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 5권 18장 경건한 두려움과 무서운 두려움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
“시내산을 거치지 않고 시온산에 가려 해서는 안된다....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에게 오라는 구원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 율법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 훳필드 -
종의 영은 양자의 영에 언제나 선행한다.
이제 사도가 이 시점에서 강조하고 싶어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두려워하는 종의 영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 곧 적어도 자기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성에 대해서 알고 있는 자들의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더 이상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다시 받지 아니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끝나 버렸고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는 양자의 영에 의해서 그 자리가 채워졌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잃어버려야 한다.
사도는 5장 초두에서부터 말해왔다.(롬5:1-2) 여러분이 하나님과 더불은 화평을 누리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사람은, 더 이상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가질 수 없고 그 아래 있지 않는다. 우리 안에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산출하도록 제1차적으로 역사하신 성령께서는 더 나아가 그 영에서 우리를 건져서 다른 곳으로 옮겨준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진정으로 아는 것, 또한 성령으로 우리에게 그것을 적용시키는 것은, 필연적으로 우리를 두려워하는 종의 영에서 벗어나게 한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는 순간 두려워하는 종의 영은 사라지는 것이다.
‘두려워하는 종의 영’과 ‘경외심과 경건한 두려움’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경외심과 경건한 두려움은 무서워 떠는 두려움이 아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종의 영 가운데 있는 두려움은 묶여있는 가공할 두려움이다. 그래서 절망적으로 그 사람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고뇌에 찬 말을 하게 된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우리로 하여금 그 두려움의 고뇌에 처해있으라고 권고하지 않는다. 히브리서는 우리가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첫째, 어떻게 우리가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나아가면서 동시에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가?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소멸하는 불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언제나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그에게 접근해야 된다. 경외심은 궁극적으로 사랑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허락받은 특권이 얼마나 큰가를 인식하는 것이다. 거기에 무서워 떠는 것은 없다. 어떤 사람은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다시는’ 받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데 급급한 나머지 기도할 때 ‘친애하는 아버지, 사랑스런 아버지’ 라는 식으로 하는 사람이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두려움과 경건함’의 개념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그것이 무서워하는 종의 영이 되도록 하는 사람이 있다. 언제나 하나님이 어떤 분임을 깨닫고 늘 조심해야 하고, 동시에 나는 하나님께 대하여 가진 관계를 결코 의심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나의 경외심은 무지를 기초한 것이 아니라 앎을 기초한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아들들이 더 이상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한다고 교리적으로 역설하고 있는데, 만일 낙심과 불확실함을 느낀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을 자동적으로 나타내는 것인가? 무서워하는 종의 영에서 건짐을 받았다는 것은 그가 결코 다시는 어떤 낙담과 낙심을 맛보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 침체의 원인은 기질의 문제일 수도 있고 심리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체질의 차원에서 다른 사람들보다도 두려움과 이러한 침체의 상태에 더 잘 넘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진정으로, 침체되어 있는 사람에게 나아가서 성경 구절들을 인용해 주면, 그들은 위안이 되는 성경 구절을 듣게 될 때 언제나 환호하고 침체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 아래로 들어가 있지 않다는 절대적인 증거이다. 기질은 회심으로써도 처리되지 않는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될 때 동시에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기질을 조정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아무리 그가 죄로 악한 상태에 빠져있다 할지라도 그는 다시 두려워하는 종 아래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죄의식을 가지나 율법에 대해서 죄를 지었다고 의식하기보다는 사랑에 대해서 죄를 지었다고 생각한다. 여러분을 용서할 용의가 있음을 안다는 그 사실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여러분 자신을 미워하고 여러분 자신을 더욱 힐책하게 만드는 것이다. 다웟처럼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라고 하나님을 바라게 된다. 비록 그가 죄를 지었지만 그는 궁극적인 정죄의식은 갖지 않는다.
셋째, 사단의 공격을 받고 또한 그의 원수들이 그를 목표로 하고 괴로움을 주어 고통을 받는 그리스도인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그는 최고의 무기로 너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입증하기 위해 무척 노력한다. 마귀는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마귀는 그런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내려고 무척 애를 쓸 것이나 성령께서만이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낼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마귀를 물리칠 수 있다는 사실로 입증된다. 믿음을 굳게 하여 대적하는 순간 그는 사라진다.(약4:7) 여러분이 무서워하는 종의 영과 실족하여 넘어진 사람이 가진 영 사이의 차이를 분별하는 방식은 성경을 적용시켜 보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성경에 반응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사단의 공격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넷째,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하나님이 자신에게서 얼굴을 돌린 것처럼 느낄 때가 있다. 실로 이것은 우리를 징계하시는 국면들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 그들이 그러한 조건에 빠져있을 때 그것이 종의 영이 아니냐고 말하나 그렇지 않다. 그는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말하지 않고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할 것을 알꼬”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어딘가 계시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이런저런 모양으로 그 사랑하는 자가 우리에게서 얼굴을 돌리게 하는 범죄를 했던 것이다. 버림을 받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부르짖는 부르짖음은 어둠 속에서 하는 부르짖음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에서 단번에 구원을 받은 것이다. 주님을 찬양하자.
- 한가족교회, 김영희사모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