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 5권 21 장 성령의 주권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 8:15 )
성령받는 문제를 다시 전체로 다루기를 원한다. ‘받다’로 번역된 말의 어원에 관해서 권위자들은 그 말이 능동적으로도 수동적으로도 사용되는 말이라고 한다. 그리고 수동적 의미로 쓰여질 때 그 말은 “주어진 것을 받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주어진 것을 얻고 획득하고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로마서 8:15에는 두 의미 중 어떤 의미로 쓰이고 있는가?
렉시콘에서도 이 구절에 대한 언급이 없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이러한 문제들은 순전히 언어학적인 차원에서 결정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해결함에 있어서 다른 것들을 숙고할 수밖에는 없다. 이 로마서 8:15만으로도 분명히 그 문제를 해결한다.
8:15의 전반부에서 “너희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첫째, 용법에서 그 말이 어떠한 능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취하거나 마신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아무도 자발적으로 그러한 영을 ‘취했던’ 사람이 없다.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나타내는 무엇이다. 15절 전반부에서 그 말이 분명히 수동적인 말이듯이 후반부에서도 역시 수동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전반부에서 능동적인 의미가 전적으로 불가능한 것같이 그 구절의 균형을 유지하고 병행을 유지하기 위해서 후반부에서도 그 말은 명백히 같은 말로 쓰여져야 한다.
둘째, 성령을 ‘받는것’에 관한 교훈을 살펴보게 될 때 예외없이 이 동일한 수동적인 의미를 가르치고 있다. 누가복음 3:16에서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그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요” 그 능동성은 세례를 베푸는 사람에게 주어져 있지 세례를 받는 사람에게 주어져 있지 않다. 우리가 사도행전 2장에 이르게 될 때 2장 전체를 꿰뚫고 흐르는 동일한 강조점을 발견하게 된다. 성령은 그들에게 보내졌고 그들은 충만을 입었다. 그들은 수동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들 편에서의 어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의 암시가 전혀 없다. 사도행전 19:2에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특히 33절에서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시느니라” 성령은 주님에게 주어지셨으며 그래서 주님은 그 성령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말씀들을 통해서 결론은 첫 번째로 언제나 ‘취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심’에 있음을 알게 되고 그것은 명백히 수동적인 것이다. 두 번째로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성령을 취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교훈이 전혀 없다. 언제나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고, 그들은 수동적인 의미에서 받는다.
셋째, 안수가 존재하였다는 바로 그 사실 자체가 이 체험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는 ‘취함’이 아니라 선물을 ‘주심’이라는 점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 만일 그것이 취함의 문제라면 안수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받는다’는 이 문제는 우리가 소포를 받을 때에 말하는 방식과 비교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소포를 받을 때 “나는 당신의 소포를 받기로 결정했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는다. 선물을 보낸 사람에게 능동성이 주어져 있지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 주어져 있지 않다.
어째서 이것이 그처럼 중요하게 거론해야 하는가?
첫째, 반대하는 교훈은 하나님의 주권을 마땅한 바대로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즐거워할 때만 그런 식으로 성령을 취할 수 없다. 성령은 인격이시오, 주권적인 주님이시다. 고린도전서 12장은 은사 문제를 다루고 있다. 성령께서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다.(11절) 그는 복되신 삼위일체 가운데 제삼위되시는 분이며, 우리는 결코 그를 마치 하나의 인격이 아닌 양 우리가 좋아할 때는 언제나 들이 마실 수 있는 공기처럼 말해서는 안 된다.
둘째, 다른 교훈이 일반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여러분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듯이 믿음으로 또 다른 축복을 취하라” 그러나 ‘칭의’는 사람이 원할 때는 언제나 취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칭의마저도 주어지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우리에게 임하시는 무엇이다. 믿음은 통로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네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10:9) 곧 너희 존재 전체를 드려서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마음’이라는 것은 인격의 중심이다. 이 진리를 믿으면 그의 전체 삶은 그것에 의해서 지배를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저 믿음만’이라는 말에 관해서 매우 주의해야 한다. 참된 믿음은 느낌을 수반해야 하며 이지뿐만 아니라 의지까지를 수반해야 한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셋째, 신약성경에서 성령의 선물로 받은 사람들의 각 경우에서 언제나 강한 느낌을 수반하고 있으며 그들이 그것을 받았음을 의식하게 된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것을 그 사람이 알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것을 안다. 오순절날 그들은 전혀 어떤 느낌이 없이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는가? 어떤 사람들은 사도들과 그 사람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생각했다. 온 도시가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고넬료의 가정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아직도 어떤 다른 교훈은 “믿음으로 취하라. 느낌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라. 당신은 전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이 말씀의 교훈을 믿으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어떤 느낌과는 관계없이 성령을 받을 수 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신약성경 전체가 가르치는 바는 그 정반대이다.
그 이후에 오는 기독교 역사 곧 부흥시대에서나 개인적인 경우에서 보편적으로 그러하였다. 훳필드도 그러하였고 요한 웨슬레에게 일어났을 때에도 그는 “자신의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진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다른 사람들도 곧 그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성령 세례의 차원에서 ‘받았다’는 말에 대한 논증해 보았고 그러나 그 모든 것은 15절에서 사용되는 바의 확신과 양자의 영을 받는 것에 대해서도 해당되는 진리이다.
- 한가족교회, 김영희사모 요약