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복

청교도들에게 기도는 영광스런 특권이었다 / 이태복

강대식 2012. 9. 10. 18:53

브릭 스토우는 기도를 청교도 영성의 가장 큰 특징으로 꼽았다. “은밀한 기도는 청교도 영성의 최고 절정이었다. 기도는 청교도들이 매일 아침 저녁으로 행하는 개인적인 의무의 정점이었다.” 청교도들에게 기도는 영성 형성을 위한 세 가지 방법 중에서도 성경 연구와 묵상을 정리하는 마지막 단계요 최고 절정의 단계였다. 기도는 성경 연구를 통해서 발견된 진리들이 묵상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에 깊이 새겨지고 쌓인 결과 나오는 열매였다.

 

조지 스윈녹, “묵상은 건물을 짓는데 필요한 모든 값진 재료들을 쌓는 것이요, 기도는 하늘에 닿는 건물이다.” 나다니엘 빈센트, “기도는 다른 모든 영적 훈련들이 우리의 안전과 영적인 유익에 도움을 주도록 만드는 중요한 수단이다.” 토마스 브룩스, “개인 기도는 우리의 영혼이 천국에 있는 보고에 들아갈 수 있도록 그 문을 열어주는 비밀 열쇠이다.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은 성도들이 골방에서 무릎을 꿓고 기도할 때 가장 귀한 보화와 가장 감미로운 은혜를 부어 주신다.” 토마스 왓슨, “기도는 믿음의 손에 들린 천국의 열쇠로서, 그것을 돌리면 하나님의 모든 보고에 들어갈 수 있다.”

 

청교도들에게 기도는 의무 그 이상의 것이었다. 윌리엄 거널, “기도는 이 땅에서 모든 성도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특권이다. 기도를 통해서 모든 성도는 영광스러운 천사들이 울러싸고 있는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당당히 나아가, 어린아이가 자상한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자신의 형편을 아뢰는 것처럼 하나님의 품에 편안히 안겨 자신의 모든 형편을 아뢰게 된다.” 그러므로 기도 시간은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자유와 기쁨과 사랑을 느끼는 가장 복된 시간이다. 단순히 영성을 형성하기 위해서 통과해야만 하는 하나의 과정이 아니다.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고 그 영원하신 사랑을 힘입는, 지상에서 누리는 천국이다.

 

청교도들은 기도 자체를 우상처럼 떠받드는 것을 경계하였다. 그들은 기도 자체가 우리의 영성을 형성해 주는 것이 아니라, 기도 가운데 우리와 교제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의 영성을 형성해 주신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언제나 그렇듯이 기도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마치 기도 자체가 영성 형성의 최고 비결인 양 과장하기 쉽다. 토마스 브룩스, “기도는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실 때 사용하시는 왕의 문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신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잠잠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고 소생시키시며 지지해 주신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굳건해지고, 우리의 소망이 강해지며, 우리의 심령이 기쁨에 차고, 우리의 마음이 평강을 누리며, 우리의 양심이 정결해지고, 우리를 짓누르던 유혹이 떠나가며, 우리 안에 있는 부패가 약해지고, 우리의 정서가 뜨거워지며, 우리의 의지가 새로워지고, 결국 우리의 전인격이 유익을 얻게 된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진솔하고도 깊이 있는 반응을 쏟아 놓을 수 있는 충분한 성경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풍성한 이해가 있어야 올바르게 기도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그런 기도가 우리의 영성을 강력하게 형성해 준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성령의 도움 없이는 결코 기도할 수 없다는 점을 늘 강조하였다. “성령으로 기도하며”(유1:20)라는 말씀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존 오웬은 성령의 도움 없이는 그 누구도 제대로 기도할 수 없다고 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마땅히 무엇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우리의 지성에 합당한 지각을 주시고 기도할 내용을 알려 주신다.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는 그것들에 대한 합당한 감각과 인식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것들을 간절히 갈망하도록 우리의 의지와 정서에 역사하신다. 이런 성령의 사역이 있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바르게 기도할 수 있다.”

 

청교도들에게 기도는 기술이 아니라 본능이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깊이 이해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반응이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건전하고도 견실한 지식이 우리 마음에 쌓이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기도할 소원을 주시고 우리의 기도를 친히 도와주실 때, 살아 있는 사람이 숨을 쉬는 것처럼 거듭난 우리 영혼이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의 숨을 쉬게 된다는 것이 청교도들의 확신이었다.

 

관상기도는 청교도들이 볼 때 ‘괴상한’ 기도일 뿐이었다. 청교도들이 생각하는 올바른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이 말씀 연구와 묵상을 통하여 마음에 쌓인 진리 안에서 하나님과 풍성히 교통하며 자신에게 있는 근심과 갈등과 소원과 갈망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인 반면, 신비주의 영성의 관상기도는 인간의 모든 생각과 감정과 소원과 열망을 다 버리고 그저 하나님 앞에서 한두 가지 거룩한 단어를 계속 되뇌면서 쉬는 것이기 때문이다. 청교도들은 신비주의 영성의 이런 점근 방식을 성경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도 없고 기도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는 시편과도 전혀 반대되는 ‘괴상한’ 기도라고 생각하였다. 성경 그 어디에서도 우리의 모든 생각과 기능을 다 멈추고 그저 한마디 표현을 마음속으로 되뇌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즐기라고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존 오웬은 당시에 신비주의자들과 가톨릭에 의해서 적극 조장되고 있던 관상기도를 강하게 공격하였다. “관상기도는 지성이나 이해력의 활동을 완전히 배제한 채 오직 의지와 정서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기도이다. 물론 나도 기도 시간에 의지와 정서가 사랑과 기쁨, 만족과 안식으로 하나님께 집중할 경우 훨씬 더 깊은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우심, 은혜와 다른 탁월함들을 관상하면서 우리의 의지와 정서가 지성의 인도를 받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예배와 경건을 야만스럽고도 비합리적인 것으로 만들 뿐이다. 우리의 예배와 경건은 ‘분별 있는 섬김’이고, 또 반드시 그러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모든 거룩한 탁월함들을 실제로 인정하지도 않고 경외와 사랑, 신뢰와 감사로 표현되는 믿음의 활동들도 없는 기도는, 괴물이나 상상력이 만들어 낸 사생아에 불과하다.” “기도에 따르는 은혜와 특권과 더불어 기도의 본질과 탁월함을 기술한 특정 성경 구절들, 예를 들어 엡6:18, 빌4:6, 히4:16 등을 볼 때, 그 어디에서도 관상기도를 뒷받침해 줄 만한 말씀을 찾아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기도, 혹은 창세 이후 이 땅에 살았던 모든 경건한 사람들의 기도에서도 관상기도를 조금이라도 닮은 흔적조차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성령은 은혜와 간구의 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상기도에 관해 사람들이 상상하여 말하는 모든 것들은 전적으로 성경과 전혀 맞지 않으며, 사람들이 스스로 속아 자기들 멋대로 만들어 낸 산물일 뿐이다.”

 

- 이태복, 『영성 이렇게 형성하라』, pp 221-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