 읽으라.
2 묵상(meditaio)
그 단어나 구절을 몇 분 동안 숙고하라. 그 단어나 구절이 천천히, 그리고 깊이 당신 안으로 스며들도록 하여 그 단어나 구절 안에서 쉼을 얻도록 하라. 지금 당신의 삶과 관련하여 그 단어나 구절이 당신에게 말하는 것, 당신에게 제공해 주는 것, 또는 당신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귀 기울여 들으라.
3 기도(oratio)
준비가 되었다고 느낄 때, 그 단어나 구절을 체험함으로써 당신 안에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기도들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라. 감사의 기도도 좋고, 간구의 기도도 좋고, 중보의 기도도 좋고, 탄식의 기도도 좋고, 찬양의 기도도 좋다.
4 관상(contemplatio)
하나님의 사랑과 평강의 충만함을 향하여 당신의 마음을 열고 한동안 마음의 고요함을 누리면서 하나님과 함께 조용히 쉬도록 하라. 이것은, 잠자는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엄마가 아무 말 없이 어린아이를 바라보거나 사랑하는 연인들이 서로 말 없이 교통하는 것처럼, 침묵 가운데 서로 교통하는 것과 같다.
첫째, 렉티오 디비나의 전체적인 흐름은 마지막 ‘관상’의 단계만 빼놓고는 청교도들이 실천한 영성의 방법의 전체적인 틀과 똑같다. 차이점이 있다면, 청교도들은 기도를 마무리한 다음에 삶으로 뛰어 들어 성경 읽기와 묵상과 기도 가운데 누렸던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다짐했던 선한 결심을 실천한 반면, 렉티오 디비나에서는 기도 다음에 ‘관상’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단계를 설정해 놓고서 이 마지막 단계에서 우리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비우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쉬고 침묵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신비주의 영성에서는 이 마지막 단계인 관상이 영성의 최고봉으로 강조되었다. 이렇게 신비주의 영성이 묵상의 틀로 삼고 있는 렉티오 디비나는 청교도들이 실천한 영성의 형성 방법과 비슷해 보이지만 실상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난다.
둘째로, 렉티오 디비나의 첫 번째 단계인 ‘성경 읽기’도 청교도들의 성경 읽기와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렉티오 디비나는 첫 번째 단계에서 ‘어떤 단어나 구절이 마음에 와 닿아 감동이 되고 관심을 끌고 혹은 당신을 괴롭힐 때까지 본문을 읽으라’라고 말한다. 이것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렉티오 디비나가 처음부터 감정을 기반으로 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접근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렉티오 디비나에서는 본문을 연구한다는 것, 즉 본문의 문맥을 살피고 여러 가지 해석을 참고하고 성경 전체와 비교하여 본문의 의미를 찾아내는 모든 작업들이 별 의미가 없다. 그저 본문 가운데 있는 어떤 단어나 구절이나 문장이 내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만 있으면 충분히 묵상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신비주의 영성의 묵상은 성경의 본문을 정확하게 읽고 연구하여 본문의 객관적인 의미를 풍부하게 아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는 청교도 묵상과는 매우 다르다.
셋째로, 렉티오 디비나의 ‘묵상’도 청교도들이 실천한 묵상과는 미묘하게 다르다. 왜냐하면 렉티오 디비나의 묵상은 지성이나 이해력에 의해서 주도되기보다는 감정과 상상력에 의해서 주도되기 때문이다. 신비주의 영성은 그 출발부터 감정과 상상력에 의존하기 때문에 묵상의 단계에서도 역시 감정과 상상력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본문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이 우리 안에 스며들고 묵상의 중심이 된 단어나 구절 안에서 우리가 편안한 쉼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청교도들은 묵상의 단계에서부터 이해력을 중심으로 감정과 의지 등 모든 기능이 동원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추론하고 믿고 즐거워해야 한다고 보았다.
신비주의 영성에서는 상상력이 묵상에서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스페인의 신비주의자인 아빌라의 테레사는 자신의 묵상 생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 이해력으로는 묵상할 수 없어서 나는 마음 속으로 그리스도를 상상하였다.” 테레사의 이 말은 신비주의 영성가들이 영적인 지식을 얻는 통로로서 지성이나 이해력을 불신한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리차드 포스터는 이 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지성과 함께 우리의 마음속으로 내려갈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상상력을 활용하는 것이다.” 유진 피터슨도 이 신비주의자들의 대열에 동참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묵상은 성경 분문과 친구가 되기 위하여 기도하는 심정으로 상상력을 활용하는 것이다.”
청교도들도 상상력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상상력도 인간의 영혼에 주어진 기능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절대로 상상력이 묵상을 주도하게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지성 또는 이해력이 인간의 다른 모든 능력을 주도하여 묵상을 진행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윌리엄 퍼킨스는 타락 이후에 인간의 상상력이 철저하고도 지속적으로 악을 향해 기울어진다고 하였고, 상상력이 성화되지 않으면 절대로 그것을 통해서 유익을 얻을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마지막으로, 렉티오 디비나의 묵상은 최종 목표가 ‘관상’이라는 점에서 청교도들이 실천한 묵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청교도들의 묵상의 최종 목표는, 묵상을 통하여 우리의 전인격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고 거기에서 우리가 행할 의무와 누려야 할 위로와 피해야 할 죄를 알아낸 후에 그것들을 삶 속에서 실천하겠다는 각오를 다지면서 기도와 찬송으로 뜨겁게 묵상을 마무리한 후 일상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렉티오 디비나에서 묵상의 최종 목표는 ‘관상’이다. 이때 관상의 가장 큰 특징은 침묵과 쉼이다. 침묵은 말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생각과 소원과 모든 것을 비우는 것이다. 그리고 쉼은 하나님께 아무것도 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항하여 우리 자신을 활짝 열어 놓은 채 하나님의 품 안에서 편안히 쉬는 것이다. 바로 이 관상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연합이라는 영성의 최고봉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렉티오 디비나는 묵상의 초기 단계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더라도 영성의 최고봉에 오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까지도 과감하게 버리고 엄마 품에 안긴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침묵하는 가운데 쉬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신비주의 영성을 따르는 유진 피터슨은 이에 대해 “우리가 성경을 목적으로 삼고 우리의 지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성경을 분석하고 조직하게 되면 관상에 이를 수 없다”라고 한다.
이와 같이 신비주의 영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건전하고도 견고한 지식에 기초하지 않은 채 감정이나 상상력에 깊이 의존한다. 반면 청교도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록된 말씀에 매달렸다. 청교도들은 묵상의 모든 과정이 오직 하나님의 진리인 말씀에 뿌리를 두어야 하고, 이리저리 날뛰기 쉬운 우리의 감정이나 상상력이 묵상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지성과 이해력이 묵상을 주도해야 한다고 믿었다.
조엘 비키는 청교도 묵상을 이렇게 정리한다. “청교도들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생각하는 것이 성경적인 묵상이라고 말하는 일에 결코 지치지 않았다. 그들은 살아 있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에 묵상을 붙들어 맴으로써, 신비주의의 거짓된 영성과 행보를 달리하였다. 반면 신비주의는 실천을 희생하면서까지 관상을 중시하였고, 성경적인 내용을 희생하면서까지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 이태복, 『영성 이렇게 형성하라』, pp 214-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