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존스

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 5권 19장 우리가 양자라는 의식

강대식 2012. 9. 12. 08:4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 )

 

우리로 하여금 무서워하는 종의 영에서 벗어났음을 상기케 하는 두 번째 부분이며 하나님의 아들됨의 세 번째 증거이다. 우리는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는 양자의 영을 가지는 적극적인 축복을 받았다. 그것은 그 어떤 것 보다 하나님의 아들됨을 강하게 증거하고 있다.

 

첫째, 성령께서 친히 우리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는, 우리가 양자라고 하는 지식을 깨닫게 한다는 것이다.(갈 4:6)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산출하는 이는 성령이셨다. 다른 측면에 있어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고 싶은 욕망과 느낌을 가지도록 인도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둘째, 많은 주석가들은 14절의 차원에서 ‘양자의 영’은 다만 우리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결과일 따름이며, 일종의 추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를 받는 하나님의 아들들임을 확신하는 열가지 시금석에서부터 끌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주관적인 어떤 것이고, 본질적으로 느낌과 정서와 직감의 영역에 속해 있는 어떠한 것이다. 그것은 지적 차원보다 더 깊은 우리 안에 있는 어떠한 것이다. 이것은 설득시키는 어떤 것이 아니고 휠씬 더 확실한 증거들을 하나님께서는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증거의 본질은 철저하게 주관적인 것이고 성령의 작용에 의해서 산출되는 것이다.

 

‘양자의 영’은 그것을 느끼는 것이지 그 사실을 믿는 것만이 아니다. 사도가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점은 우리가 반드시 교리를 믿어야 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느껴야 되고 의식해야 된다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양자의 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갈4:6에서는 ‘성령’이라고 말하지 않고 자기 아들의 영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를 양자로 받아들이시는 이 행동의 결과로 인해서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그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비교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다는 사실을 인식시키기 위해서였다. 저는 ‘양자의 영’이라는 말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옆에 우리를 두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함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 곧 양자의 영은 ‘하나님 자신의 영’이다. 아들이 중보자로서 성부를 향해서 누리고 계셨던 느낌들은 모든 신자들을 움직여야 하는 느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셨듯이 우리도 역시 하나님 아버지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요 우리 아버지라고 불러야한다.

 

셋째, ‘양자의 영’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느낌의 문제임을 강조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라는 증거의 일부로 그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고 은혜로우시다는 사실을 의식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여러분 속에서 들고 일어나는 하나님을 향한 감정을 말하고 있다. 요일 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이제 우리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그 축복을 깨닫고 우리가 반응을 나타내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가진 관계에 대한 성경의 진술을 읽을 때 그 진술들이 여러분을 감동시키고 또 감동이 되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나타내는 애정을 깨닫고 감동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여러분을 흐느끼게 할 수도 있다. 그것이 나타날 때 여러분은 겸손하게 되고 감동하게 되고 녹아진다. 더 이상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 보편적인 느낌이 아닌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누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것이다. 그는 안식과 평안과 자기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의 아버지이며 아무것도 자기를 해칠 수 없음을 느끼게 된다.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진리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바 아버지‘ - ’아바‘라는 말은 아람어로 어린아이들이 자기 아버지를 부를 때 친근하게 사용하였던 본능적인 말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유대인 가운데 자유인의 자녀들에게만 허락되었고 노예 자녀들에게는 그런 칭호들이 허락 되지 않았다. 우리가 이 노예와 노예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이제 ’아바‘라는 칭호를 사용할 자격을 얻게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복되신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라고 가장 큰 고뇌의 순간에 사용하셨던 말씀이다. 그것은 바로 사도가 우리들에게 말하는바 하나님의 자녀로 수양되었음을 깨닫는 사람의 마음속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부르짖음 바로 그것이다.

 

‘부르짖음’ - ‘깊은 감정을 표현하는 큰 고함소리’ ‘열심을 내어 소리지름’ ‘뜨거움’ ‘끈질긴 재촉’을 의미한다. 우리가 양자의 영을 가질 때 우리는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다. 이것은 지적으로 신학적으로 이론적으로 교리적으로만 믿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더 이상 멀리 계신 분이 아니다. 가까이 계시고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그의 자녀로서 그를 가까이 접근하는 것이다. ‘아바’라는 말은 품위보다 오히려 친근감이다.

사람들이 살아있는 영적 체험에 관해서 점점 알지 못하게 될 때 그 예배가 더욱더 형식적이 되어 간다는 것을 주목한다는 것은 매우 흥미있다. 이것은 20세기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사실은 예배에 의식적인 요소를 도입해 왔다. ‘양자의 영’을 가진 사람은 예배나 기도하는 것이 형식적이고 기계적이거나 냉냉하지 않고 자발적이며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논리와 이해의 문제가 아닌 본능이요, 말보다 더 깊은 것을 알고 있는 천성적인 확신이다.

위기와 난관과 역경가운데 처할 때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부르는 것과 같이 깊은 곳에서 바로 이 부르짖음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조금도 ‘경건함과 두려움’에 있어서 감소를 함축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양자된 자녀는 언제나 그의 하늘 아버지가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안다. 냉냉한 신학자에게는 모순되어 보일 수 있으나 자녀에게는 모순이 없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이처럼 느끼고 말할 수 있는 이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자기들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아는 사람들 뿐이다.

 

구원의 궁극적 목적은 지옥에 가지 않고 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만 아니다. 우리가 ‘양자’의 특권을 누릴 수 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가 되게 하는 것이다. 최고의 선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 것이 최고의 선이다. 그것이 가능함을 아는 것은 그 자체로 위대하고 엄청난 단계이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으로 만족해하고 그것을 알고 어떤 괴로움들에서 벗어나 있기만 하면 된다는 사람들이 있다. 이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 것은 우리가 전에 숙고했던 어떤 것보다도 우리가 아들됨을 증거하는 가장 영광스럽고 높은 증거이다.

 

- 한가족교회, 김영희사모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